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율리시즈 Jun 19. 2019

영화평 "기생충" : 짜맞추기와 우연의 짬뽕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 파리 저녁

(*스포일러 많음)


술작품을 등수로 매길수 있을까? 1등과 2등 그리고 실패작… 터너 상 수상발표시 마돈나의 의도적이고도 도발적으로 내뱉은 원색적 욕설에 동감한다. '영화도 예술일까?' 하는 논쟁이 지난지 오래다. 이제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어엿한 예술이란 포럼에서 턱하니 자리잡고 앉아 그것도 큰 영향력을 사회 곳곳에 행사하려 한다. 이에 질세라 등수를 매겨 상도 듬뿍 준다. '등수매김'인간성의 한 부분일까? 아님 돈벌이 수단의 그럴듯한 포장일까? 상업영화야 관객수로 자동적으로 등수김이 능하지만 소위 예술영화라면 어떻게 매길까? '로튼 토마토' 관객 평가로? '이 시(Poem)가 저 시(Poem)보다 좋더라, 그래서 이 시에 금상을 주고 저 시는 은상을 주자.' '1920년 1등상은 피카소이고 2등은 마티스다'?


한마디로 웃기는 짬뽕이다. 짬뽕은 맛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웃기기도 한다. 맛있고 웃기는 짬뽕이다. 렇기에 짬뽕을 좋아한다.


짬뽕은 영화에도 많이 있다. 내노라하는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의 영화 셀럽들, 소위 영향력있는 인사들, 돈자랑하고 싶은 인간, 자기 이름 몇자 알리려 기쓰는 인간들이 해마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도 볼겸 겸사겸사 이 등수매김 잔치에 참석하거나 또는 등수매김 실황중계를 보며 이 '욕망의 '이란 세계에 속하기위해 안달다. 셀피를 찍어대며 인증하러 모여드는 곳이  한 곳이 바로 프랑스의 지중해 도시 "칸느"이다. 덩달아 냄비언론은 등수에 들면 작품성(?)이 있다고 침튀긴다. 그래서 언론에 의해 튀 작품에다  상징이 어쩌니 저쩌니 하기도 하고, 이건 이렇게 해석해야 한하며 럴듯해석을 갖다붙이며 영화의 주가를 팡팡 쏘아 올리면, 아하 관객수도 덩달아 라간다. 그래서 그 작품이 오징어든 새우든 아님 고구마든 '모두 다' 튀김이 된다. 등수에 중독된 언론과 관객이라면 속에 든 것이 오징어든 새우든 가리지 않고 이 '튀김향기'와 '맛'만을 평가한다. 과거 한시절 대부분 프랑스 자국영화 그리고 서유럽 영화가 많은 상을 타던 때와 달리 요즘은 그나마 다국적이다. 동남아 태국의 '엉클 분미'도 오래전에 황금종려상을 탔다. 개인적으로 참 잘 만든 영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생충'과 다르게 요리조리 '인공 양념'을 첨가하지 않은 순둥이 영화였다. 하여튼  이 영화제의 상징성 그리고 파급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1, 2, 3등 등수에 포함되면 명예와 돈도 자연히 따라 온다. 삐에르 부르지외의 '장(Field) 이론' 자본논리다. 이는 문화장(Cultural Field)에서 가치있는 문화자본을 부여받는 지름길이며 이 영화장의 주류에 절로 편입된다. 예술은 부유하는 돈이란 풍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등수의 '노'로 날개를 단다. 그럼에도 '대량자본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작품성을 고집하는 '진짜 멋있는' 감독들에 경의를 보낸다. 영국의 '켄 로치''마이크 리' 등등 아직도 우리의 냉한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감독들이 있음에 감사한다. 이들은 돈만 뻔질나게 밝히는 자본가들의 투자를 잘 못받아도 꾸준히 잘 만들어 내는 영화감독 아니 '예술가'들이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이들은 상도 많이 탔다. 한편, 이들에 비해 할리우드 대형영화사나 넷플릭스 같은  회사의 자본투자를 받는 상업성 감독들은 '행복(?)'하다. 예술과 상업, 즉 작품성과 상업성을 교묘히 짬뽕시킨 봉준호의 '기생충'이란 한국 영화가 드디어 대상이라 이름붙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 영화 관객수도 술술 올라가고 있다. 위의 포스트를 보라. ''빰 도르"... 좋은 영화다. 자랑스럽다.


