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5.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회의를 하되 모인 사람들의 특성상 재미있게 하기로 했다.
이왕 할 거면 마시면서 하자는 거였다. 뇌도 야들야들하게 만들 겸? 우리가 언제는 안 마셨나? 일주일에 한 번만 마셨나? 어차피 마실 거, 놀지만 말고 사업 구상이라도 해보자는 거였다.
인생 최초로 술자리가 유익해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끊임없는 편 나누기 게임의 시작이기도 했다.
- 사무실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보통 헌승이 화제를 던지면 구가 받아치는 식이었다. 어느새 헌승과 구는 말을 놓고 있었다.
- 이런 스마트한 세상에 무슨 사무실.
- 아니, 어차피 얘네한테는 작업실이 필요하니까.
- 화가, 작가, 보컬이 다 쓰려면 얼마나 넓어야 하게.
- 다용도로 써야지. 사실 술만 해도 사다 먹으면 훨씬 적게 들잖아.
여기에 현지와 밤비가 한 마디씩 얹으면 이쪽저쪽의 윤곽이 드러났다.
- 우와, 작업실 있으면 정말 좋겠다. 연습도 하고, 레슨도 하고.
대책 없이 좋아하기는 밤비 전문이었고,
- 작업실에서 술 냄새나는 거 딱 질색이거든?
논지 상관없이 지 좋은 것만 따지기는 현지가 최강이었다.
- 밤비가 말해 봐, 방음하는데 얼마 들어.
- 직접 갖다 붙이면 한 삼백쯤?
- 현지 언니는요, 화가 작업실은 넓어야 하지 않나요?
- 뭐, 아무래도 그렇지?
- 작가는 책상 하나만 있음 되는데 그럼 노작씨가 억울하지 않을까?
현지는 언니라면서 언제 봤다고 나는 노작씨야? 그리고, 누가 작가는 책상 하나만 있음 된대? 내가 소설책만 천권 있는 사람이야? 쏘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번번이 한 박자 느렸다.
- 어차피 학원이랑도 5대 5로 나누는데 일주일에 열 명만 들어도 나 70, 회사 70이니까 임대료 내고 남은 돈으로 시설비 일 년 내로 뽑겠구만. 그리고 방음하면 보컬 수업뿐 아니라 모든 음악수업을 다 할 수 있잖아. 심지어 녹음도 할 수 있고.
이미 말했듯 밤비는 약이 좀 올라야 똑똑해지는 스타일이었다.
- 에잉? 우리 인스터튜트 하는 거였어? 그럼 나도 가르쳐야 해?
마찬가지로 현지의 좋고 싫음에 논리라는 건 일관되게 존재하지 않았다.
- 비투씨가 과연 될까? 내 생각에는 비투비를 노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헌승이 말했다.
- 비투씨는 뭐고 비투비는 뭐야?
물어보고 나자 그냥 검색할걸, 싶었다. 헌승은, 정말 몰라? 하는 표정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영어만 하면서 현지는, 그딴 게 있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보다 짜증나는 건 구의 젠체하는 태도였다.
- 비즈니스 투 비즈니스, 비즈니스 투 씨빌. 대중한테 팔 거냐, 기업에 팔 거냐. 모든 창업자들의 고민이죠.
넌 뭔데 때마다 나서? 내가 너한테 물어봤니? 하고 싶었는데 내 기분을 읽었는지 헌승이 무마하는 말을 던졌다.
- 불특정 다수의 고객한테 팔 거냐, 아님 이미 고객을 확보한 회사한테 팔 거냐 뭐 그런 거지 뭐.
- 알아먹었어.
- 뭐 그런 거지 뭐, 용어가 뭐 중요해.
- 알아먹었다고.
나는 이번만큼은 느리지 않았다.
- 그러니까 강연을 해도 직접 사람들을 모아서 하면 비투씨고, 회사랑 계약해서 직원들한테 하면 비투비라는 얘기잖아.
- 그렇지, 바로 그거지.
