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율리시즈 Jul 21. 2017

안녕, 찰리 채플린 아저씨

런던 에세이-레스터 광장

‘아직도 런던을 기억하고 있나?’



고맙다. 사실은 잊은 줄 알았는데… 네가 십여년전 여기 왔을 때 이리로 저리로 많이 걸었던 기억이 나. 걸을 곳이 많았던 런던에서 우리가 한 곳만은 거의 날마다 갔던 곳이 있었지.



‘기억하나?’



어제 그 아저씨한테 겸사겸사 인사를 하러갔지. 핵전쟁 대피소같은 런던 튜브의 인파속에 떼밀리며 빠져나와 레스터 광장(Leicester Square)으로 갔지. 네가 정들고 좋아했던 키작고 수염달린 그 아저씨는 그 모습 그대로더군.  귀엽다고 하면 실례되지만, 행동이 엉뚱하고 표정이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보면 볼수록 푹 정이 간다던 그 아저씨 말이야. 네 부탁과 안부를 전해주러 갔지. 불행을 웃음으로 넘기지만 또 불행이 연달아 생길지 모르는 여차 여차 불안한 아저씨에게 인사도 할겸 말이야.



“Good Morning, Sir Chaplin”



어쩐지 ‘경(Sir)’ 이란 말을 붙이니 잘 어울리지 않은것 같다. 아저씨가 부르기 좋고 친근감도 들어. 이웃집 아저씨같은 편안함이 들거든. ‘경’이란 호칭은 거리감을 느끼게 해. 어제는 평소와 다르게 누군가 그 아저씨에게 꽃 한다발을 선사했더구나.



‘어쩐지 더 밝은 모습으로 보이더라카이…’



난 네가 강조한 아저씨의 영화들을 유튜브를 통해서 봤지. 그리고 네가 푹빠진 만큼은 아니지만 아저씨에 대한 존경이 싹텄단다. 이상하지…? 그 뒤로는 매번 시내 나올적마다 이 광장의 한켠에 비스듬히 서있는 찰리 채플린 경(1889–1977), 아니 우리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는 게 나의 습관이 되버렸지. 가난땜에 빵을 훔친 그 아가씨를 도와주던 착한 심성의 아저씨를 기억하며 오늘은 또 누굴 도와주실까 상상하며 말이야.



아, 그렇지. 원래 네가 왔을 땐 레스터 광장의 뷰(Vue)극장쪽 가까운 곳에 서 계셨는데 광장을 새단장한답시고 공사를 한 뒤 가까운 프랑스 성당과 ‘프린스 옵 웨일즈’ 극장 앞으로 옮겨 가야만 했지. 번화한 광장에서 한 발 비켜 선 이 골목에서 지나는 한 두사람들만이 아저씨를 알아보고 함께 웃으며 사진찍는게 전부였단다.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 카이.’



아무것도 모르는 난 채플린 아저씨가 거기 새로 옮겨진 구석 자리에 그대로 있을 줄 알고 섭섭한 마음도 들더구나. 세월가면 인기도 식고 잊혀져 버린것같은 섭섭함과 망망함 말이야.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왕년의 스타가 이런 기분일까? 사실 채플린 아저씨만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어디 있을까? 영국에서 새 영화 ‘프리미어’ 장소인 그 레스터 광장을 떠나 이 지저분한 골목 한쪽에 더구나 그을음으로 거무스럼한 세월의 때가 낀 벽을 배경으로 하고 서있는 아저씨가 쓸쓸해 보였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통틀어 최고의 스타, 코메디언의 대명사격인 채플린 아저씨가 여기 이 음산한 구석에 서 있다는게 여간 언짢아 ‘분’까지 들더구나. 가끔 프랑스 성당에서 나오다 마주치며 ‘안녕하신교’를 해도 그 모습 변치않고 모자까지 벗으며 인사하며 웃겨 주실것같은 채플린 아저씨였기에 말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주위에 흩어져 있기도 했고 음료수나 커피가 아저씨 주위에 쏟아져 있는 경우도 있었단다. 거긴 그런 곳이야. 너무하다 싶었지. 가장 기분 나쁜 건 밤새 술취한 취객들이 토해낸 토사였어. ‘으웩’ 하다가도 바람에 휘날리듯 연약해보이지만 견고히 서있으려 애써는 그 표정 그대로 웃음을 자아내는 채플린 아저씨에게 오히려 위안을 받았지. 가끔 성당에서 골치아픈 일땜에 기도하다 성당 앞에 서있는 아저씨를 생각하며 용기를 얻은 적도 있었다 카이. 그래서 나중엔 오히려 아저씨가 여기 그대로 서 있었으면 하고 은근슬쩍 바라기도 했지.



