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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Feb 27. 2019

샤갈의 아버지

런던 에세이- 새벽

샤갈의 아버지는 청어장수였다. 씻어도 씻어도 좀체 가시지 않는, 비린내 물씬 풍기는 청어를 다루었다. 어린 샤갈은 이런 비린내를 날마다 맡았을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저녁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피곤한 아버지로부터 풍기는 청어 냄새를 샤갈은 커서도 내내 잊지 못하였다. 한무리의 유대인들이 거대한 제국 러시아의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살았던, 비텝스크(Vitebsk)라는 타운에서 샤갈은 나고 자랐다. 지금은 국가 이름마저 생소한 ‘벨라루스’라는 나라에 속해있지만 당시는 러시아 제국에 속했다. 그리고 당시엔 둘 다도 되고 둘 다도 되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이 동유럽 유대인들에게 있었다. 100퍼센트 완벽한 정체성이란 사실 없다. 우린 각각의 종합된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이것도 조금있고 저것도 조금있다. 그의 아버지 자카르(Zachar)는 무거운 청어통들을 나르며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달마다 약 20루블을 벌었다. 당시 평균 러시아인들의 임금수준이 13루블이었다고 하니 훨씬 더 많은 돈을 번 셈이다. 그러나 청어를 다루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일어나셨다. 알람시계도 없었을 그 때였다. 인간들은 알람 시계를 만들면서 시간에 복종하기보다 역설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6시에 일어난 아버지는 타운의 유대인 회당으로가 기도를 드렸다. 하루의 시작기도를 이렇게 시작하신 것이다. 샤갈은 아버지가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고 회상했다. 분명히 산 가족들의 건강과 무사를 비는 기도도, 또 동유럽 유대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닥쳤던 잠재된 위험에서 평화를 구하는 기도도 같이 올렸을 것이다. 아니면 죽은 조상들을 기억하며 살아있는 후손의 안녕을 우회로 빌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아버지의 기도는 차가운 새벽공기와 함께 하늘로 나날이 올라갔다. 회당에서 기도를 올린다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하루의 일과를 위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청어 냄새 풍기며 집으로 오셨을 것이다. 순수한 아이의 감성으로 본 샤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중노동이었다. 사실, 노예(a galley-slave)같이 일한 아버지였다고 회상했다. 그 때문에 샤갈의  집안엔 버터와 치즈가 항상 풍성했다 한다. 버터와 치즈가 놓인 가족식탁은 그래서 평화와 따뜻함 그리고 안식의 영원한 상징으로 화가 샤갈의 뇌리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샤갈에게 항상 따라다니던 허공을 훨훨 날라다니는 꿈도 사실 기억으로 한곳에 저장된 정지된 가족의 식탁과 가족과 고향사람들 아니었을까?



샤갈은 1911년 내노라하는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인 파리의 남쪽 몽파르나스에 짐을 풀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는 그의 예술세계를 그려나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고향 비텝스크와 아버지의 고단한 일상을 그는 잊지 않았다. 오히려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일상은 창조의 모티브가 되었다. 엄격한 하시딕 유대교 교육으로 한치의 게으름도 허락되지 않았던 그가 가끔 창조의 메마름이 오면 파리의 생선가게나 어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청어 냄새를 킁킁 맡았을지도 모른다. 파리의 이 이방인 예술가에겐 그리움은 예술적 양분도 되었을 것이다. 또 아버지가 새벽기도를 올리던 비텝스크의 회당을 떠올리며 가까운 성당에서 초를 봉헌했을지도 모른다. 샤갈은 꿈꾸기를 화폭에 담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미술비평가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는 말했다. “샤갈은 태생적으로 유대인 화가다(the quintessential Jewish artist of the twentieth century).” 그러나 샤갈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가 한 사람의 꿈으로 예술품이 탄생하면 그건 전체 인류의 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란 정체성이 예술의 자양분이 되었지만 그것은 전 인류의 꿈과 상통하며 공통분모라는 것이었다. 샤갈의 꿈과 기억들은 지금 파리의 한폭판 오페라의 거대한 천장을 훨훨 날고 있으니 샤갈의 꿈꾸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고백할게 있다. 사실, 파리 ‘오페라’의 둥글고 거대한 천장화보다 ‘마레’ 지구의 유대인 박물관에서 본 작은 그림, ‘아버지(The Father)’란 이름붙인 샤갈의 그림이 훨씬 좋았다. 아니, 그림을 보자마자 진공을 울리는 목탁소리마냥 ‘퉁’하고 울렸다, 길게… 이 그림의 연대를 보니 1911년이다. 그럼 샤갈이 파리에 와서 그렸다는 이야기일까? 청어냄새 그리운 아버지를 타향 파리에서 그렸다면 그는 붓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살려내는 동안 샤갈의 머릿속 진짜  아버지는 어땠을까? 수염 텁수룩 자란 아버지, 비린내 물씬 풍기던 아버지, 회당에서 기도하시던 아버지, 이 ‘아버지’ 전체를 조그만 화폭에 다 담을 수 있었을까? 그림그리기 전, 파리의 어시장에서 비릿한 생선냄새를 맡고와서 기억을 되살렸을까? 아님, 아버지처럼 긴 수염을 기른다음 그림을 그렸을까? 그것도 아님, 가까운 몽파르나스 성당에 가서 아버지처럼 기도하고 온 뒤 그렸을까? 눈이 침침하면서 그림에서 비린내가 풍겼다.


*****

"The Father", by Marc Chagall (1911),

Musée d'Art et d'Histoire du Judaïsm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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