이 현안에 대해서는 현지와 밤비가 같은 편을 먹었다. 회사를 상대로 뭘 어떻게 해보자는 생각은 말자는 거였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현지는 전시를 하고도 작품 값은커녕 재료비조차 못 받은 적이 꽤 많았고, 밤비는 전 소속사와의 불화로 부를 수 없게 된 노래가 여러 곡이었다.
구는 처음으로 헌승의 편을 들었다.
- 쌈짓돈 모아서 어느 세월에. 한큐에 크게 크게 가야지.
- 그렇지, 그거야, 대중들한테 알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쪽수가 많아서.
- 수도권 인구는 이천 만이지만 회사는 많아 봐야 이천 개잖아?
- 사실 비투비를 궤도에 올린 다음 비투씨를 해도 되는 거니까.
- 마케팅이 제일 중요한데. 회사끼리는 한 번만 잘하면 소문도 금방금방 나고.
솔깃한 얘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닌 듯했다.
- 어떤 사업을 할지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는데 B to B냐 B to C냐부터 정하는 건 웃기지 않아?
화제는 저가 정책으로 갈 것인가, 고급화 전략으로 갈 것인가의 문제로 옮겨갔다. 첫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성과 애플이 거론되었다. 엘지가 결코 뒤지지 않는 제품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밀린 점, 엄청나게 싼 가격에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을 내놓고도 노키아가 급속도로 추락한 점 등이 언급되면서 저울은 고급화 전략으로 급히 기우는 분위기였다. 저변을 확대하려면 최대한 싼 가격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밤비의 의견은 두 사람의 세계경영 앞에서 걸음마도 뗄 수 없었다. 내 입장을 말할 것 같으면, 동네 사업 구상하면서 웬 글로벌 기업? 뜬구름 잡기에 동참할 의도는 결코 아니었지만, 도무지 짚고 넘어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 소니가 삼성한테 밀리기 전에 취한 건 고급화 전략이 아니었나? 처음 가정용 컴퓨터 나올 때 애플이 아이비엠 저가 정책에 싹쓸이당한 거 생각해 봐. 솔직히 지난 십 년간 유니클로만큼 성공한 의류 브랜드가 있었나? 지금 삼성의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는 샤오미는 또 어떻지?
서두의 서두도 끝나지 않은 참이었지만 현지의 머릿속에 남의 말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다 따위의 개념은 없었다. 남들은 탕수육 소스가 왜 이렇게 뜨거워, 오늘은 만두 접시 비닐도 안 뜯어지네, 하고 있을 때 혼자 남이 까준 짬뽕 건더기부터 먹는 앤데 탓해 뭣하겠어.
- 소니는 자만심 때문에 망한 거고 삼성은 풰스트 퐐로워(Fast follower)인 게 리밋(limit)인 거지.
진심으로 신기한 게, 본인 빼놓고는 세상에 하등 관심 없는 애가 어떻게 “빠른 추종자 전략” 같은 건 안다는 말인가. 시도 때도 없이 페북으로 길들여진 ‘덕력’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애플이니 유니클로 레풔런스(reference)하는 건 솔직히 오버 아니야?
그니까 그게 내가 하려던 말인데….
- 좀 현실적이 되자. 프뤠그넌트(fragnant)해지자는 게 아니라 뤳츠 비 리얼리스틱 플리이즈(Let’s be realistic, please.) 이 동네 돌아가는 꼬락서니 좀 봐. 언제부터 우리가 한 달에 십오만 원 받고 유화를 가르쳤니? 그것도 투웨니포 아월스. 기타 일주일에 세 번 배우는데 한 달에 칠만 원 받는 새끼들은 뭐야? 심지어 캘리그라피 원데이 클라스를 만 원 받는 것들은? 걔네가 제대로 된 아티스트일까? 아티스트도 아닌 것들이 여기 들어와서 살아보겠다고 가격만 덤핑치는 바람에 예술은 원래 싼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지금은 제값 받고 뭘 해보려도 해볼 수가 없는 시츄에이션이 되고 말았다고. 적어도 예술가로서 사업을 일으켜보려고 하는 거라면 우리 스스로 셀프 언더에스퉈메잍(self under-estimate)하는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좌중이 숙연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어서서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훌륭한 연설이었다. 테드 사이트에 올려도 랭킹 십위쯤은 단숨에 정복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