직접 직설적으로 물어보진 못했지만 채플린 아저씨도 그런 ‘자리’에 연연하시진 않을거야. 계급사회인 영국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자신은 그 노동자계급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원했을 거야. 몇 년전에 아저씨가 태어나신 템즈강 남쪽 월워스(Walworth)라는 곳에 갈 일이 생겼단다. 가는 김에 아저씨가 태어난 그 거리도 보았지. ‘이스트 스트리트(East St.)’라고 했는데 왁자지껄한 시장골목이더구나. 런던 남쪽의 이상한 이름인 ‘코끼리와 성(Elephant and Castle)’이란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이더라구.



아저씨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는거 너도 알지. 내가 둘러본 그 동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런던 저소득 계층의 주거지역이야. 한가지 다르다면 지금은 아저씨가 살때완 영 딴판으로 주민 대부분이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그들의 자손들이야. 흑인들의 해방구인 브릭스턴(Brixton)과 그리 멀지도 않고 디킨스가 묘사한 음산한 거리인 ‘클링크 가(Clink Street)’가 있는 서덕(Southwark) 지구에서도 멀지 않아. 이 허름한 거리에서 아저씨는 디킨스의 소설속 그 빅토리아 시대 끝자락에 어린 시절을 보냈지. 멀지않는 강 건너 버킹검 궁전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여왕, 인도의 여왕이라 별칭이 붙은 빅토리아 여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을때 였지. 아저씨는 9살도 채 되기전 두번이나 학교는 커녕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지. 9살? 그래 9살이면 어린애지. 또 한창 사춘기이던 14살 때는 윤리적으로 문란하고 책임감없던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가야하는 아픔도 겪었어. 어머니와 헤어진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는 사랑은 커녕 제대로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아 빈궁한 생활을 해야만 했지. 그래서 가끔 생각을 해봐. 아저씨는 이런 부모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계에서 가장 진보하고 잘 살았던 당시 영국의 제도에 의문을 품었을까? 아니, 이런 생각조차도 아저씨에겐 사치였겠지.



‘아아니.. 그래서 정말 아저씨는 빨갱이 동조자가 됐을까?’



그런고로 노동자들의 천국을 꿈꾸며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몰래 전했을까? 그래서 미국에서 추방된 건 아닐까?



이혼한 아버지가 생활비만 제대로 주지 않은 건 물론이고 부모로서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얘기해. 그러나 생전 처음으로 그 인색한 아버지가 아들로 인정하고 일생에 딱 한번 ‘허그’를 했다는 그 펍(pub)은 거기에서 결국 못찾았어. 아저씨는 그 아버지로부터 자본주의의 치부는 빈부격차이고 술이라고 혹시 쇠뇌된 건 아니었을까? 남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저씨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그나마 아들을 ‘넌, 내 아들이야’ 하며 허그했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어.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아저씨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엄청 사랑을 받았지.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경'의 작위도 받았으니...



‘그 아저씨의 아버지에 비하면 넌 정말 좋은 아버지라 카이…’



솔직히 얘기해서 네가 늘 미안해하며 하는 말, 너의 자식들에게  ‘남들처럼 못해 준다’는 만트라도 사실은 아니잖아. 어째 부모 세대의 언어습관을 그렇게 똑같이 사용해? 한세대 전에 비하면 너의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은 비교가 안되지. 그러나, 난 알아. 진정 네가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을 말이야. 십년전에 겨우 런던 한번 오고 했던 너의 말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았지.



