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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y 13. 2019

파르테논 조각품: 대체 누구의 소유일까?

런던 아침 에세이

런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들은 누구에게 소유권이 있을까?


볼게 너무 많아 다리아프고 머리아픈 이 거대한 인류역사의 유물집합소인 대영박물관의 유물 중에서도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명작중의 명작인 파르테논 조각상은 수천년의 나이만큼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신전 조각상의 소유권 주장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 마스터피스는 고향인 그리스 소유일까, 아님 현재 보유국인 영국의 소유일까? 어쨋든, 대영박물관의 독일인 관장은 영국이 보유할 권리가 있다고 하며 반환의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엘긴 마블’이라 불리는 조각상들이 아테네 언덕 최정상의 고대 신전에서 편평한 대도시 런던 복판에 위치한, 박물관이라 불리는 속세의 큰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이제 하나의 역사가 되어버렸고 이제 전세계로부터 몰려드는 관람자들로부터 셀카의 대상이 되어 인기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대영박물관을 후원한 예술품 거래상이었던 듀빈 경(Lord Duveen)은 원래 이 조각상에 칠해진 색의 흔적을 싹싹 지워 깨끗한 순백의 피부로 탈색시켜버렸다. 지금에야 야만의 행동으로 여겨지는 대대적 복원을 하면서 이 고대 조각상은 원래와 다른 인상으로 관람자를 맞는다. 그래서 색이 있던 원시적 아름다움이 사라졌음에도 이 고대 조각들은 빼어난 예술품의 숭고함에다 어런거리는 시간의 신성함까지 더해져 흔히 말하는 아우라(aura. 발터 벤야민의)가 은은히 박물관의 낮은 조명과 함께 뿜어나온다.


하지만, 호머의 오디세우스 시대, 옛날 옛적 '반지의 제왕'같은 시대에 거주했던 아테네의 거룩한 신들의 언덕에서 우아하고 장엄하게 고대 도시를 내려 응시하던 이 조각품들이 이제 런던시내 네오-클래식 건물 속 막힌 공간 안 낮은 천장 전시실에서 마치 질식할 듯 숨죽이며 있는 듯한 조각상의 모습을 대하면 사라진 고대의 신화처럼 아우라는 사라지고 만다. 산소호흡기가 이 조각상에 필요할 것인가? 파편화된 조각 조각을 꿰어 맞춘 현대적 외과수술의 정교함에도 상처의 깊이는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고대 아테네, 신들의 전령사들이 오르내리던 그 언덕 높고 열린 공간에 살아 꿈틀대던 조각의 근육을 느끼며 이 '듀빈 경 전시실'이라 이름붙인 방가운데서 면벽하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원래 신전건물 조각상들의 약 절반만을 포함하는 지금 대영박물관안에 전시된 이 고대 미술품은 깨어져 붙여지고 수천년 오래된 옷이 헤어져 깨끗하게 다 벗겨버린 알몸을 대하며 뭔가 불편하고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생각해보면 언덕 위 높다란 신전 지붕 아래 설치된 조각상들이 지금은 관람자들의 눈높이에서, 즉 너무 낮은 시각에서, 조각상들이 전시돼 원래의 그 자리, 높고 높은 숭고한 지위를 탈취당한채 내리앉은 조각상은 원래의 지고한 위엄은 없다. 우리는 고대 조각가의 망치와 정의 흔적을 전문적 미술사가처럼 찾으러 여기 오지 않았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어느날 파손되어 찢어진 반쪽을 어슬프게 맞춰놓았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구색만 갖춘 작품을 진짜하고 할수 있을까? 상상이 가질 않는다.


