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희준 Jul 07. 2016

재미있는일이라면 뭐든지 가르쳐드립니다 합자회사  14화

노희준




#14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인문학은 가장 잘 역이용할 수 있는 학문이기도 했다. 누가 그랬던가, 테러리스트는 특수부대한테 배우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심하게 말하자면 장 선생은 완전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과학수사 담당자 같았다.


인문학에 대한 생각만 다른 게 아니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나와 의견이 어긋났다.


그는 김윤서 씨의 시안을 결사반대했다. 진부한데다 격조가 없다는 거였는데 한술 더 떠서 직접 쓴 붓글씨를 단체 카톡방에 올리기까지 했다. 품위 있다못해 지루하고, 독창적이다못해 이상한 붓글씨가 아닐 수 없었는데 거기에 대고 삼촌이, 역시 학자의 붓글씨는 수준이 다르군요, 한마디 덧붙이면서 수습은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나와 의견이 같기는 구 뿐이었다.


나는 윤서씨 디자인 괜찮은데 왜들 그러지?


그러게 말이야? 세련되고현대적이고 좋기만 하구만.


그래도 어른들 의견이니 어쩔 수 없지어른들이 아니라 으른들인 건가.


하면서 구는 픽, 웃었다 그새 우리는 꽤 친해진 듯싶었다.


-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 붓글씨를 쓰겠단 말이야?


에이로고를 붓글씨로 할 수는 없지.


단순한 건데 왜 난 구 대표처럼 할 수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당신의 글씨가 아니라 붓글씨가 안 된다고 말하면 그만인 거지. 새삼 처음에 구를 낮춰보았던 게 미안해졌다.


우리는 김윤서 씨에게 재요청을 했으나 여행 때문에 시일 내로 새로운 디자인을 보내기는 어렵겠다는 답을 받았다. 나의 애정 하는 윤서 씨가 일을 열심히 해놓고도 돈을 못 받게 된 것이었다. 이쪽 일정에도 지장이 생겼다.


디자인이 있어야 명함을 파고명함이 있어야 뭐라도 해 먹지.


제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한번 부탁해볼까요부업으로 하는 거라서 가격도 쌀 것 같은데요.


명 실장님이 데려온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아줌마스러웠다. 안경잡이에 곱슬머리여서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어딜 봐서 나랑 비슷한 데가 있다는 거냐, 키는 십 센티미터쯤 작고 몸무게는 십 킬로그램쯤 무겁겠구만,참말이지 좋았다 싫었다 하는구나 구 댄서 너는.


내가 보기에 이영락 씨는 김윤서보다 몇 단계는 하수였다. 미팅을 능숙하게, 효율적으로 진행했을 뿐이었다. "으른들"은 그게 맘에 든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가 지난번 디자이너보다 낫다는거야. 이분 디자인은 아직 보지도 않았으면서, 당신도 맘에 들었다 안들었다 합니다 장 선생님, 하고 생각하자마자 삼촌이 디자인 가격을 물었다.


오십만 원만 주십시오.


너무 싼 거 아닙니까?


저는 전문디자이너가 아니어서 디자인으로 번 돈은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함돠아이들에게 기부를 더 하고 싶으시면 더 주셔도 됨돠.


뭔가 훌륭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의 함경도 억양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럼 전문은 뭡니까?


전문이랄 건 없고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회사 마케팅담당 이사로 있었슴돠.


그럼 그 전에는?


가장 오래 있기로는 자산관리회사에 오래 있었고요거기서 나와서는 재정이 나빠진 회사들을 상대로 프리랜서로 일했슴돠모 대학에서는 구조조정팀 총괄팀장으로 일했고요.


보통은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습니다, 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영락 씨는 안 해본 게 있다면 뭉뚱그리는 일 뿐일 것 같았다. 열 개 넘는 직업이 입에서 줄줄줄 흘러나왔다. 일한 회사와 맡은 직책과 주요업무에 관한 것이어서 딱히 직업으로 명명하기는 애매했다. 이를테면 도산공원 앞에 있던 유명한 미용실에서 비쥬얼 이미지 담당을 맡았을 때 이런 것은 성공했고 저런 것은 안됐어서 원인을 분석해보니 이러저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는 스토리인데, 그럼 비쥬얼 이미지스트라는 직업이 있는 거냐 하면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전문화된 마케터의 일종이냐 물으면 당연히 마케팅도 포함되지만 마케팅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기가 발동한 건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삼촌은 오랜만에 쓸 만한 포수를 만났다는 듯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집에 가고 싶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묻혀있던 집안 내력이 또 하나 발굴되는 게 싫어서였다.


