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율리시즈 Aug 03. 2017

파리의 유태인 거리에서 평화를 염원하며

파리 여행 에세이 -

커다란 원통 파이프가 고드름처럼 주륵 주륵 달린 파리 ‘퐁피두 센터’의 외양 뒷자락을 지나는 거리는 메달린 파이프 마냥 복잡하고 어수선하다. 이 어수선함을 피해 골목안으로 이리저리 들어가다 보면 파리의 유태인 거리를 마주친다. 나도 어슬렁대다 ‘로지에 거리(Rue des Rosiers)’라 불리는 이 유태인 구역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전엔 몰랐단 말이고 지도보며 찾아가지 않았단 말이다. 우연이라 하기엔 약간 껄끄러운 것은 이 구역에서 피카소 박물관도 가깝고 가끔 특별시장이나 이벤트가 열리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같은 곳도 바로 가까이에 있으며 앞서 말한 퐁피두 센터도 있어 사실 발품파는 여행자에겐 이 거리는 발견되기 쉽다. 다르다면 조그만 거리라 눈치 못 채고 그냥 지나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치빠른 여행자는 이 거리가 유태인 거리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새까만 하시딕 유태인 복장에다 새까만 모자를 썼으며, 양쪽 귀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헤어스타일을 한 유태인 청년들을 여기서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북쪽, ‘생 드니’지역에서 보이는 북아프리카 이민자 구역과는 그래서 자연히 비교도 된다. 런던의 유태인 구역인 ‘골드스 그린(Golders Green)’과도 비슷한 곳이다. 다만 골드스 그린은 런던 1구역에서 한참 떨어진 북쪽에 있다. 이 파리의 유태인 구역에선 코셔(Kosher) 음식을 살수있고 레스토랑에도 코셔 고기만 취급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새우 먹을 생각, 삼겹살이나 돼지고기 목살 먹을 생각은 접어야 한다. ‘토라(모세오경)’에 적혀있는 유태인 정결례에 따라 모두 불결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 파리의 유태인 구역은 큰 도로를 조금 비켜나 있다. 그래서 차소리 시끄럽게 나지않아 좋고 골목이라기엔 조금 더 넓어 보이는 거리였다. 이 거리가 속한 구역 즉, 파리의 마레(Marais) 구역엔 옛날엔 꽤 많은 유태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1964년 드골 대통령은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로 하여금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떼(Cite)에 가까운 파리의 옛 구역인 이곳을 처음으로 ‘보존구역(secteur sauvegardé)’으로 정하도록 ‘명’ 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북촌이나 인사동을 보존하는 것과 말이다. 중세의 십자군들이 프랑스 왕으로부터 하사받았던 유서깊은 마레 구역을 보존하려는 문화대국 프랑스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리고 당당한 그 문화부 장관의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하다. 그렇다. ‘인간조건’을 쓴 그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와 동일인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앙드레 말로는 영국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팬’이었다. 아마도 고고학자이자 군사지략가였던 그가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먼 이국땅, 문명화가 좀 떨어진 곳으로 인식했던 당시 중동으로 날아 가서 멋지게 말타고 베두인처럼 머리를 감싸며 제국 터키에 대항해 활약했던 로렌스가 부러웠을 것이다. 당시 식민지 경영시대 말기, 최첨단 문명이라 자부하던 유럽인의 정신세계에서 고대의 화석처럼 보이는 그들을 좀 더 많이 알고 또 나름대로 도움도 주고자 하는 ‘자선’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렌스가 처음에 시리아의 유적발굴에 참여했던 것처럼 그도 유적답사와 발굴이 멋져보였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겨우 22세의 나이에 연인 클라라와 프랑스령이던 캄보디아에 1923년 건너갔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이었던 정글속 ‘앙코르 와트’의 유적중 한 곳을 답사했고 그중 한 부조품이 마음에 들어 신고도 않고 프랑스의 집으로 가져가려했다. 문명화된 프랑스로 가져가도 괜찮다고 그는 생각했을까? 다행히(?) 그는 프랑스 식민당국에 들켜버리고 말았다. 법적인 하자가 없음을 항변했지만 훔친건 훔친 거였다. 법적인 하자가 없다는 그의 항변으로보아 그의 심리상태와 정신세계를 엿볼 수도 있다. 후에 문화부 장관이며 문화인을 자부하는 작가가, 더구나 문화대국 프랑스 사람이? 어쨌든, 영국과 더불어 프랑스도 이런 저런 연유로 또 예술과 역사적 유물사랑 그리고 보존이란 변명으로 남의 나라와 문화에서 가져온(?) 수많은 유물들을 여러 박물관에 멋지고 아름답게 전시해 놓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하는 우리도 그 혜택을 받고있다. 파리의 ‘기메 박물관(The Guimet Museum)’엔 캄보디아의 문화재도 많이 있었다.