고대 신전의 남아 있는 부분이나마 돌려받고자 그리스인 정부와 국민들은 이 위대한 조상의 유산반환을 강력히 원하며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도 고향 아테네로 조각상을 돌려 보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더구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최근 몇몇 아프리카 유물반환을 결정한지라 제국주의 시절 약탈문화재 반환논쟁에 의해 증폭된 파르테논 신전 유물반환 목소리도 커졌다. 그리스 당국은 몇년전 이미 조각상 보전과 설치를 위한 최첨단 현대식 건물까지 지으며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하며 이 조각들이 그리스 국가유산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치국부터 마신 그리스와 달리, 고대 문화는 보편적 인류문화라며 어떤 특정한 나라의 재산이나 소유가 아니라는 영국쪽 주장도 만만치 않다.


엘긴 경(Lord Elgin. 스코틀랜드에 엘긴이란 읍도 있다.)이란 영국 귀족이 200여년전 이 조각상들을 획득(구입 또는 약탈?) 했을 때, 그리스는 오토만 터키의 통치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긴 경이 그리스를 지배중인 터키당국에게 정당하게 돈주고 구입한 것이 합법적인가 하는 논란이 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당시 지배자 오토만 터키 당국은 그리스 문화유산의 소유권과 판매의 합법적 권리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선 우리나라 미술품들도 해외, 특히 일본에 산재하고 있어 그리스 국민들과 똑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반환에 절대적 무게를 둘 것이다. 일제하 우리와 같이 터키지배하의 그리스 국민들은 당시 조상의 유물임에도 정당한 소유권 주장을 못했었고 또 터키 통치자들이 이 예술품들을 마음대로 뜯어 팔도록 합법적으로 허락할 권리가 있었는지 의심도 해보아야 한다. 한편으로 짜증나는 가진자의 논쟁으로 당시 그리스나 터키 당국자들은 이 고대유산의 가치도 몰랐고 온전히 보존할 여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만일 영국이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이 신전 조각상들은 아마 파괴되어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문화유산 빼돌리기의 정당성을 가장한 억지 논쟁의 일부이다.



또다른 문화유산 반환을 호소하는 변호자들은 그리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고 유지한 고대 아테네의 도시국가와 파르테논 조각상의 반환을 요구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시간상 엄청 차이가 나는 고대 그리스와 현대국가 그리스는 어떻게 서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만약, 합법적으로 그 소유권의 정당성을 그리스가 주장할 수 있다면 전성기 알렉산더 대왕 당시 영향을 끼치고 창조하고 생산했던 광대한 그리스 전성기의 통치지역 유물들의 소유권 주장이 가능할까? 비슷하게,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 영토였던 지금의 터키, 특히 지중해쪽 터키의 수많은 고대 그리스 문명 유적, 유물 그리고 그 유산들도 돌려받아야 할까? 도대체 길고 긴 그리스 역사에서 그리스의 경계를 딱 어디라고 선을 그어야 할까? 이는 일반적으로 국경의 경계가 뚜렷하고 정체성도 뚜렸한 우리나라와는 다른 것같다. 지금의 터키는 그리스 문명의 옛 땅에 정착한 결과 지금은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솔솔한 수입도 올리고 있다. 논쟁의 요점은 현대 그리스와 고대 그리스간에 얼마나 많은 연관성이 있을까 하는 것이고 어떤 고리로 서로를 연결시키느냐 일것이다. 영토적인 연관성과 인종적 그리고 역사적인 정통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복잡하고 까다롭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이 그 어느 문명보다 크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정체성과 그 영향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유로피데스의 연극, 민주주의,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겨놓은 숭고한 예술품 등등 인류 모두가 우러러는 업적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들이 수천년 시간에 따라 크게 변한 것처럼 ‘그리스’란 단어가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한 국가나 인종의 정체성뿐 아니라 넓게 문화의 정체성도 당연히 포함되며 이 정체성은 또 끊임없이 창조, 변화, 그리고 재생되었다. 한 예로, 파르테논 조각상들은 고대 아테네의 신전 건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리스가 아닌 '고대 그리스'라는 특별한 표현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문화재의 소유권 문제에 있어서 새롭고, 독창적이고, 또 예술철학적인 부분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특히 특정 문화재반환의 논쟁에서 나찌 독일이나 일제의 약탈문화재 예에서 와는 다른, 아주 오래된 고대의 예술작품이라면 말이다. 이는 소유권이 일반적으로 분명한 근세 작품들과 고대유물은 다르다는 것이다. 물질적 가치로 매겨지는 근세 작품들과 달리 물질적 가치로만 따질수 없고 그 이상으로 정신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고대 예술품의 본질(the inherent nature of ancient art works)'에 대해 예술작품의 본질이라는 정의로부터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예술작품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사 쓰기(History writing)’는 분명히 영원히 사라졌던 과거를 ‘재구성(reconstruction)’할 뿐이지만, 그리스의 고전 예술작품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영박물관에서 우리는 직접 눈으로 그리고 (허용되지는 않지만) 직접 작품을 만져보는 것같은 감정으로 실제 눈앞의 고대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A work of art is present right here and now.) 그래서 예술품의 “생존”은 멀고 먼 미지의 시간, 즉 고대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시간을 넘어서는 지속적인 예술작품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 예술품은 과거로부터 왔기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매개이다.