‘언제 여기 다시 올수 있을까?’



그리고 내밷던 너의 긴 한숨. 난 알아… 결코 백여만원하는 비행기표 살 처지가 안돼 다시 못오는게 아니란 걸. 그 돈으로 자식 뭘 해줄수 있다는 ‘리스트’가 슈퍼마켓 계산대의 영수증처럼 자동으로 빠져 나온다는 현실말이야.



‘그러고 보면 채플린 아저씨의 ‘모던 타임즈’가 나온 1936년과 지금은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넌 가끔 말했지. 군사정권 시절 숨죽이며 보았던 아저씨의 흑백 무성영화들. 울고 웃고… 그러다 혹시나 들킬까봐 가슴 콩콩 뛰던 시절이 가장 희망이 있던 시절이었다고. 아니, 그때가 더 좋았단 말이야? 아니지. 그땐 희망이 숨죽이며 또아리를 튼 너의 가슴에 콩콩 뛰던 시절이라고 해야 더 맞겠지.



‘그럼, 그 희망은 지금 어디갔노?’



혹시 나이가 들은 거 아니야? 무기력이 너의 한숨에 묻어 나오니 말이야.



‘언제 다시 런던올까’ 하던 너를 가끔 기억해. 그 말에 쓸쓸함이 묻어나와 날 한숨짓게 해. 채플린 아저씨의 트레이드 마크인 떠돌이(the Tramp) 복장을 하고서 실직자가 되어 걷던 그 거리가 오버랩 되기도 하고 말이야. 콧수염과 덜렁대는 바지, 중절모와 프록코트를 잘 차려 입고 그 음산한 흑백의 거리를 도통도통 걷던 아저씨 말이야. 감옥이 더 좋다며 감옥으로 다시 가길 원했던 그 절망의 끝을 말이야. 고전적인 떠돌이 사기꾼 분장을 하고 울고 웃긴 그리고 마음 ‘싸아’ 해지는 그 영화의 장면들을 가끔 기억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정작 채플린 아저씨 본인은 이런 영화를 싫어했다고 하는데 말이야.



몇 년전인가 런던 시내 그 프랑스 성당을 갔어. 여전히 그렇듯 성당을 나와 아저씨께 인사를 하러갔지. 아저씨가 사라진 거야. 아저씨가 서있던 그 자리엔 주변과 구별되는 하얀 벽돌로 채워져 있었어. 난 생각했지. 관할 구청인 웨스트민스터 카운실에서 또 변경지시가 내렸구나 하고. 이리저리 쉽게 변경하고 옮겨버리는 구청의 정책에 심한 반발심같은 것도 올라왔어. 그렇지만 또 구청의 웹사이트 방문도 귀찮아 잊어버렸지. 그런 뒤  BBC 런던에서 케이트 공작부인이 새로 단장한 레스터 광장을 오픈한다는 뉴스가 나왔어. 방송에선 왕족이 된 그녀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더군. 한국처럼 후다닥이 아닌 영국답게 지루하게 한참을 끈 이 조그만 광장의 새단장에 그녀가 왕족이 된 뒤 첫 공식일정의 일부라며 개장의 테이프를 끊은거야. 그 주 휴일에 일부러 친구와 광장에서 가까운 차이나 타운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지. 혹시나 채플린 아저씨가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해서 말이야. 그 주에 갔지만 무슨 영화의 프리미어를 한다고 그 광장공원을 다 막아 놓은 거야. 그 이유는 무슨 유명한 배우가 온다나 뭐나. 그날 실제로 그 광장은 갈수도 또 볼수도 없었지. 허탕을 치고나니 분하더라구. 그리고 또 잊어버렸지.



다시 채플린 아저씨를 본 날은 어느 여름이었어. 레스터 광장의 한가운데, 즉 셰익스피어가 비스듬히 기댄채 있는 가운데 분수대에서 물을 뿜어대고 있던 날이었지. 부모들과 함께 온 아이들이 맨발로 땅에서 쏫아나오는 물줄기를 축구하듯 차고 놀며 깔깔대던 날이었지. 그 분수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플린 아저씨가 서 있는게 보이는 거야.



