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14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인문학은 가장 잘 역이용할 수 있는 학문이기도 했다. 누가 그랬던가, 테러리스트는 특수부대한테 배우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심하게 말하자면 장 선생은 완전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과학수사 담당자 같았다.
인문학에 대한 생각만 다른 게 아니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나와 의견이 어긋났다.
그는 김윤서 씨의 시안을 결사반대했다. 진부한데다 격조가 없다는 거였는데 한술 더 떠서 직접 쓴 붓글씨를 단체 카톡방에 올리기까지 했다. 품위 있다못해 지루하고, 독창적이다못해 이상한 붓글씨가 아닐 수 없었는데 거기에 대고 삼촌이, 역시 학자의 붓글씨는 수준이 다르군요, 한마디 덧붙이면서 수습은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나와 의견이 같기는 구 뿐이었다.
- 나는 윤서씨 디자인 괜찮은데 왜들 그러지?
- 그러게 말이야? 세련되고, 현대적이고 좋기만 하구만.
- 그래도 어른들 의견이니 어쩔 수 없지. 어른들이 아니라 으른들인 건가.
하면서 구는 픽, 웃었다 그새 우리는 꽤 친해진 듯싶었다.
-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 붓글씨를 쓰겠단 말이야?
- 에이, 로고를 붓글씨로 할 수는 없지.
단순한 건데 왜 난 구 대표처럼 할 수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당신의 글씨가 아니라 붓글씨가 안 된다고 말하면 그만인 거지. 새삼 처음에 구를 낮춰보았던 게 미안해졌다.
우리는 김윤서 씨에게 재요청을 했으나 여행 때문에 시일 내로 새로운 디자인을 보내기는 어렵겠다는 답을 받았다. 나의 애정 하는 윤서 씨가 일을 열심히 해놓고도 돈을 못 받게 된 것이었다. 이쪽 일정에도 지장이 생겼다.
- 디자인이 있어야 명함을 파고, 명함이 있어야 뭐라도 해 먹지.
- 제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한번 부탁해볼까요? 부업으로 하는 거라서 가격도 쌀 것 같은데요.
명 실장님이 데려온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아줌마스러웠다. 안경잡이에 곱슬머리여서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어딜 봐서 나랑 비슷한 데가 있다는 거냐, 키는 십 센티미터쯤 작고 몸무게는 십 킬로그램쯤 무겁겠구만,참말이지 좋았다 싫었다 하는구나 구 댄서 너는.
내가 보기에 이영락 씨는 김윤서보다 몇 단계는 하수였다. 미팅을 능숙하게, 효율적으로 진행했을 뿐이었다. "으른들"은 그게 맘에 든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가 지난번 디자이너보다 낫다는거야. 이분 디자인은 아직 보지도 않았으면서, 당신도 맘에 들었다 안들었다 합니다 장 선생님, 하고 생각하자마자 삼촌이 디자인 가격을 물었다.
- 오십만 원만 주십시오.
- 너무 싼 거 아닙니까?
- 저는 전문디자이너가 아니어서 디자인으로 번 돈은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함돠. 아이들에게 기부를 더 하고 싶으시면 더 주셔도 됨돠.
뭔가 훌륭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의 함경도 억양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 그럼 전문은 뭡니까?
- 전문이랄 건 없고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회사 마케팅담당 이사로 있었슴돠.
- 그럼 그 전에는?
- 가장 오래 있기로는 자산관리회사에 오래 있었고요, 거기서 나와서는 재정이 나빠진 회사들을 상대로 프리랜서로 일했슴돠. 모 대학에서는 구조조정팀 총괄팀장으로 일했고요….
보통은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습니다, 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영락 씨는 안 해본 게 있다면 뭉뚱그리는 일 뿐일 것 같았다. 열 개 넘는 직업이 입에서 줄줄줄 흘러나왔다. 일한 회사와 맡은 직책과 주요업무에 관한 것이어서 딱히 직업으로 명명하기는 애매했다. 이를테면 도산공원 앞에 있던 유명한 미용실에서 비쥬얼 이미지 담당을 맡았을 때 이런 것은 성공했고 저런 것은 안됐어서 원인을 분석해보니 이러저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는 스토리인데, 그럼 비쥬얼 이미지스트라는 직업이 있는 거냐 하면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전문화된 마케터의 일종이냐 물으면 당연히 마케팅도 포함되지만 마케팅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기가 발동한 건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삼촌은 오랜만에 쓸 만한 포수를 만났다는 듯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집에 가고 싶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묻혀있던 집안 내력이 또 하나 발굴되는 게 싫어서였다.