한편으로, 이런 성스러운 작품들이 신성한 언덕위 신전에서 현대의 박물관으로 옮겨졌을 때 어떻게 조각상의 생존을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예술작품의 ‘정체성’문제이다. 더구나, 옷을 다 벗겨버리듯, 원색을 지워버려 순백의 맨몸으로 전시된 박물관의 조각상은 이미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닐까? 특히 이 그리스의 신전조각들은 하나 하나 분리되고 쪼개지고 옮겨지고 전시되고 감상되기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거룩한 신전건물에 붙박혀 신전의 일부로서 기능할 때만이 이 조각상들은 살아 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조각들은 신전이 아닌 세속의 박물관에 옮겨 전시됨으로 우리는 생명을 잃은 조각들을 보는 것이 되고 만다.


다시 ‘과거’라는 시간과 작품의 기능성에 중점을 두면서, 미술사의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 작품의 ‘본래 의도’에 호소하는 것은 복잡하고도 까다롭다. 문학비평에서 말하는 작가의 죽음(롤랑 바르트)과도 비슷하다. 예술품을 통해 시간상 멀고 먼 고대와의 친교를 이루자면 전혀 모르고 경험못한 미지의 과거까지 감상자들은(예술가나 작가가 아닌)  재창조하고 재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도, 즉 예술가의 의도와 작품의 의미를 잃어버린 보물 찾기하듯 하면 무엇인가 불안해진다. 문제는 작품의 본래 의도와 기능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온 그 시간(과거), 즉 이 두가지 조건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박물관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이 두 조건을 최대한 맞추려 노력한다. 작품완성 당시를 재현하고 그 기능을 보여주기위해 당시의 소품들을 이용해 재구성하며 그 작품들을 원래 ‘있던 그대로’ 감상토록 특별히 신경쓰기도 한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 그리스 조각들에다가 원래대로 다시 색을 칠하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심스럽다.” '과거복원' 또는 '원상복구'가 최선인 것만은 아니다. 불탄 남대문도 그렇고 노트르담 대성당도 그렇다. 만약 그렇게 해서 비록 남대문이, 노트르담 대성당이 또는 그리스 조각상들이 더 진품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건 위작이고 인공적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중요한 문제는 이 딜레마가 고대유물 소유권에 대해 은근슬쩍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닐까? 일단 우리가 신성한 종교작품을 예술로 바꾸고 원래 있던 신성함의 ‘색’을 제거한다면, 그 예술작품의 정체성은 변할까 하는 논쟁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가톨릭 성당의 제단화나 조각들이 박물관으로 많이 옮겨졌다. 특히 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수많은 르네상스 가톨릭 종교 미술품들을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부터 뜯어왔고 귀족들의 성이나 박물관에 떡하니 전시했다. 미술품 수집이나 전시에는 닮고 싶고 자랑하려는 심한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인간심리가 크다. 수집욕구와 전시욕구는 이렇게 인간심리를 잘 말해준다. 영국의 예를 이어서 강대국의 지위를 이어받은 미국도 예술품과 유물 수집에 저리가라 할 정도로 혈안이 되었다. 유럽문화를 고향으로 여기며 문화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의 진입을 위해 유물과 예술품 수집은 문화국지위의 지름길이었다. 강남의 벼락부자나 당시 미국의 벼락부자나 마찬가지고, 개인이나 나라도 마찬가지다. 없던 돈이 생기면 '허세'는 절로 나온다.  '돈있는데 사자'로 당시 떠오르는 미국의 경제력에 낮아지던 유럽의 지위와 품위유지는 예술품과 유물판매였다. 아하, 거기엔 좋은 말로 선견지명이 있고 나쁜말로 돈만 밝힌, 위에서 언급한 예술품 경매꾼, 듀빈 경이 있었다. 그는 공공연히 ‘돈은 미국에 있고 작품은 유럽에 있다’를 소리높여 외치며 당시 높은 값으로 부유한 미국의 유럽문화 추종자들에게 수많은 르네상스 작품들을 소개하고 팔았다. 그래서 지금 대부분의 미국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당시 넘치던 달러로 사모은 작품이나 유물이 가득하다. 예술품이나 유물들은 이렇게 자본에 휘둘리며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 축구선수들처럼 시장에서 사고 팔린다. 많은 미술비평가나 박물관 전시회의론자들은 신성한 작품들이 도대체 세속적 예술작품으로 둔갑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들의 의문점은 수많은 성당의 제단화가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예술작품으로 둔갑해 전시되면 그 종교성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다.