우연이랄까? 칸느 영화제의 나라 프랑스에서 그것도 파리의 오데옹(Odeon) 극장에서 '기생충' 간판을 보았고 그대로 냉큼 들어가 비싼 표사고 관람했다. 상받은 작품이라 그리고 신문기사에 나도 영향도 받았다. 언론의 소한 튀김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만약, 상받지 않고, 기사에 나지 않았음 뭐하러 파리까지 와서 이 고생이람…


우연이랄까? 영화상영 중 부잣집을 설계한 건축가 남궁현자의 신문기사 제목이 퍼뜩 지나갔다. '생제르망 데 프레의 추억'이라 나왔다. 촌스런 헤드라인이지만 아마 파리의 소르본 대학가가 있는 생제르망 데 프레 구역 어느 건축학교를 다녔는가 보다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이 프랑스를 의식해 의도적으로 집어 넣은 건가? 불어 자막이 있었지만 읽지 못했다. 혹시 그 건축가가 이곳 파리의 대학가에 살았을까? 실제도 아닌 창작인물임에도 이렇게 연결이 절로 되었다. 영화도 그렇다. 창조물임이고 가공적인데 관객은 영화속과 바깥세상을 서로 연결시킨다. 거짓말임을 뻔히 알면서도 속는다. 이것저것 짜깁어 연결시키고 '봉합'시키는 인간능력은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 기생충 영화를 보고 있는 이 파리의 극장 위치가 바로 생제르망 데 프레 아닌가? 이곳 (옛) 소르본 대학가 구역엔 여러 극장이 있다. 가까운 곳엔 아예 '오데옹(Odeon)'이란 지하철 역도 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이 영화처럼...


우연은 이렇게 어느날 예고없이 나타난다. 우연은 창작자들에게 창조작업 중 자주 용된다. 그러나 관객이나 독자가 이를 예견해 버린다거나 쉽게  알아채버리고 너무 속보이게 드러나작품의 가치는 똑똑 떨어진다. 그리고 우선 재미가 없다. 우연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관객을 속이는게 정교한 영화고 소설이고 이 기생충 영화에 이 "우연"은 정교한  "짜맞추기"를 가장해서 매끈(?)하게 나타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잘 만든 한 편의 영화지만(상 받았듯이) 우연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 감독이야 의도치 않았겠지만 우연이 잠복돼 있어 관객이 눈치 못채게 하는 기교가 없다. 한마디로 어설프다. 하지만 실망한 봉준호 감독의 전편 "옥자"보다 이 영화는 훨씬 낮다. 옥자는 영화보다 하품만 서너번 나왔다. 그래서 일어나 나가버릴까 생각도 몇번 들었다. 사실, 영화 이름만 아주 예쁜(?) 영화였다. 억지 웃음을 넣은 것부터 어설픈 과장법 등등… 연기 잘하는 제이크 질렌할과 틸다 스윈톤도 웬지 이 영화에선 엉망이었다. 리암 리슨의 인천 영화와도 비슷했다. 그런면에서 이 기생충은 옥자로부터 분명 진일보한 영화다.