내가 이 건물에 미용실을 연다면 어떨 것 같소?


미용사 관리하기가 쉽지 않으실 검돠회사 차원에서 밀어서 띄어 놓으면 어느 날 자기고객 챙겨서 나가 버림돠대부분의 미용사가 독립했다가 망하는데도 본인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나감돠. 그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회사도 큰 손실을 보죠대부분의 미용실이 한 사람의 이름을 걸고 도제식으로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슴돠.


삼촌은 쌀 보리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방금 건 보리.


이태리 도시락 가게를 여는 건 어떨 것 같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진입장벽임돠이태리도시락이라면 음식성격상 음료수가 포함되어야 할 것 같은데직장인이 점심값으로 만 원 이상을 쓰기는 어려울 테고만 원 이하로 간다면 이 건물 일층에서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슴돠이층이라면 승산이 있겠지만 도시락집이 이층에 있어서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슴돠.


일이층을 같이 가야죠일층은 이태리 야시장으로 이층은 도시락 집으로주방을 위에 만들어서 음식을 아래로 내리면 면적당 단가가 충분히 빠질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십니다하지만 제 생각에 이층은 원테이블키친식으로 해서 소수의 예약손님만 받는 식으로 운영하고 도시락 집은 일층에 작은 코너를 두는 것이 더 나은 형태일 것 같슴돠.


지금 건 내가 지난번에 기획서를 보았으니 쌀.



삼층에 에스테틱을 여는 건 어떻습니까이십사 시간으로?


에스테틱은 미용실이랑 달라서 사람을 부리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요, 손님이 리스크입니다무조건 손님 관리만 잘하면 됨돠왜냐하면 무조건 시비를 걸고 화를 내려고 오시는 손님들이 많기 때문임돠초기에 할인권을 풀거나 프로모션을 많이 해서 몇 번 방문이 누적된 손님들만 회원권을 주시는 방식으로.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오?


에스테틱 창업에도 관리자를 한 적이 있기 때문임돠.


한마디로 위기에 빠졌거나 스타트업을 하는 회사 전문이란 말이군.


나는 삼촌의 눈빛이 반짝,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직 못 들어봐서 그런데 그런 직업을 뭐라고 합니까전문경영인도 아니고뭐라고 해야 하나?


굳이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면 리스크 관리자라고 할 수 있슴돠.


리스크 관리자그렇군!


삼촌은 결국 이영락 씨의 직업을 알아내고야 만 것이었다.


이영락 씨는 하드 디스크 속에 삼백 개 가량의 리스크 관리 실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삼십 개도 아니고 삼백 개.


리스크 관리가 안된 적은 없습니까쉽게 말해서 망한 적은 없느냐 이 말이오.


저라고 왜 실패한 적이 없겠습꽈두 건 있었슴돠.


아까 그 미용실이랑?


그 미용실은 제가 리스크관리를 끝낸 후에 망했슴돠그리고 벌만큼 벌고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볼 수는 없슴돠한번은 대기업에서 임프린트로 만든 회사였는데 독립하는 와중에 자금이 없어 무너졌슴돠독립은 저와 계약할 시에는 계획에 없었던 변수였고요또 한 번은 사장이 작정하고 돈을 들고 나른 경우였슴돠다행히 저는 투자한 돈이 없어서 임금만 손해보고 말았는데몇몇 직원들은 직장을 잃은데다가 빚쟁이한테 쫓기게까지 되었죠제가 경험한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슴돠아직도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돈을 받지는 못할 것 같슴돠.


모두의 표정이 아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영락 씨를 데려온 명 실장님마저도 그랬다.


삼촌은 이영락 씨에게 술을 한잔 마시러 가자고 했다. 모두 다 같이 가서 한잔 마시자고 했다. 이영락 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함돠저는 술은 마시지 않슴돠.


체질 때문입니까?


아님돠예전에는 많이 마셨슴돠.


그럼 종교적인 이유 때문입니까?


특별한 종교는 없슴돠다만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술은 끼니보다 곡물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제가 맥주를 한잔 마실 때마다 설치류가 한 마리씩 죽는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장 선생님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을 나는 또 보고야 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미있는일이라면 뭐든지 가르쳐드립니다 합자회사  13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