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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10. 2017

천국에선 수학이 필요없다구?

런던에서...

수학은 우리 삶의 기본이다. '필수'란 말이다. 영어는 몰라도 역사는 몰라도 잘 살수있지만 산수를 모르면 대단히 살기 불편하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공산이 크다. 대학교 학과의 인기로 시대를 가늠해 보면 적어도 영국에선 컴퓨터 과학(Computer Science)과 더불어 수학(Mathematics)과가 자연계의 으뜸이다. 일반적으로 대입점수인 UCAS 포인트로 캠브리지 대학과 런던 임페리얼 대학의 자연계 1위는 수학과다. 거의 만점에 가깝고 명석한 두뇌의 젊은이들이 가는 명품학과이다. 모르긴해도 우리나라완 좀 다를 것이다.(물론 상위권 대학들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은 기초학문보다는 직업갖기우선의 응용학문이 대부분인 다른 대학들에선 양상은 달라진다.) 왜일까? 많은 수학과 졸업생들은 그들의 명석한 두뇌를 인정받아 런던 금융시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또 금융회사들은 이들을 두 팔 벌려 반긴다고 한다. 스톡브로커로 또 헤지펀드 메니저로 이들 명문대 수학과의 활약은 눈부시다. §

수학은 기초학문이다. 인문계의 철학과 함께 만학의 왕으로 군림한다. 사실 철학에 수리철학이란 엄연한 학과목이 있음으로 해서 철학이 그 범위가 넓다고 해야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학의 인기(?)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본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 또 그로인한 자본 축적의 도구로서의 무한한 응용땜에 철학보다 비교우위이다. 자신의 부와 공동체의 부 그리고 한 나라의 부를 측정비교하는데 수학적 통계와 수치는 바로미터이며 주식시장에선 각 기업들의 이익산출 정도와 부의 정도가 숫자로 똑똑 계산되어 스크린에 떠있다. 수학만큼 똑부러지게 정확한 학문이 어디에 있을까? 수학은 명료하다. 다만, 이 숫자는 변동성이 심하며 올라갈수록 또 숫자가 많을 수록 좋다. 이 '변동성'에 주목해 그 변화무쌍함을 '분석 예측'하는게 또 수학이 응용되며 그러기에 '셈'에 밝은 이가 이를 맡는다. '예측'을 잘 하는게 본업이라면 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일했던 그래서 '점성가'의 이름을 가졌던 옛날 수학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이들의 본성엔 미래 예측이라는 '점쟁이' 본성이 당연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들이 예측해서 맞춘 사람이 대접받기 때문이고 예측이 적중한 이들에겐 일감도 많이 들어 오고 자연히 부도 축적된다. 이로서 옛날 점쟁이나 작금의 뉴욕, 홍콩 그리고 런던 금융시장에서 활약하는 '애널리스트'나 사실 그 본성은 다르지 않다. 이름만 그럴 듯하게 다르다. §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나카타 노인은 몇 천엔 이상은 세지 못한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10이상의 숫자는 모른다고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만수무강'이나 '만세'에 나오듯 '만(10000)'이 최고의 숫자였고 이는 무한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살까지 사세요'라는 말도 안되는 아첨은 만살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문명의 발달과정은 '셈'의 발달과정과 흡사하다. 철학적 사고와 인식의 발달, 즉 두뇌(Mind)의 발달은 추상적인 '셈'의 능력을 육성함으로 진보되었다. 어느 대영박물관 연구자가 발견한 '아카디아(Acadia)' 언어로 된 아득한 고대 바빌론의 구운 진흙에서 셈법을 발견한 건 이러한 셈법이 문명의 엔진 구실을 하였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대 히브루 알파벳은 알파벳 자체가 숫자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알레프'는 1이고 '베이트'는 2이다. 아라비아 숫자로 세계가 통일된 지금이지만 다양하게 각각의 문명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숫자와 셈법을 고안해 내었다. 아직도 인도인들과 이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0'을 발견했다고 서로 논쟁한다. 왜냐하면 '0'의 발견은 수학에서 하나의 거대한 혁명이었기 때문이었다. '0'의 발견  그 전과 후의 인간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혹자는 대승불교의 용수(나가르주나)가 '무(Nothingness)'의 개념으로 '0'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종교가 문명의 첨병역할을 했음을 여기서 보여준다. §

인간 문명의 발달로 더욱 더 깊고 넓어진 똑똑한  두뇌로 하는, 지금은 컴퓨터로 주르륵 읽어내는 '억'단위 '조'단위의 숫자들에 우리의 연약한 감정은 끝내 종속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음(Heart)이 머리(Mind)에 뒤쳐진 현실의 인간이다. 진화된 셈법으로 '나와 너'로 깨끗하게 구분해 우리의 행복까지도 수학적 수치로 깔끔하게 비교해 놓았다. 개인의 연봉으로 또 한 나라의 GDP니 GNI로 말이다. 자신의 숫자를 남보다 더 높이기 위한 경쟁의 가장 이로운 방편이 되는 학과로 가기위해 젊은이들은 자신의 적성을 은밀하게 숨기는 교묘함을 먼저 터득하였다. §

그러나, 이 숫자 올리기에 정신집중해 어느정도 성공해 남들보다 높은 숫자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 뒤에 따라오는 공허함은 어쩔수 없을 것이다. 이 공허함, 즉 '0'이 된 감정을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는 처음으로 읽어냈다. 그래서 '0'인데 왜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대판 꾸짖었다. 제로(Zero)와 제로(Zero)를 합쳐봐야 제로(Zero)일 뿐이다. 인간은 제로(0)에서 왔는데 왜 자꾸 뭘 합칠려느냐고 애타게 설파했다. 사실, 뭔가 텅 빈것 같은 마음을 가진 건 인간뿐이다. 제로(0)를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뿐이란 말이다. 이 '텅 빔'을 혹시 못 느끼는 인간이라면 안타깝게도 그는/그녀는 기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시편에서는 돌같은 마음도 있음을 전한다. 숫자를 넓히고 높여온 그래서 최대로 진화한 인간인 현대인류가 과연 이 공허함의 정도에서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보다, 어느 아프리카 부족보다, 하루키의 나카타 노인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

가만히 생각해보면, 천국이라면, 특히 모든이가 행복한 천국이라면 이 숫자로 비교하며 측정하는 세상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숫자땜에 우리 감정의 높낮이가 출렁거리며 심한 기복으로 멀미를 경험하진 않을 것이다. '난 1억을 가져서 5천만원을 가진 너보다 5천만원만큼 더 행복해' 'A는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니 2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B보다 10평만큼 더 행복해' 라는 어처구니없는 행복비교는 천국엔 없을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 약국갈 일 없을 것이다. 사실, 약국이 천국에 있기나 할까? §

그러면, 잠시라도 이 숫자없는 천국을 지상에서 맛볼 수 있을까? 숫자에서 해방되고 셈법을 모르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이 되어보는 시도로? 래서 추상적인 숫자공장에서 제조된 숫자 노예의 사슬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시도를?

잠시 만이라도...

그러면 혹시 '힐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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