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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6. 2017

고통과 죽음도 넘어서는 예술의 힘...

예술사-라파엘로의 ‘몬드 십자고상’(런던 내셔널 갤러리)



런던의 중심,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는 무료입장이며 위치상으로 시내 중심가에 있어 런던시민들은 아무때나 시간나면 쉽게 들를 수 있어 좋다. '국립'이란 이름답게 수많은 명화들도 소유하고 있다.



몇 안되는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명화중 하나가 이 ‘몬드 십자고상화(The Mond Crucifixion)’이다. ‘몬드(Mond)’라는 이름은 원 소유자의 이름인 독일계 유대인이며 영국에 정착한 ‘몬드 박사(Dr. Mond)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3대화가인 라파엘로의 로마입성전 초기 그림중의 하나로 스승인  뻬루지노(Perugino)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라 알려졌다. 심지어 르네상스 미술사가 바사리는 그림 아래에 ‘라파엘로'의 사인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뻬루지노의 그림이라 알아 볼것이라 했다. 원래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고향인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와 가까운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의 ‘산 도메니코(San Domenico)’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졌다.


많은 성화들 중 특히 ‘십자고상화’는 그림의 중심주제인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엄숙함과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거룩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동시에 겹쳐 혼란이 오며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유럽의 르네상스 화가들이나 바로크 시기의 화가들과 달리 북유럽의 화가들은 있는 그대로 즉 실상(reality) 그대로의 십자고상화를 그렸다. 그룬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가 그 대표적이다.



라파엘로의 이 몬드 십자고상화는 회화 감상의 미적 즐거움과 동시에  고통이라는 충격적 장면이 동시선상에서 발생하며 이런면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선, 이 그림은 완전하게 균형을 이룬 그리스도의 몸(성체)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육체적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 오상(즉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왼쪽 옆구리 등 다섯 곳의 상처)은 흐르는 피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이 십자가 뒤편으론 이상적이고 신화적인 풍경을 말하는 아카디아 풍경(arcadian landscape)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지 배경은 이 그림이 설치되었던 고장의 풍경이라고 한다. 그림의 상단은 푸른색 저녁하늘이 화면을 메우고 두명의 천사가 작은 구름조각을 가볍게 밟으며 십자가 양쪽에서 그리스도의 두 손과 옆구리의 성혈을 성작(컵. Chalice. 미사에서 쓰는 포도주를 담는 컵)으로 받고있다. 그림의 하단 뒤편으로 성모와 요한 제자가 서있고 앞쪽에 예로니모 성인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릅을 꿇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해 위로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라파엘로의 성화는 역설적이고 얼핏 모순되는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지상과 천국을 절묘하게 한폭에 담아내며 이 양립되는 모순들을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다. 우선 대비되는 것은 그림 위쪽 즉 십자가 위 양쪽에 해와 달이다. 이 둘은 동시에 떠있다. 창세기에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해와 달, 낮과 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있으면 낮이 같이 있을수 없고 시간적으로 밤이 끝나야만 낮이 올수있다. 밤과 낮이 동시에 있다함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적이고 공시적인 시간을 지칭하며 피조물을 제한하는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이 아닌 신의 시간, 즉 ‘영원함’을 상징한다. 그 시간 밑으로 육중한 십자가가 인간이 사는 지상과 천사가 떠 있는 하늘(천상)을 이어주고 있다. 네명의 인물은 지상에 발을 '밟고' 있으나 두명의 천사는 천상에 '떠' 있음으로 이를 확연히 구분해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무시할 수도 있었고 수치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십자가의 사건이 우주적(cosmic)이란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상과 천상’의 매개가 된다는 신학적 사실에서 오며 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함으로 나타난다. 즉, 이 그림의 십자가는 생명의 나무(Tree of Life)가 되었다. 지상과 천상의 매개는 오직 이 십자가와 그 십자가위에 죽은 그리스도뿐이다. 이것은 이 그림을 신학적으로 읽을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지상의 피조물은 천상으로 오를수 없음을 회화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하나의 사다리 역할을 하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사실 하늘에서 내려준, 즉 하느님의 은총(Grace)이다.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 Genesis 28:10-17)와도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십자가상의 죽음은 창조주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며, 이로인해 지상을 ‘정화(purifying)’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럼으로서 지상을 천상과 ‘통합(unity)’시킨다.