먼저 영화제에서, 특히 세계유수의 칸느에서 상을 타려면 어떤 공식이 있다. 영국대학에서 시험칠 때 어떤 '포인트'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든지, 어떤 논쟁거리는 꼭 필수로 작문하면서 논쟁해야 한다고 시험 교수님이 친절히 짚어주시던 것이 생각난다. 즉, 점수딸려면 쓸데없는 것 이것저것 넣어 분량 늘이지 말고 필수요점 가지고 논쟁해! 그러려면 '질문'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핵심포인트를 스스로 계속 상기시키며 시험문제나 에세이를 작성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 영화제에서 상을 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여기에다 신선하고 새로운(창조적) 도전이란 말도 슬쩍 가미시킨다. 상받을 '공식'이며 상주는 '이유'다.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영화사든 예술사든 기록이 안된다. 흔히 말하는 굵든 가늘든 '한 획'을 영화사에 긋지 못한다. 임권택 감독이 이 영화제 모범답안 포인트에 맞추려 무척 애썼다고 고백한 인터뷰가 기억난다. 그때 '가장 한국적인게 가장 세계적이다' 란 이제는 닳아빠진 말도 많이 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이 '질문과 답' 공식에 맞추려 한 흔적이 곳곳에 뻔하게 드러난다. 아마 서구의 평론가들은 이를 보질 못했을 수도 있다.


우선 이 영화는 빈부차이의 사회문제를 대놓고 건드린다. 좋은 논쟁거리이고 '점수 올리는' 핵심포인트다. 확실하게 아래것(못가진 자)과 위것(가진 자)을 이 영화는 구분시켜준다. 먼저 사람사는  외향으로, 사람들 입는 옷으로, 먹는 음식으로,  그들이 쓰는 언어로, 그리고 '의도적인 냄새'술술 풍기는 '냄새'로 서로 구분시켜 놓았다. 이분법이다. 흑백(Black and White)으로 선명한 경계를 그었다. 하지만 문제는 뚜렷한 경계가 그어졌을까? 라는 질문이 여기에 빠졌다. 그저 건드리기만 할 뿐이고 (빈부격차를 보여주기만 하) '설명(Discription, Not Argument. 논쟁이 아닌)'하기만 할 뿐이다. 물론 요점질문에 관객이 바라는 정답이란 없으며 또 고도의 관객은 답을 기대치 않는다.  이것저것 짬뽕으로 섞어찌게처럼 요리한 영화에 이 부의 확실한 경계가 '왜, 누가, 아님 어떻게 그어졌는지?' 란 질문 너무 어려울까? 그 경계를 넘으려는 가난한 인간들은 어떻게 그 경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은 상처로 남았으며 그 상처가 문서위조 쯤은 아무렇지 않는 윤리의식을 형성했는지 가능한 여러 답들 또는 오피니언 펼치거나 끌어내지 않고 빈부격차를 그저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줄 뿐이다.  관객이 영화본 뒤 알아서 해석하라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친절하게 관객을 안내하고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관객의 머리속에 영화가 끝나도 "?" 하며 스스로 질문하지 않고 머리에 오랫동안 맴맴 남지 않는다. 그 가족은 왜 가난하지? 그런데  가족은 부유하지? 그들의 능력 차이일까? 기회 불균등일까? 아님, 사회 부정의(Social Injustice)일까? 그래서 이 영화가 빈부격차를 가지고 어쨌다는 것일까? 속이고 사람죽이는 윤리성을 여기서 따지는 것이 아니다. 나만 그럴까? 또한, 빈부격차의 사회문제를 통해 거창한 인간본질을 파헤치는 영화도 '기생충'은 아니다. '블랙코메디'란 장르를 붙여서 보자면 가끔씩 송강호가 내뱉는 철학적인 대사가 있겠다. 그것도 앞뒤가 안 맞는게 (실례지만) 가방줄 짧고, 백수에다, 아내에게 구박받도록 설정된 영화속 주인공 송강호의 역할이 가끔 이런 거창한 철학적 대사를 그것도 아주 송강호식 습관화된 낮은 톤으로 엄숙하게 읊조리는 게 아주 이상했다. 이 철학적 대사가 무슨 괴기영화처럼 들렸다. 코믹한 송강호가 가끔 철학자가 되는게 이 영화다. 코메디가 아닌 '블랙' 코메디라 그런가? 하여튼 블랙코메디란 장르로 붙이자면 주인공은 코메디로 시작해서 코메디의 역할로 끝나야 좋을텐데. 그래서 관객 '스스로' 그 코메디나 유머 속에서 질문을 끌어내며 '신만의' 답도 가능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서 뭔가 ''하고 머리에 충격이 올 정도로 관객들 머리에 돌을 던지는 것이 블랙 코메디가 아닐까? 영화속 중요 소품이자 '뻔'한 의도로 감독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수석"을 놔 두고서 봉준호 감독은 왜 그걸 관객들을 향해 스크린 밖으로 던지지 못했을까? 왜 감독은 이 확실한 무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을까? 이렇게 거창한 대사를(인생은 무계획이라는 ) 통해 친절히 진부하게 설명말고 관객 스스로 "왜?" 하도록 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에이구… 무지의 관객에게 친절하고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 그랬을까? 대사로 관객에게 뭘 주입시키려 노력한다면 분명 깊이없는 작품이다. '명대사는 여기 필요 없다.' 굳이 의도적으로 명대사를 갖다 붙이려 노력한 것은 허무하다. 시각적으로 설명해 보여주는데 왜 또 영화 콘텍스트(context)에 맞지 않게 그런 친절한 대사를 삽입시켰을까? 그런데도 끝내 왜? 라는 질문을 참다못해 안달난 관객이 영화속 소품인 '수석'을 꺼내 던져보지만 김빠지영화는 끝나고 만다. 마지막에 죽고 죽이는 결론으로... 그리고 불필요한 마무리 장면의 길고도 긴 '그 뒤 어떻게 되었나?' 친절한 설명이 너무나 허무하듯이(가난한 아들이 돈벌겠다는 맹세 그리고 그 집을 사겠다는, 아니, 그집 소유자로 지하의 송강호가 걸어나오는 꿈. 그 꿈은 '개꿈'이란 걸 재빠른 관객은  눈치채 버렸다.) … 그리고 터져나오는 무료한 하품… 대낮에 낮잠자다 깨어난 송강호의 벌건 얼굴처럼 '우연과 짜맞추기'의 허무함이 벌겋게 몰려온다.


