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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l 01. 2017

산티아고 1년후, 그리고 시간에 대한 묵상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중 힘들면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게 상책이다.

삶의 순례중 힘들면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쉬는게 상책이다.-

벌써 1년이 지났다. 배낭을 어설프게 메고 피레네 산맥을 헉헉대며 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보타푸메이로 향연기처럼 그새 1년이란 세월이 훌쩍 사라져 버렸다.

‘시간(time)’, 특히 ‘마음속 시간’의 기억은 참으로 묘하다. 신비하게도 이런  기억은 우리의 내면 깊숙이 동면을 취하다가 계절이 돌아오면 활화산처럼 기억들을 마구 토해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분한 주기들, 즉 주, 월, 년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한 여자분은 남자친구와 헤어진뒤 5년이 됐다고 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 아픔에 못이겨 무턱대고 아무 생각없이 배낭을 메고왔다고 했다. 우린 가끔 무계획으로 멍한  행동을 한다. 왜? 라는 물음에 답을 못한다. 그러나, 답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있다고 믿으며 우린 찾으려 애쓴다. 이 여자분도 5년동안이나 답을 찾아 헤메다가 여길 온것이다. 이 분처럼 산티아고 순례에 답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요즘 만나고 헤어짐이 잦아 대수롭잖게 여기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이란 자신의 온 몸에 돋은 상처들을 매일 발견하는 것라고 그분은 얘기했다. 하루 하루 상처를 치료하며 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치료를 위해 이것저것 발라보아도 효과가 그렇게 크진 않을 것이다. 그것도, 이 상처는 며칠 또는 몇 달이 지나 치유가 되는 육체의 상처가 아닌, 계절이 바뀔때마다 씻어내고 딲아내며 치료해야하는 영혼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상처는 대부분이 만성병(chronic)이다. 씻어도 또 씻어도 돋아나는 상처라면 인간 영혼은 참으로 묘한 존재이다.”

문제는 우리의 기억이 이 상처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St. John of the Cross)’은 기억(memory)을 지성(intellect), 의지(will)와 더불어 중요시 했다.

스페인의 뜨거운 대낮의 태양이 내 얼굴을 벌겋게 달구었다. 순례길 도중 어느 작은 마을에 다다랐을때 이 마을의 성당은 이런 열오른 내 몸을 서늘하게 식혀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져 놓고 축쳐져 성당안 나무벤치에 나는 만삭 임신부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작은 마을 성당안의 서늘함은 열사의 사막을 걷다 만난 오아시스였다. 이 오아시스의 시원한 우물물을 실컷 마시고 났을때 얼굴의 열기도 서서히 식었다. 몸 자세도 정신도 돌아왔다. 그때 어두운 성당안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대성통곡이 아닌 흐느낌은 사람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이 대낮에 누가 성당안에서 흐느낄까?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가 배낭을 지고 일어섰다. 그리고  성당안을 한바퀴 돌며 짧은 기도를 올렸다. 나무로 만든 낡은 고해성사실 바로 옆에 어떤 여자분이 돌 맨바닥에 앉아 배낭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다. 내 발자욱이 조용한 성당안에  증폭되어 울렸기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우린 어색한 미소를 띨수 밖에 없었다.

다시 뜨거운 태양의 거리로 나왔다. 삽시간에 서늘했던 몸이 금방 다시 달아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만이 아니라 스페인 시골 마을집들의 붉은 기와지붕도 벌겋게 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한 시간 정도를 걷자 큰 나무 그늘이 나타났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가지고 온 물을 마셨다. 나무 그늘은 돌로 만든 성당안처럼 시원하진 않았지만 햇빛을 가려주었다. 성당안에서 봤던 그녀가 멀리서 땡볕아래 걸어오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무거워보이는 베낭을 진 순례자였다. 얼굴은 나처럼 벌겋게 달아있었고 흐르는 땀을 연신 수건으로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쉬는 나무 그늘로 들어와 무거운 배낭을 털썩 내리고 앉았다. 그녀는 스웨덴에서 왔다고 했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답지않게 키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물을 한모금 마신뒤에 말했다. 그 전날 묵었던 알버게(호스텔)에서 날 보았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가톨릭 신부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어서서 다음 마을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자연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고통의 기억을 지울수 있는 방법을…’