이 ‘정화와 통합’은 매번 가톨릭의 ‘미사성제’에서 반복 행해지며 이는 미사가 시공간을 초월한 십자가와 부활을 오롯이 담은 정화와 통합의 의식(ritual)임을 보여준다. 특히 이 그림이 미사성제를 요약적으로 표현한 것은 원래 이 그림이 미사성제가 행해지는 성당의 재단화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수있다. 그래서 이 검은색 신비의 십자가가 그 아래와 위, 지상과 천상,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순간과 영원, 죽음과 새생명을 관통함으로 이 십자가의 사건이 시간안에 발생한 한 역사적인 한 사실뿐 아니라 ‘전우주적 사건(cosmic event)’임을 알려준다.


이 그림을 미사성제와 관련시켜 해석하면서 또 주목할 것은 각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표정이다. 첫째, 중앙의 예수님은 눈을 감고 있다. 사실 눈을 감았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표현하듯 육체적 죽음을 내포한다. 눈을 감음으로서 물질적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는 영성의 세계(spiritual world)인 천상의 성부(God, the Father)를 관상(contemplation)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의 붉은색 옷을 걸친 천사는 아래의 요한 제자를 내려다보고있다. 그는 요한 복음서를 쓴 복음사가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이는 미사의 첫번째 부분인 ‘말씀의 전례’를 의미한다. 왼쪽 녹색의 천사는 흐르는 성혈을 응시한다. 즉, 미사의 두번째 부분인 ‘성찬의 전례’를 상징한다. 그럼 그 아래 요한 제자와 성모는 어딜 보고 있을까? 그림밖의 관람자를 향해 있으며 이는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앞의 두 성인은 무릅을 꿇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몸, 즉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고있다. 우리가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그의 십자가 희생이 부활의 문을 열었음을 다시한번 상기하며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행위로 ‘영성체’를 하는 것이다.


다시 전우주적인 사건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돌아가자. 천둥과 번개가 칠만한 대우주적인 사건임에도 이 그림의 분위기는, 역설적으로, 정적이다. 우선 십자가상의 죽은 예수의 모습이 그렇고 그 아래 성모와 요한 제자 그리고 예로니모 성인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도 마찬가지다. 움직이지 않는 정지된 순간이며 평화로운 기운마저 감돈다. 시간이 멈추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인 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혈을 문자그대로 받고있는 부분에서 사실 약간의 움직임도 느낄수 있다. 천사의 리본 모양새도 움직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고 그들의 자세도 조용히 춤추는 듯한 움직임의 연속이다. 자세히 하단과 비교하면 그림의 상단부분, 즉 천상의 부분, 영적인 부분에선, 라파엘로가 모두 ‘조용하고도 미세한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살아있는, 영적으로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체를 감싸는 붉은 색 천의 마지막 자락도, 아래로 쳐져있는것이 아닌(과학적이 아닌) 바람에 나부끼듯, 움직임을 포착했다. 죽었지만 죽지않았다는 역설이다.