하여튼, 파리의 유태인 거리를 걸으며 희한하게도 앙코르 와트가 있는 캄보디아의 시엠립에 갔을 때 보았던 많은 ‘경고’ 카탈로그와 플랭카드가 떠올랐다. 이 경고 문구엔 어떤 조그만 고대 유물이라도 가져가는 것은 ‘불법'이며 ‘명백한 범죄’라고 적혀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마레의 유태인 지구가 프랑스 왕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중세의 '템플 기사단'에게 내린 십자가 전쟁 하사품인 걸 나중에야 알았고 앙드레 말로의 도둑질이 더불어 생각나자 뭔가 알수없는 ‘연관’이란 신비한 직감이 들었다. 이 파리의 구석진 한쪽 모퉁이에 전쟁으로 얽힌 침략의 역사가 얽히고 섥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또 한가지는 책이나 영화에 나왔던 파리의 유태인들 땜에 이곳에서 2차대전의 참사를 덧붙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찌가 점령한 파리에서 이 구역의 수많은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가까운 노트르담 대성당 뒤편을 걷다보면 세느강변 쪽에 프랑스 유태인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도 서있다. 그래서 그냥 성당만 볼게 아닌 이 기념지도 한번 둘러보면 좋겠다. 전쟁대신 평화를 원한다고 마음속 다짐을 하면 더욱 좋고...



이 유태인 거리에 있었던 유명한 ‘조 골던버그(Jo Goldenberg)’란 레스토랑은 이 역사를 잘 대변해 준다. ‘조 골던버그’씨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레스토랑 이름으로 택했다. 그는 부모와 누이들을  아우슈비츠(Auschwitz)에 다 잃었다고 한다.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유태인 이름을 당당히 내건 이 레스토랑은 레지스탕스 회원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미팅장소로도 쓰였다고 하며 저항과 희망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리고, 1982년 바로 이 레스토랑에 아랍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침입해 총과 수류탄으로 6명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해를 피해 온  희생자들이 모여사는 곳에 또 폭력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또다른 희생자, 억압받는 팔레스탄인인들을 대신한 복수였다.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억압정책에 반기를 들며 테러를 가한, 폭력은 또 폭력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마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폭탄처럼...내가 이 거리를 다시 갔을 땐 마침 파리의 테러 참사가 일어난 뒤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총들고 무장한 무뚝뚝한 프랑스 청년들이 만일을 대비해 특별히 이 유태인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철통같이…’ 예나 지금이나 이 구역은 전쟁으로, 침략으로, 또 테러로 점철돼 있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로 인해 꼭 부정적인 시각만으로 이 마레 구역을 보진 말자. 바로 이 유태인 구역은 박해를 피해서 찾아 온 수많은 동유럽 유태인들과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 아프리카(튀니지, 알제리아 그리고 모로코)의 유태인들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찾아 모여든 그래서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둥지’와 ‘안식처’의 구실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930년대까지는 많은 동유럽 유태인들이 박해, 특히 포그롬(pogroms)이라 불리는 조직적인 박해를 피해 이곳 파리의 마레 지구로 흘러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내고그(유태인 회당)를 여기에다 세웠으며 유태인 상권을 바로 이 ‘로지에 거리(Rue des Rosiers)’를 중심으로 형성했다고 한다. 원래 유태인 지역이었던 동쪽 런던(지금은 유명한 화이트 채플 갤러리가 있고 방글라데시 이민자가 많이 사는 곳이며 런던에서 최고로 맛있는 정통 커리를 맛볼수 있는 곳)과 같이 동유럽 유태인들의 언어인 '이디쉬(Yiddish)'가 이곳엔 통했으며 이 언어로 작은 장소를 뜻하는 ‘‘플르츨(Pletzl)’ 이란 또다른 이름이 여기에 붙었다. ’



파리를 찾는 여행자라면 이 거리(rue des Rosiers)를 중심으로 ‘rue Malher’와 ‘rue des Hospitalières-St.-Gervais’ 사이를 헤집어 걷다보면 이것저것 볼것도 많다. 이 중심 거리엔 유태인 코셔 레스토랑들과 유태교 책을 취급하는 책방도 있다. 이 책방에는 유태교와 관련된 물품도 같이 팔고 있었다. 한번은 궁금해서 들어가 어슬렁 거려도 주인이 눈치를 주지 않았다. 동유럽 유태인들이 즐겨 먹었던 각종 모양의 빵을 파는 베이커리도도 이 거리엔 있다. 꼭 들어가지 않더라도 쇼윈도우를 통해 볼수 있다. 안식일 빵인 샬라(challah bread)도 있고 치즈 케익도 보였다. 과일이나 치즈에 밀가루를 입혀 구운 스트러델(strudel)도 곳곳에 보였다.



