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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26. 2017

미켈란젤로가 부르는 사모곡

예술사-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마 바티칸 베드로 성당

'피에타'앞의 수많은 인파...

"예술은 정말 영원한 것일까"


성당안의 수많은 인파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유리벽 넘어 그곳에 그렇게 ‘피에타’ 조각상이 서 있었다.


“고고하게, 신비하게, 슬프게, 우아하게, 경이롭게..,
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조각상을 가까이서 보려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인파, 그 와중에서 카메라를 높이 들어 이리 찍고 저리 찍어대는 공중의 많은 손을 보면서 생각했다.


“예술은 영원하구나…”


막대같은 인물상을 조각한 조각가 자코메티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목적은 현실을 재-생산하는게 아니라 똑같은 격렬함으로 하나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The object of art is not to reproduce reality, but to create a reality of the same intensity.”

-Alberto Giacometti-


예술이 현실을 사는 격렬함을 요약해 또다른 현실을 창조해내는 사실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보여주었다. 그가 겨우 23-24세에 완성한 이 걸작품이 500년이 흐른 뒤에도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 감히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피에타’는 현대의 어느 '유명인사' 못지 않았다.


“난 23세에 뭘 했을까?”


미켈란젤로는 예술작품의 영원함뿐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영원함을 보여주는 위해 그가 평소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자신의 이름을 사인(sign)으로 이 ‘피에타’ 상에 또렷이 새겨 넣은 것이다. 미술사가 바사리(Vasari)에 의하면, 로마에 거주했던 프랑스 추기경 ‘쟝 드 빌레르(Cardinal Jean de Billheres)’의 주문에 의해 완성된 이 조각품을 미켈란젤로가 창조했음을 모르던 그때 사람들이 이 경이로운 조각을 보면서 당시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 또는 밀라노 출신 ‘고보(‘Our Gobbo from Milan’)’라고 하는 말을 미켈란젤로가 엿듣고 분노하며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새겼다고도 한다.


내 이름을 남기자…’


그러면  조각품의 어디에 그는 그의 이름을 남겼을까? 먼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바실리카)안 오른쪽에 안치된 이 조각상은 유리벽으로 막아놓아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아무리 유리창 가까이 접근해도 미켈란젤로의 숨결을 유리벽이 막아 귀로 느끼며 감상하긴 쉽지 않다. 또 3차원 입체예술인 조각품인데 작품을 돌아가며 볼수도 없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너무도 유명해 대부분은 이 작품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특히 죽은 아들 예수를 무릅에 안고있는 성모가 비례적으로 더 크다든가 또 성모의 얼굴이 아주 젊은 여성의 얼굴이라든가 하는 말들 말이다.


‘십자가형을 당할 시 예수님이 33세였다면 성모님은 적어도 50세 정도가 추정될 것이다.’


그러나 조각상으로 보면 성모의 얼굴은 어린 처녀의 모습이다. 50세의 여인이 아니다. 여기엔 여러 가설이 등장한다. 하나는 죽은 아들을 바라보는 모정이 50세가 아닌 ‘아기 예수’를 바라보던 때의 성모 얼굴이란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자식일뿐란걸 말할까?


‘3살 어린 나이든, 80세 노인이든…’


이는 변치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미켈란젤로는 표현하려 한 것이다. 두번째는 성모의 ‘순수성’과 ‘동정성’을 표현해 늙지 않는 ‘영원한 젊음’의 징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언급했다고 한다. 가톨릭 교리에다 예술가의 상상력을 보탠 것이다.


세번째는 르네상스를 연 피렌체 출신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밝았던(줄줄 외웠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신곡에 나오는 성모의 지칭, 즉 ‘하느님의 딸이자 구세주의 어머니’란 말에 영감을 받아, 성모의 얼굴을 '영원한 젊음(eternal youth)'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네번째는 미켈란젤로 자신이 아주 어렸을적 어머니를 여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나이에 도제로 일하며 로렌조 메디치의 눈에 띄어 뒤엔 피렌체의 메디치 궁정에서 다른이들과 함께 살며 작품활동을 한 그로서는 따뜻한 돌아가신 어머니의 품이 항상 그리웠고, 그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일반인들과 다르게 보는 ‘센시티브’한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는, 특히 그가 이 피에타 조각을 완성한 때가 아직도 마음 여린 23-24세 청년이었을 때였으니, 이 가설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성모의 얼굴을 어머니로 대체시킨 거장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미켈란젤로의 ‘사인’으로 돌아가서, 미술사가 바사리(Vasari)는 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은 예술가로서 그가 '사인(sign)'한 유일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거장 미켈란젤로에겐 특별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그는 드디어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고 그래서 그의 작품성도 인정받았기에 또다른 수많은 작품의뢰가 들어 왔다.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거장으로 가는 길목에 이 작품은 위치해 있다. 결국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최고봉인 ‘신의 경지(divine)’에 올랐다고 극찬하며 최초의 서양미술사 책이었던 그의 저서에 기록했다.


미켈란젤로가 한자 한자 라틴어로 새긴 그의 사인은 성모의 가슴을 왼쪽어깨에서 대각선으로 가르는 ‘장식띠(Sash. Belt)’에 새겨져 있다.