난 어색하고 미안하지만 솔직히 모른다고 했다. 가톨릭 사제에게 고대했던 답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더 길게 이어지고 그렇게 한참을 침묵속에 같이 걸었다. 규칙적인 둘의 발자욱 소리만이 들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가슴속에서 없어지지 않고 남은 기억이 자기를 만성병처럼 괴롭힌다고 덧붙였다. 매년 이맘때면 그 기억도 새록새록 다시 잎을 내고 꽃도 피운다고 했다. 이런 기억이 즐겁고 간직하고픈  추억이기에 아름답지만, 또다시 재현될수 없기에 슬프며, 헤어짐의 순간은 아픔으로 박제되어 있다가 가끔씩 부활한다고 했다.

‘그렇다.’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가 발견해낸 ‘고통과 쾌락(pain and pleasure)’의 원칙(principle)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결정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로 생성된 과거의 기억에서조차 이 프로이트의 원리는 맞아들어가는 것같다. 그녀는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기억이 흘러간 세월을 거슬러 고통과 쾌락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도 계절이 바뀔때마다 자연의 이치인냥 그 기억이 반복재생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 기억의 생생함과 아픔은 사라지지 않기에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며 또 적합한 때에 반복(repetition)되어 출현한다. 프랑스의 피레네 자락에서 출발한 산티아고 순례가 대성당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하듯, 알파와 오메가인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기억은 이렇게 ‘순환적(cyclical)’이다. 그래서, 돌고 도는 인생이란 우리말이 맞다. ‘직선적(linear)’인 시간에 거슬러 기억은 자주 우리의 이성과 의지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기억에 우리 삶을 저당잡히는 한, 우리는 하루하루 삶의 걸음을 옮기지만 사실 다람쥐 쳇바퀴 돔이며 ‘제자리 걸음’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성요한 성인은 그의 저서 ‘영혼의 어둔밤(Dark Night of the Soul)’에서 우리는 할수없이 창조주와의 일치를 위한 통과의례인 이 기억의 어둔밤을 걸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선 이 기억을 피할 방도는 없는 것이다. 아픔과 슬픔의 기억은 이 어둔 밤을 걸을때 끊임없이 나타나며 이 기억을 다잡지 않는다면 이 기억이 그 사람의 영혼을 지배할 것이고 순례의 길은 더 늦추어질 것이다.

요한 성인은 그래서 이 기억을 영혼에서 ‘비워내라고(emptying)’ 말씀하신다. 프로이트보다 몇백년 전에,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 기억에 안주하려는 인간심리를  ‘욕망(desire)’이라고 해석했다. 불교에서의 ‘집착(craving)’과 비슷하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재생반복됨은 이 영혼안의 욕망때문인 것이다. 이 욕망은 사람들안에서 무릇 크게 작용하기에 이 어둔밤의 순례가 결코 녹록치 않음을 그는 그의 책에서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 성당안에서 흐느껴 울었던 이 스웨덴 순례자도 이 기억의 순환에서 고통과 추억의 쾌락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간다. 동시에 순례자는 산티아고로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걸음을 뗀다. 하지만, 계속 전진하는 순례도중에도 이 기억은 과거로의 복귀를 위해 자주 순례자의 욕망을 부추긴다. 과거로의 복귀는 사실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욕망은 가능하다고 기억을 끄집어 내 보여주며 영혼을 부추긴다.

나에게 있어서 산티아고 순례의 기억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계절이 돌아오자 기억은 생생히 되살아 났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진부한 말도 이제 사실로 인정해야 할것같다. 스웨덴 여자분처럼 기억이 아픔의 상처로 재생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 즐거운 기억도 아직 순례가 끝나지 않은, 아직도 순례길을 걷는, 일상속의 영성적 순례자임을 깨우치면 그 기억이 이 순례를 방해할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추억도 그 기억안에만 안주하려 한다면 아픔으로 쉽게 변형될수 있으며 순례를 방해한다.

또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제 그 스웨덴 분의 상처도 아물었으면 하고 바란다. 산티아고 순례가 치료제가 되어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의 말씀처럼, 이젠 ‘정화의 단계(the purgative way)’를 넘어 ‘빛의 단계(the illuminative way)’을 걷는 순례자였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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