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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23. 2021

잠오는 이야기

런던 잠오는 저녁

www.guardian.co.uk

철학자 하이데거 할배의 책은 한 줄만 읽어도 스르르 잠이 온다. 불면을 겪어 고생하는 사람들에겐 최고 약이다. 그래서 침대곁 테이블에 상비약으로 배치해 두면 좋다. 사람들은 전설처럼 말한다. 할배의 거대한 철학의 호수에서 실존주의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해체니, 해석학이니 하는 물줄기들이 툭툭 터져 흘러나왔다고 하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이데거 할배는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성당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그는 한때 사제가 되려고 신학교도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 엔 별 관심이 없었고 대신 그 분의 '창조물' 인 인간에 관심이 더 갔다. 그런데다 몸도 아프고 해서 신학교를 미련없이 자퇴했다. 그랬던 그가 그토록 관심을 가진 인간이란 무엇일까? 그는 인간을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Being-in-the-world)'로 보았다. 뭔지 낌새로 보아 두려움과 공포가 잔뜩 묻어난다. 태어나자 마자 세상에 툭 던져진 아기라? 어떻게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한 석가모니의 언어와 비슷하다. 그래서, 할배의 철학에서 인간 실존은 "내던져진 투사(thrown projection)”로 정의된다. 이 말은 또 우리 인생이 불확실한 미래로 던져졌다는 말과 똑같다. 얼핏 잔인해 보인다. 그래서 우린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게 아니라  이 불확실의 미래를 가슴에 안고 이 풍진 세상에 툭 내던져진 것이다.

시간을 두고 우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구분한다. 칸트(Kant) 증조 할배의 말대로 우리가 나눈 이 시간은 경험의 범주(a category of experience)에 들어가며 인간실존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려면 이 애매한 이 시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또 잠이 스르르 쏟아진다... 문제는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왔던, 즉 경험했던 과거임에도 이 과거를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이에 덧붙여, 아직 오지않은 시간인 미래는 항상 현재와 과거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재'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금방 과거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이끌어낼수 있는 것은, 현재 상태의 우리는 과거에 의해 정의(definition)되기에 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open)'있다는 뜻도 된다.

유레카(Eureka)!

요점만 말하면, 과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래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그래서 이 열린 개념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이데거의 중심 개념인 다자인(Dasein.  독일식 실존. 거기 존재. There Being)은 변증법의 헤겔이 말한 역사(시간)를 창조하는 '절대정신'과 반대로 미래를 투사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의 능력이라 할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미래만 열려있는게 아닌 과거도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우리 개개인이 살아온 과거로 되돌아가 우리 과거를 '해석(interpretation)'할 것을 요구하며 이 해석은 우리 삶의 상황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 온 세계, 즉 우리가 툭 던져졌던 잔인한 세상도 포함한다. 그래서 이 과거에 대한 열린 개념은 파괴된 과거를 다시 일으켜 세워 '재해석(re-interpretation)'할 수있는 여지를 남겨 놓는다. 즉, 우리 실존 깊숙히 도사리고 있는 과거를 꺼집어 내어 '더 깊은 이해(the deeper understanding)'를 시도할 수 있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끄 데리다' 아저씨가 말한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해체(de-construction)'개념, 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고발하신 '죽음의 문화(culture of death)'를 낱낱이 해체시켜 버린다. 이렇게 야만 비로소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를 떨쳐내고 인증되고 보증된 다자인(Dasein)의 미래를 투사할수 있는 것이다.

"이 확실한 미래는 과거를 '새롭게 봄(the new way of seeing the past)'으로 가능"하다고 난 주장한다.

그래서 혹시 우리가 살아온 과거에 얽매여(잘 살았든, 못 살았든 간에) 미래를 두렵고 불확실하게 본다면 꼭 '다시 한번' 생각하자.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 과거의 '재해석(re-interpretation)'은 질기게도 우리를 옭아매는 과거의 굵은 동아줄을 단박에 끊을 수 있는 날선 칼과 같다. '재해석'의 '다시 바라봄'으로 미신처럼 운명적이라 믿었던 우리의 과거를 해체시켜 버리고 노예 상태인 우릴 '과거라는 노예주'로부터 해방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재해석'은 '재탄생'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 용서'란 이름의 성수(holy water)로 백태가 잔뜩 낀 우리의 눈을 싹싹 비비며 씻어 내자. 그래야 싱싱한 시력으로 재해석의 목표인 '앞을 내다봄(Looking Forward)'을 실현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가능성의 미래가 있음에도 과거의 노예인 채로 현재를 끙끙 살아가는 것이다.

아직도 과거의 어두움 속에서 얽매여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이 해방의 빛을 보았으면 한다... 하이데거 할배의 글로 인해 잠 잘자고 나면 아침에 새로운 태양이 동창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면 커튼을 활짝 열어재치고 그 빛을 받아 들이자. 그리고 창조주께서 항상 '새 것'을 준비하심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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