정적과 엄숙 그리고 순간의 정지된 시간속에서도 공중에 붕 떠 있는 두 천사가 성혈을 받는, 즉 쏟아져 나오는 성혈을 받는다는 것은 또 ‘연속성’을 의미한다. 시간이 정지한 상태에서 성혈의 흐름은, 즉 하느님의 구원활동은 연속적이며 계속되는 구원사업이다. 세상 끝날때까지. 미사성제를 종말의 시간까지 행하는 것과 같다. 정지속에 흐름을 담은 것이다. 육체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의 멈춤이 지상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영적인 세계에선 연속되어 흐르는 그리스도의 성혈이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지속되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시초임을 상기시켜주고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사실 발생했고, 지금 이 두 천사가 미사에 쓰는 성작으로 담고 있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혈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사해졌고 그로부터 구원이 왔다. 즉 이 거룩한 피는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이 ‘피’는 또 ‘생명’을 뜻한다. 히브리 말로 ‘아담(Adam)’이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인간이란 뜻이며 문자그대로 ‘피’란 말과 똑같다. 즉, ‘생명(life)’이란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역설이 바로 여기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선 그리스도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그의 상처로부터 나오는 성혈로 상징된다. 또 이 피의 색깔은 선홍색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특히 그림속 등장 인물들을 자세히 살피면, 모두가 이 붉은색을 포함하고 있다. 성모님의 안 옷과 요한 제자의 겉옷, 예로니모 성인의 붉은 띠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겉옷이 모두 붉은 색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인간 모두에게 전해졌다는 이야기다.


이 그림은 그래서 ‘성체성사(The Eucharist)’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했으며 색채의 조화및 전체 인물들의 균형과 함께 십자가 죽음이 사실 부활의 승리로 변형 이동됨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적으로 말할수 없는 일그러진 고통의 상징인 이 십자가상의 죽음이 숭고한 승리의 상징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것이 이 그림이 명화가 될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럼 어떻게 이 처참한 고통과 고문의 실제상황을 아름다운 예술로 표현할수 있을까?



-사실, 고통이 아름답다고 할수 있는가?


-어떻게 이 고통을 감히 정당화 시킬수 있을까?


-예술은 실제 삶을 재현하고 해석하는게 의무 아닌가?



이런 질문은 예술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한 철학적 토론으로 밤새 토론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일 회화의 주제가 종교적이라면 또 종교적 상징성과 교리교육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런 ‘미화(Beautifying)’도 용납이 될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고통이 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고 부활의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난다는 신학적 진술을 토대로 한다면 말이다. 이 십자가로부터 부활까지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 ‘새생명의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부활은 삶의 최종 목적이다. 죽음이 삶의 목적이 될순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야만 부활 할수 있다. 죽지않고 부활한다는 건 모순이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없다.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보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지혜의 눈 즉 “혜안”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십자가 ‘속’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의 관람자에게 이 그림이 보여주는 아름답다는 메시지는 처참한 실제의 상황이 사실 부활으로 연결되는 희망의 메시지라는 신학적 틀안에서만이 제대로 감지된다.


같은 선상에서, 예술이란 이런 고통도 아름다움으로 채색해 버리는 힘과 특권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예술은 ‘해(harm)’가 된다거나 무의미의 환상(fantasy)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예술은 형상이 없는 것을 형상으로 만들어 주고 마음의 혼란을 정제시켜주며 추(ugly)를 미(beauty)로 변화시킨다. 그래서 예술이란 어떻게 보면 신학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더 잘 설명해낸다. 이 라파엘로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십자가의 승리로 단박에 거침없이 보여준다. 기교도 부리지 않고 거창한 부연 설명도 필요없이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한폭의 그림으로 오롯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만 사실 고통없는 열매는 없다(No pain no gain). 십자가상의 고통을 부활의 희망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목적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위대한 예술가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죽음은 죽음으로 극복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를 충실히 증명했다. 부활이란 빛으로 비추면 세상 모든것은 성화된다. 이는 곧 창조주만의 파워이며 궁극적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삶에서 발견하는 것이 축복(blessing)이며 기적(miracle)이다. 그래서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묵상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 그리스도의 구원 과정에 참여함을 의미하며 이 안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to be revealed yet) 부활을 응시함이다.


"주님의 아름다움에 취해 모든것은 순수해질 것입니다(Everything will be translucent to the divine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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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The Mond Crucifixion by Raphael. 1502–3. Oil on poplar. 283.3 cm × 167.3 cm (111.5 in × 65.9 in). National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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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산토 도메니코 성당의 제단화였던 몬드 십자고상.
왼쪽 천사의 확대부분. 문자 그대로 성혈을 받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런 그림은 이 시기 여러 그림에서 찾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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