'우연'은 이 영화에 너무 많다. 그리고 이 우연과 더불어 '짜맞추기'와 플롯'착착 들어맞는다'란 평가도 옳다. 가난한 가족의 아들이 친구 부탁으로 과외가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과외 첫날에, 그것도 능수능란하고 멋지게 첫 과외를 하고 나오는 길에 막바로 미술과외를 제안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이 날은 '첫날'이었다. 가난한 집 가족의 딸은 쉽게 이 자리를 얻어내고 또 능숙하게 (인터넷에서 배운거로) 첫 시간부터 어리숙한 부잣집 마나님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린다. '짜맞추기'고 '우연'이고 '뻔'하다. 거기에 덧붙여, 미술과외 첫날 돌아오는 차안에서 딸은 벌써 자기 아빠를 운전기사로 취직시키기로 결심하고 바로 계획을 실행한다. 모두 다 첫째날이다. 그리고 모두 다 성공한다. 이쯤되면 뭔가 이상하고 "뻔하다"라는 말이 머리속에서 옹알댄다. 운전기사로 고용된 아빠 송강호는 또 자기 아내까지 가정부로 이 부잣집에 들여오게 만드는 걸 멋지게 성공시킨다. 성공 성공! 대성공이다. 가족 네명이 다 말이다. 재미없다... 아마 마지막 가족 일원인 엄마의 가정부 취업이 그래도 계획이 디테일하고 조리있게 했다. 이 기막힌 성공, 백수 가족 네명이 연달아 능숙하게 연기해 이루어낸 성공땜에 "뻔하다"란 소릴 끝내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유능하고 재능있고 뻔뻔스러우며 유머러스하기까지 멋진 가족들이 왜 모두 다 백수이고 피자 박스접기나 하며 생계를 연명할까? 봉준호의 기생충 영화는 이 "뻔뻔한 성공"을 그저 부잣집 아내의 '어리숙함'으로 모든 걸 덮어버리는 어설픔이 있다. 오랫동안(수년동안) 일해 온 가정부를 방금 새로온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 잠정적 병가도 아닌 단번에 해고시키는 것은 이 영화를  질질 끌고 가기위한 또다른 우연과 짜깁기의 짬뽕이다. 이렇게 '우연하고 운좋은' 그리고, 엄청나게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연기력을 가진,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해서 반지하에 살고 있는 백수 가족들의 부잣집 취업은 겨우 영화의 서론일 뿐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설정이 엉성하다. 이 부잣집 아내의 어리숙함은 친절하게 대사로 알려주기까지 하지만 여러모로보아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어리둥절하게 설정됐다. 영화의 뒷 부분에서 아들 생일파티에 몰려드는 같은 계급의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아귀가 맞지 않다. 그래서 귀가 얇은 이 아내의 설정이 미숙하다 할수밖에 없다. 남을 잘 믿어버리고 결정해 버리는 설정이지만 가족 네명의 위장취업을 모두 감당하기엔 벅차다. 그러나 관객은 이해되지 않 이 설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 부잣집 아내는 잘 속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나'... 하고. 또 다른 우연도 있다. 하필이면 가난한 가족들이 수해를 당해 체육관에 있는 동안, 하필이면  동안에 갑자기 전화로 부잣집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한다고 법석을 떨고 그녀는 백수였던 가족들을 부른다. 그것도 다... 운전사도 쇼핑을 위해 필요하고 가정부는 음식장만을 위해 필요하고 또 과외교사 아들딸도 요런저런 이유를 붙여 다 참석시킨다. 엄마가 아들 생일날을 잊어버려서 일찍 고지를 못해서 그랬나? 깜짝파티 준비하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미리 고지를 했나? 하여튼, 체육관에 홍수 난민으로 있으면서 가난한 가족들은 어떻게 그 응급호출에 제대로 옷이나 차려입고 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부잣집 고교생 딸이 과외 선생에게 한번에  것도 웃을만한 우연이고 비약이 크다. 거기에다 나중에 선생을 둘러업고 영웅처럼 구조한다. 한국 연속극 같은 설정이다...  