그래서,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불상들은 그 종교적 기능이 마비된 것일까? 그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들은 향연기를 맡을 권리와 제물을 받을 권리를 뺏긴 것일까? 그래서 오직 불상의 ‘미적 가치’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까? 조각상이나 제단화의 종교성과 신성함은 신전에서 박물관으로 장소이동됨으로 바람에 구름 흩어지듯 신비로운 아우라는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래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작품의 ‘아우라’는 감상자의 눈에 보이지 않고 가슴에 닿지 않는 것일까? 그저 복제품일뿐일까? 박물관에 전시된다면 무조건 신성한 종교적 아우라는 사라지고 거룩함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예술품을 우린 감상이라 한답시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일까?


대영박물관의 엘긴 대리석 조각들은 법적인 소유권 문제만이 아닌 이같은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더욱 자극적인 방법으로 던져주고 있다. 이것은 비록 이 조각품들이 지금은 사라진 고대 이교도의 문화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해버릴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르테논 신전과 그 조각품은 인류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런만큼, 이 작품들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소유권의 중요성은 그 밑으로 잠시 내려간다. 이 고대의 조각품을 감상하며 우리는 멀고 먼 과거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한껏 단축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영겁으로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something)’을 이 작품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때 성당에서 제단화로 붙박혀 있었던 제단화도 이제는 또다른 장소에서 또다른 아우라로 빛을 발한다고 믿는다. 관람자들은 중세 성당에서 보던 아우라완 다른 그 무엇(something)을 세속의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 그 종교적 신성함의 아우라는 이미 사라졌고 생명을 다했다. 아무리 과거를 재건하고 재구성해 전시한다 하더라도 감상자의 태도는 이를 눈치채기에 종교적 신성함의 소통이 없다. 성전이 아닌 세속에선 일대일의 종교적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엔 대신 예술적 소통이 일어나기에 또다른 아우라는 이 소통으로 발해지고 느껴질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위대한 작품을 ‘눈’으로 마주하며 우리의 ‘비판적 사고가 윤리적 행동의 필수적인 전주곡’이라는 플라톤의 충고도 알아들으려 ‘마음’도 열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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