“MICHAELA[N]GELUS BONAROTUS FLORENTIN[US] FACIEBA[T]”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 보나로티가 만들다.”


장식띠를 두르는 그림은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있었다. 스승 ‘걸란다이오(Ghirlandaio)’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작품에 장식띠를 덧붙이길 좋아 하였다. 어머니를 그리워한 예술가가 가뭇가뭇하는 그리운 어머니 얼굴을 아름다운 젊은 어머니로, 인류의 어머니 성모로 창조해냈고 바로 그 어머니의 심장(heart)을 가로지르는 곳에 장식띠를 붙이고 그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사인을 새긴 다음 엄청난 후회를 했다고 한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땜에 저지른 것이 곧 ‘허영(vanity)’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참을수 없는 허영의 유혹과 예술혼…’


그리곤 다시는 사인을 그의 작품에 넣지 않았다. 절대로... 그후 장장 65년이란 긴 기간 동안에 조각하고 그린 수많은 그의 작품에 그의 이름은 찾아 볼수없다. 예술가로서 ‘내 작품(authorship)’이란 자존심의 표현이자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높아진 위상에도 끝내 그는 사인을 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 자신을 죽이며 예술혼을 불사른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Except a corn of wheat fall into the ground and die, it abideth alone: but if it die, it bringeth forth much fruit.” (John. 12:24)


다시, 성모의 온화하고 고요한 얼굴을 응시해보자. 죽은 아들 예수를 내려다 보는 성스런 모정을. 그래서;


슬픈 얼굴?

평화로운 얼굴?

비통한 얼굴?


보는 이 각자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성모가 응시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 북유럽 ‘피에타’ 작품들에 영향받은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로는 또 다른 ‘피에타’를 창조해 냈다. 십자가형에 의해 처참히 죽은 예수의 얼굴에 고통이나 수난은, 북유럽 피에타와 다르게, 여기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하고 고요하다.


“죽음이 그럴까?”

“모든것의 끝인 죽음뒤의 ‘고요’와 ‘평화’일까?”


그러나, 난, 이 온화한 예수의 얼굴은 그의 어머니 성모에 의해 바꾸어졌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그의 작품과 그 주제에 대한 치열한 내면성찰의 결과이었을 것이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무릎에 안긴 예수의 얼굴을 고통이 아닌 온화함으로 조각한 것은 혹시 세상 어디에고 어머니 품만큼 편안한데가 없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심지어 죽어서까지도…’


미켈란젤로는 자기 자신이 어릴적 돌아가신 어머니의 품에 안긴 세상모를 평화에 잠긴 유아기를 무의식적으로 상상했던게 아닐까? 그래서 이 작품설명에 혹시 ‘정신분석학’이 필요한 건 아닐까? (이에 덧붙여, 미켈란젤로는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가 보낸 많은 편지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있다. ‘난 돈버는 기계가 아니에요’ 하는 정도로 반항적인 편지도 있다.)


아들을 지긋이 내려다 보는 조각상의 성모의 얼굴이 30년전으로 돌아가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품에 안고 바라보는 젊은 어머니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자식이 아기때든 성인이 됐든 똑같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수많은 ‘성모자상(Madonna and Child)’ 이 작품과 중첩시키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자식이 살아있든, 십자가에 비명횡사했든 자식은 자식이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동정녀 어머니의 표상은 흐르는 세월에 변해가는 육체가 아닌 ‘모정’이란 진리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피에타’ 조각상은 30년의 전혀 다른 ‘시간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조각으로 관람자는 시간을 가늠한다.”


6살짜리 꼬마의 어렴풋한 기억에 남은 어머니의 모습은 세월이 가서 23세의 장성한 청년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어머니의 영상을 거장 미켈란젤로는 인류의 어머니, ‘성모’의 ‘거룩한 얼굴’로 표현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그 창조의 원동력은 그리움이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얼굴은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성서의 이 한 구절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John 19:27)


거장 미켈란젤로는 한 어머니의 아들로, 가슴 한켠에 켜켜히 살아있는 ‘그리움’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류의 ‘어머니 상’을 한 덩어리의 다듬어지지 않은 카라라 대리석에서 꺼내었다.


“한 손엔 망치를 한 손엔 정을 들고서…”

“마음 한쪽엔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 미켈란젤로가, 다른 한쪽엔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덩어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이 거장은 ‘어머니라면 감히 죽음까지도 평화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는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이름과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고향인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조각했다고 성모의 가슴을 관통하는 장식띠에 새겨 넣었다. 예술가 미켈란젤로보다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를 강조하였다.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을 창조하겠다는 야심찬 작품에 ‘피렌체'를 새긴 미켈란젤로였다.


그리고 …


이 부질없는 세속의 아름다움도, 어머니에 대한 인간의 그리움도, 예술가로서의 명성도, 결국은 ‘헛되고 헛되다(Vanity of vanities. Ecclesiastes 1:1)하며 깨달은 미켈란젤로였다.


그래서 절대 다시는 자신의 이름을 넣은 사인을 새기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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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Pietá (1498), Carrara marble, St. Peter’s Basilica, Rome–174 cm × 195 cm [68.5 in × 76.8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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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젊음
미켈란젤로의 사인이 보인다.
베드로 성당앞 인파... 이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멀리에서 여기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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