이 거리 중앙쯤엔 유태인 회당인 ‘시내고그’가 있다. 자주 젊은 유태인 청년들이 검은 정장인 하시딕 가운을 걸치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는것도 보인다. 그러나 동양인 얼굴을 한 여행자들에겐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아마 파리의 유태인 방문자나 미국 유태인 관광객들이 많아 이들에게 말도 걸고 선교용 팜플렛도 주는 것같았다. 안식일을 준수하고 코셔 음식만 먹으며 회당에 나와 랍비의 강론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다. 그들은 기도용으로 팔에 둥둥 감은 끈(strap)인 ‘테필린(Tefillin)’을 갖추어 놓고 기도하길 부탁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유태인 거리가 우리같은 나머지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건 바로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전통음식이자 아주 대중적 음식인 ‘펠라펠(Falafel)’때문이다. 영어로 Felafel 이라 쓰는데 불어로는 Fellaffel 로 쓰여진 간판을 보았다. 병아리 콩(? Chickpeas)을 동글동글 탁구공 사이즈의 볼로 만들어 바싹 튀긴 것에다 채소와 소스를 납작한 피타(pita)빵 안에 담아 먹는 것이다. 몇몇 펠라펠 가게엔 항상 손님들이 줄을 서서 팔라펠을 사기위해 기다리며 좁은  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도 줄을 서서 펠라펠을 사서 먹었지만 그렇게 맛있는지는 못느꼈다. 그러나 이 팔라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엄청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에선 우리의 떡볶기나 오뎅같은 대중음식이라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거리의 펠라펠은 ‘원조 맛’ 그대로 라고 한다. 가까운 퐁피두 센터 부근이나 세느강 건너 남쪽 라틴 지구에도 펠라펠을 많이 팔지만 이곳만큼 맛은 없다고 한다. 진짜일까? 라틴지구 어떤 펠라펠 숍은 튀겨낸 ‘병아리 콩 볼(ball)’만 넣어주고 나머지 채소와 피클은 자유롭게 골라 담아먹을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아마 한국 사람들에겐 피클을 듬뿍담아야 약간의 이국적인 냄새와 느끼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좋은 것은 이 유태인 거리에선 그냥 서서 팔라펠을 손에 들고 어석어석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는 것인데 문제는 케밥과 같이 펠라펠을 들고 시식하기가 좀 버겁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서서 먹든, 의자에 앉아 점잖게 먹든, 입을 ‘앙’ 크게 벌리고 흘리지 않게 먹어도 항상 얇게 쓴 채소와 뿌려주는 소스를 질질 흘렸다. 내가 칠칠치 못한지? 아님 셰파르디(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유태인을 지칭) 유태인 아저씨가 듬뿍 담아주는 양이 큰 펠라펠 탓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말나온 김에, 콧수염을 기른 입담 좋은 이 셰파르디 유태인이 큰 소리로 ‘니 하오’라거나 ‘곤 니찌와’를 (우리 귀엔 약간 무례하게) 사용해도 게의치 않게 행동하려면 약간의 인내심도 요구되며 미소도 준비해 두면 좋다.



팔라펠을 먹으며 유태인 상점을 기웃거리고 유태인 전통 빵을 사서 간식용으로 가방에 넣는 것으로 이 유태인 거리를 다 경험했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오랜 역사, 문화, 인종, 이민, 종교적인 요소들을 다 간직한 이곳은 파리에서 색다른 곳 중의 하나이고 또 현재와도 바로 연결된다. 더구나 최 프랑스의 끔찍한 테러와 해결되지 않은 채 복잡하게 꼬여있는 국제정세로 이 역사적인 작은 거리에서 마저 무장한 경찰을 대면해야함은 중동의 이스라엘 뿐 아니라 프랑스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말해주며 아직도 평화는 요원한 얘기처럼 들렸다. 그래서 펠라펠을 나처럼 질질 흘리며 먹더라도 여기서 평화를 염원하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

이 거리의 대부분은 관광객들로 보인다. 평범한 파리의 골목이다.

바깥에서 사서 먹어도 되고 안으로 들어가 먹어도 된다.

하시딕 유태인 청년이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 스크린엔 유태교 기도장면, 즉 구약성서의 '토라'를 읽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팔에 감아 기도하는 가죽끈 '테플린'이 보인다.

멋진 대문인데 오른쪽 쓰레기통이 망쳤다.

유태인 빵집. 동유럽 유태인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도 보인다.

요즘은 한국 여행자도 많이 오는지 비누가게 앞에 한글이 보였다. 50% 세일?

유태인 책방. 유태인 성서(구약성서)도 물론 팔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스위스 문화센터'라 쓰여있는데 도무지 문화센터로 보이지 않는다. 슬쩍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싼 옷들을 팔고 있었다.

유태인 책방 앞의 레스토랑. 노천 테이블에서 즐겁게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지나는 여행자들도 즐겁게 해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낮잠자던 아그리젠토의 철학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