이 생일 파티 전에, 이렇게 성공(?)한 가난한 가족 구성원들은 부잣집 가족이 캠핑을 간 사이 술판을 거실에서 거나하게 벌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아담한 정원을 내다보며… 그런데 이 장대비라면 왜 캠핑장에도 비가 오리란 걸 예측 못했을까? 그렇게도 유능하고 재능있고 연기력 있으며 부자가족들의 마음까지 속속 읽어내던 그들이? 걱정도 태산이라고 불길한 예감으로 괜히 관객들만 걱정하는 걸까? 아님, 이 가난한 가족이 위장취업한 것처럼 그들이 '간댕이가 부어' 더 대담해져 그럴까? 남의 집 거실에서 장대비오는 정원을 내다보면서 왜 갑자기 부잣집 가족이 들이 닥칠 것을, 기상천외하고 능숙능란한 사기로 전 가족 구성원이 위장취업한, 그렇게도 '계획'에 철두철미한 가족들이, 왜 한치도 예견 못했을까? 영화니까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앞뒤가 들어맞질 않는다는 생각은 내내 가시질 않는다. 갑자기 전 가족이 멍청해 졌을까? 관객은  쉽게 집주인이 들이닥칠 예감을 하는데... 하여튼, 장대비를 보며 이렇게 멍청한 가족이 영화속에서 태평하게 술먹는 장면은 계속이어진다. 신세타령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공담 타령이다. 이런 대궐같은 집을 자기집처럼 즐길 수 있는 한순간의 행복을 이들은 즐긴다. 그런데 이렇게 술판을 벌인 가족들이 마신 술은 독한 양주로 영화속에서 보인것 같다.