- 내가 이 건물에 미용실을 연다면 어떨 것 같소?
- 미용사 관리하기가 쉽지 않으실 검돠. 회사 차원에서 밀어서 띄어 놓으면 어느 날 자기고객 챙겨서 나가 버림돠. 대부분의 미용사가 독립했다가 망하는데도 본인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나감돠. 그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회사도 큰 손실을 보죠. 대부분의 미용실이 한 사람의 이름을 걸고 도제식으로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슴돠.
삼촌은 쌀 보리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방금 건 보리.
- 이태리 도시락 가게를 여는 건 어떨 것 같소?
-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진입장벽임돠. 이태리도시락이라면 음식성격상 음료수가 포함되어야 할 것 같은데, 직장인이 점심값으로 만 원 이상을 쓰기는 어려울 테고, 만 원 이하로 간다면 이 건물 일층에서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슴돠. 이층이라면 승산이 있겠지만 도시락집이 이층에 있어서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슴돠.
- 일이층을 같이 가야죠. 일층은 이태리 야시장으로 이층은 도시락 집으로. 주방을 위에 만들어서 음식을 아래로 내리면 면적당 단가가 충분히 빠질 것 같은데?
-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층은 원테이블키친식으로 해서 소수의 예약손님만 받는 식으로 운영하고 도시락 집은 일층에 작은 코너를 두는 것이 더 나은 형태일 것 같슴돠.
지금 건 내가 지난번에 기획서를 보았으니 쌀.
- 이, 삼층에 에스테틱을 여는 건 어떻습니까. 이십사 시간으로?
- 에스테틱은 미용실이랑 달라서 사람을 부리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요, 손님이 리스크입니다. 무조건 손님 관리만 잘하면 됨돠. 왜냐하면 무조건 시비를 걸고 화를 내려고 오시는 손님들이 많기 때문임돠. 초기에 할인권을 풀거나 프로모션을 많이 해서 몇 번 방문이 누적된 손님들만 회원권을 주시는 방식으로….
-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오?
- 에스테틱 창업에도 관리자를 한 적이 있기 때문임돠.
- 한마디로 위기에 빠졌거나 스타트업을 하는 회사 전문이란 말이군.
나는 삼촌의 눈빛이 반짝, 하는 것을 보았다.
- 나는 아직 못 들어봐서 그런데 그런 직업을 뭐라고 합니까? 전문경영인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 굳이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면 리스크 관리자라고 할 수 있슴돠.
- 리스크 관리자! 그렇군!
삼촌은 결국 이영락 씨의 직업을 알아내고야 만 것이었다.
이영락 씨는 하드 디스크 속에 삼백 개 가량의 리스크 관리 실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삼십 개도 아니고 삼백 개.
- 리스크 관리가 안된 적은 없습니까? 쉽게 말해서 망한 적은 없느냐 이 말이오.
- 저라고 왜 실패한 적이 없겠습꽈. 두 건 있었슴돠.
- 아까 그 미용실이랑?
- 그 미용실은 제가 리스크관리를 끝낸 후에 망했슴돠. 그리고 벌만큼 벌고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볼 수는 없슴돠. 한번은 대기업에서 임프린트로 만든 회사였는데 독립하는 와중에 자금이 없어 무너졌슴돠. 독립은 저와 계약할 시에는 계획에 없었던 변수였고요. 또 한 번은 사장이 작정하고 돈을 들고 나른 경우였슴돠. 다행히 저는 투자한 돈이 없어서 임금만 손해보고 말았는데, 몇몇 직원들은 직장을 잃은데다가 빚쟁이한테 쫓기게까지 되었죠. 제가 경험한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슴돠. 아직도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돈을 받지는 못할 것 같슴돠.
모두의 표정이 아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영락 씨를 데려온 명 실장님마저도 그랬다.
삼촌은 이영락 씨에게 술을 한잔 마시러 가자고 했다. 모두 다 같이 가서 한잔 마시자고 했다. 이영락 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죄송함돠. 저는 술은 마시지 않슴돠.
- 체질 때문입니까?
- 아님돠. 예전에는 많이 마셨슴돠.
- 그럼 종교적인 이유 때문입니까?
- 특별한 종교는 없슴돠, 다만,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술은 끼니보다 곡물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제가 맥주를 한잔 마실 때마다 설치류가 한 마리씩 죽는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장 선생님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을 나는 또 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