‘아, 아저씨!’



순간 반가움과 함께 미안함도 차 오르더라구. 아저씨는 옛날 장소와는 정반대 쪽에 서 계시더라구. 그 프랑스 성당 앞 골목과 다르게 받침대도 더 높아져 어깨동무하며 사진 찍기가 불편하더라구. 하여튼, 아저씨를 다시 만나니 반갑더라.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이 레스터 광장에 아저씨를 특별히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더물더라구.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아저씨가 레스터 광장의 원래 자리에 있을 때 일이었어. 중국인 유학생과 한번은 아저씨 앞을 지나다 혹시 할리우드 문화세례를 받지 않은 시기를 살아 온 중국인들도 채플린 아저씨를 알까 의문이 들어 물어 보았지.



‘이 아저씨 알아?’



그리고 이 유명인을 혹시나 모르면 무안할까 싶어, 영국출신 유명한 코메디언이고 영화배우였던 ‘찰리 채플린’ 이라고 부연설명을 해줬지. 원래 지기 싫어하는 이 중국인은 채플린 아저씨를 모르는게 확실했어. 그러나 그 밑 아저씨의 성함이 적힌 팻말을 보더니 이 중국인이 그러는 거야.



‘아, 스펜서 채플린! 
물론 알지!’



난 벙찐 기분이었어. 왜냐하면 팻말엔 친절하게 아저씨의 Full Name인 ‘Sir Charles Spencer Chaplin’ 이라 적혀 있었어. 이 중국인은 ‘찰리 채플린’은 몰랐지만 ‘스펜서 채플린’은 안거야...



이 중국인처럼 이곳을 지나는 일반 시민들과 관광객은 아저씨를 그냥 지나치더라구. 바빠서 그렇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영화의 프리미어 행사가 항상 열리는 이곳에서 아저씨의 후배 배우들은 아저씨에게 인사라도 제대로 할까 생각했지. 아저씨가 여기 서 있음을 알기나 할까? 난, 여기에서 프리미어하는 영화의 영화배우들은 아저씨를 찾아 성지순례하듯 꼭 인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 성지순례가 그들의 전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지. 할리우드 배우들은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75년이란 긴 세월을 오롯이 바친 이 아저씨의 무대인생을 조금이라도 인정해줘야 하고 특히 메카시즘인가 뭔가로 빨갱이 동조자(Communism Sympathiser)로 내몰아 추방시킨 미국인이라면 더할거야. 세월이 흘러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다시 아카데미상 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아저씨가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던 그 장면 기억나? 그래, 빛은 어둠을 몰아낸다고 굳게 믿었던, 희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던 너의 그 가슴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래. 그래서, 아직도 콩콩 너의 가슴을 뛰게 만들어 주는 희망이 다시 살아나길 바래. 무력감은 너의 희망을 갉아먹는 암세포야. 무슨 무력감에 걸린 암환자처럼 말을 해?



아저씨가 ‘모던 타임즈’에서 거대한 기계의 이빨사이에 끼여 들었다가 다시 뒤로 튕겨 나온 사실을 잊지마. 그리고 요나가 거대한 바다 괴물에 삼켰다 다시 3일뒤 다시 내뱉어졌던 사실을 기억해. 어둠이 지배하는 현실의 거리를 아저씨처럼 엉성한 옷차림이더라도 도통도통 희망으로 다시 걸어봐. 그 거리가 런던의 거리가 아니더라도 좋아.



‘그래, 런던에 안오더라도 괜찮아.’



P.S. ‘아저씨께 드리는 안부는 내가 책임질께.’


떠돌이, 신사, 시인, 꿈꾸는 자, 외로운 친구, 항상 낭만과 모험으로 가득한 희망...
A tramp, a gentleman, a poet, a dreamer, a lonely fellow, always hopeful of romance and adventure.


:::::












매거진의 이전글 영어를 얼마나 잘 하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