그러나!

집주인이 갑자기 들이 닥치자 이들의 술취한 흔적은 하나없이 금방 사라져 버렸다. 마셔도 취하지 않은 낮은 도수의 술을 마셨나? 특히 딸은 소파에 누워 곤드레 만드레 한것 같은데 바로 이어지는 장면들, 특히 갑자기 부잣집 가족이 들이 닥치자 단 8분안에 술판을 깨끗이 치우는 장면에선 술마신 흔적이 그녀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화속엔 혀까지 꼬부라진 것같은데, 혀는 꼬부라져도 몸은 멀쩡한가? 그리고, 아무리 부잣집 넓은 거실이고 소파와 거실 테이블이 크다하여도 세 가족이 나란히  누워있을 수 있을까? 그게다가, 이렇게 누워있는 대형 테이블 아래를 부자집 가족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시력이 좋지 못한가 보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다. 영화의 프레임안에서 보여지지만 어리쩡쩡한 장면이다. 사실, 관객들은 이 프레임을 벗어나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프레임 속 그 공간을 상상하며 장면을 읽어내고 이해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영화속 공간구성의 상상과 시야를 부잣집 가족 시야로 좁혀 버린 걸까?


그게다가 봉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넣은 "냄새"라는 관점에서도 어설프다. 거나하게 술판까지 벌인 가난한 가족들이 바로 앞 대형이지만 낮은 테이블밑에 세명이나 누워 있는데도 도대체 그 "냄새"를 맡지 못했을까? 더구나 냄새에 특히 예민한 부잣집 사람들이(영화속엔 여러 장면으로 이를 잘 보여준다)? 정말 이들이 뭔가 다름을 전혀 못느꼈던 것일까? 장대비가 와서 그 지독한 술냄새, 안주냄새, 가난한 집 사람들의 반지하냄새를 공기청정제처럼 중화시켜 버렸을까? 아님, 뒤에 가정부가 급히 조리한 '짜파구리'의 냄새가 더 강해서 일까? 더구나, 비에 흠뻑 젖었던 전 가정부와 지하에 살던 그녀 남편도 좀전에 바로 그 거실에 있었다. 밀치고 당기며 싸우기도 했던 그들이었다. 무려 6명이 살기위해... 그 똑같은 공간에서. 그래서 피튀기는 아래것들의 적자생존 냄새가 분명히 생하게 부자집 거실에 남아있을 것이다. 운전기사 송강호의 특이한 냄새를 소파에 누워  속닥였던 이 부잣집 부부들이 바로 지척의 송강호를 포함해 거나하게 술마신 가난한 사람들 특유한 냄새엔 갑자기 후각이 감퇴해 버린건가? 안주인의 한마디 대사로 언급하지만 이해가 안간다…



만약에 이 기생충 영화가 소설로 씌었다면 구성은 엉망일 것이다. 영화란 매체가 그래도 시각적 설명과 드러냄이 가능하기에 관객은 독자와 달리 각적 도움을 받아 영화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점은 곳곳에 남아 있다. 아들과 딸이 테이블 밑에서 탈출에 성공하고 마지막에 송강호가 탈출 시 또 그 놈의 "우연"으로 부자집 아들이 의도했다. 우연을 가장한 '바로 이 순간' 또는 '하필이면 이때' 하는 전통은 호러 영화나 괴기 영화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 평자들은 이 기생충 영화를 호러라고 하는 이도 있는가 보다. 이 때문에 거실에서 살금살금 완전포복으로 탈출하던 송강호는 숨죽이고 멈춘다. 잠결이라서 그런가? 거실 한쪽에 길게 누운 송강호를 이 부부는 발견치 못한다. 아무리 잠결이고 약간 어두운 거실이지만 그들 시야가 그렇게 좁을까? 넓은 거실도 그들이 매일 오고가고 사는 집안이다. 아님, 송강호의 몸집이 그렇게 작을까? 부잣집 거실이라 운동장처럼 커서 그런가?


그래서 다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영화속 공간구성의 상상과 시야를 아예 무시하는 걸까 의문이 솟구친다. 우연하게 또 운좋게 송강호는 여기서 탈출한다. 관객들에게 억지 웃음을 선사하면서… "짜맞추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연하고 운좋게"와 연결되어 있는 면이 이 영화에선 많다. 모범정답(작품성)과 재미(상업성)를 위해 짬뽕과 짜맞추기를 의도적으로 시도하다보니 '우연과 지독하게 운좋음'이 영화속에 잠복못하고 만사에 다 드러나 버렸다. 거실에 바짝 엎드려 기어 탈출하는 송강호의 지저분하고 시커먼 발바닥처럼 그렇게 다 드러나 버린 것이다.


'해석의 분분' 여지를 남겨 놓기 의해 봉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슬쩍 집어 넣는 장면들도 어설프게 드러난다. 가끔은 짜증도 난다. 앞서 언급했던 부자집 아내의 어리숙하고 속기 쉬운 성격이란 걸 미리 관객에게 대사로 알려주는 친절함도 미숙하고 '수석'을 영화의 상징 비슷하게 들여오는 것도 의도적임이 드러난다. 왜? 가난한 가족 특히 반지하에서 사는 백수 가족들에게 멋진 관상용 수석을 선물한 의도도 사실 논리에 맞지 않고, 다른건 제쳐두고 그 무거운  돌덩이를 체육관 피난소에서 가슴에 꼭 안고 있는, 또 그걸 들고  부잣집 지하의 사람들을 죽이려 가방에 넣어 들고 가는 아들도, 억지로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감독의 어설픈 의도다. "인공성"이라 해야하나? 마지막 장면에 그 수석을 시냇물에 내려놓는 장면도 자연속 수석이 있던 원래 그 자리로 돌아옴을 상기시키지만 너무 가공적이고 인위적이다. 그렇다. 꼭 이런 상징성을 의도적으로 넣어야만 할까 의문도 든다. 오히려 영화의 핵심에 집중하고 파고 들어갔음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들의 초상화 그림에 해석을 '침팬지가 아닌가요?'란 대사는 웃기기 위해 넣은 것같고 그에 '초상화'라고 친절히 알려주는 부잣집 아내는(오호, 어리석은 그 아내는), 이 영화속에선 상당히 현대미술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가난한 집 딸과의 대화와 영화속에서 미술설명하는 몇 장면들이 나온다. 심지어 바스키야까지 언급하며...). 그런 그녀가 왜 자기 아들 그림의 아래쪽 공통부분의 의미를 알려주는 가난한 집 딸의 설명에 그렇게나 감탄하고 순진하게 다 믿어버릴까? 이것도 그녀의 '귀얋음'에 기대야 하나. 겨우 인터넷에서 보고 지껄인 얘기라고 친절하게 대사로 알려주는데… 관객은 또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인물의 성격규정에 앞뒤가 맞지 않다. 그렇다고 복합적 성격의 인물규정이라 하기도 그렇다.


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는 "짬뽕"이다. 블랙 코메디라며 사람들은 풍자 특히 통렬한 사회풍자라 하기도 한다. 거기에다 아슬아슬하고, 죽고 죽이는, 그리고 속고 속이는 호러 영화이기도 하다. 블랙 코메디에다 유머도 보태기 위해 억지 웃음도 봉 감독이 의도적으로 집어 넣은 것같다(그러나 '옥자'의 억지 웃음보다 다). 어떤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웃겠지만 나에겐 억지로 보였다. 송강호의 거실바닥 기기와 온 가족들의 손들고 벌받는 듯한 모습은 억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웰(well), 질낮은 코메디라 해야 하나? "손 똑바로 들어!" 어딘가 많이 들어보던 소리다. 영화 마지막에 그 집 지하에 숨어살면서 몰래 새 집주인인 독일인 가족의 부엌 냉장고에 어떻게 이들이 독일인인줄 알았는지 독일인은 소세지와 맥주만 마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설명부분도 웃긴다. 이 곳 파리의 프랑스 관객들도 살짝 웃는 걸 들었다. 크게 소리는 안났다. 실례가 안된다면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여러면에서 지식과 교양면에서 떨어지고 우유부단하다고 설정된 송강호의 역할이 어떤 부분에선 상당히 코메디하고 또 어떤때는 상당히 엄숙하고, 또 어떤때는 철학적인 대사까지 읇조리는 철학자란 점이다. 잠깐씩 음성 내리깔고 철학적 대사들을 내밷는 송강호는(송강호가 나오는 여러 영화에서 자주 나와 이젠 식상한...), 이판저판 인생역정에서 몸으로 배워 얻은 것이라 이해하지만, 그의 역할이 이리저리 짜깁기 식으로 잘 맞질 않는다.  


이 기생충 영화는 또 프랑스를 가끔 언급한다. 특히 남궁현자 건축가가 파리에서 공부한 거와 거기 살러 떠났다고 하는 부분이다. 프랑스어를 몰라 영화자막이 나와도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지만 서울대를 언급하면서 번역을 옥스포드대로 한걸 보았다. 아마 이곳 유럽 관객들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런던 돌아가면 기회가 생기면 영어자막으로 다시 한번 더 보아야 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이 한국적 상황이라 외국, 특히 서양에서 어떻게 이해 할지 걱정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국 관객이면 잡아 낼것을 외국인들에겐 보이지만 잡아 낼 수 없는 것들이 영화속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시각예술이라는 영화의 장점에서 빈부격차의 문제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전달되었다. 무엇보다 이것 저것 짬뽕과 짜깁기 그리고 우연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영화제 입상공식에 잘 대입시켜 만든 영화다. 중국집 짬뽕처럼 여러 가지 양념이 섞여 있어(인공조미료까지) 맛있고 일반대중이 즐길 수 있으며 여기에다 비록 억지 웃음이지만 유머러스한 장면도 있다. 약간 불어터진 면발도 섞여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서양평론가들이 관심있어 하는 사회문제, 즉 빈부격차와 현재 한국의 실정묘사란 영화의 '마케팅'엄청 성공했기 때문이라 본다. 하지만 빈부격차문제에서, 앞에서 말했다시피 왜?라는 질문이 빠진(지난 번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의 작품, '나, 다니엘'도 비슷한 주제라 서로 비교해서도. 다만 이 영화는 확실한 소셜 다큐멘터리로 장르가 다르다) 블랙 코메디, 호러, 계층문제, 심지어 취미와 성향 그리고 냄새까지 확실한 짬뽕영화이다.


맛있고 웃기는 짬뽕이어서 좋다. 기에다 사회문제의 '매운 맛'도 있다. 난 짬뽕을 좋아한다. 그러나 짬뽕먹고 난 뒤 난 왜 짬뽕을 먹었을까? 하고 스스로 질문 안한다. 짬뽕 한그릇 비운 뒤 배 불렀으니 만족한다. 짬뽕 한그릇 값은 충분하다. 이 영화를 다시 찬찬히 보면 뭔가 남을 여운이 혀가 아닌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을까?

파리의 오데옹 구역 극장입구. "기생충" 간판이 걸려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또, 옥스포드 출신이라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