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15. 우연의 줄 잇기
나는 B2B 하기 싫었다.
<씨이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아, 웃겨죽겠네, 배를 잡고 웃는 여자애들의 모습. 아 이 노래가 뭐라고 대체 이런 감정이…하는 표정의 중년 여성. 종이접기 따위에 자신의 전인생을 걸기로 결심한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 문화생활 한 지가 얼마 만이던가 인생도 가끔 살만하구나 숨돌리는 어느 아저씨.
언제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표정들을 보았다.
씨이오나 대사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높게 평가받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은 상상도 못해봤을 논리로 그들의 혼을 빼놓을 자신이 있었다. 프로펠러 전투기의 발전사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논증하고, 최근 분자생물학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4차 산업혁명시대의 회사 조직을 제안할 수도 있었다.
다만, 감탄의 세계보다는 감탄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현지와 밤비에게 한 약속도 문제였다.
정경계가 주요 무대가 돼버리면 현지나 밤비는 할 일이 없어져 버린다. 씨이오 조찬회에서 “덕”스러운 유화를 팔고, 대사관 만찬회에서 홍대 인디음악을 연주해?
와중에 삼촌은 독단적인 행동을 계속했다.
이영락 씨를 문화발전소와 수작의 리스크 관리자로 임명한 것이었다. 혼자 결정했으면 혼자 책임질 일이지 수작과 문발이 절반씩 인건비를 제공하잔다. 말이 끝나자마자 삼촌은 벌떡 일어서서 화장실에 가버렸는데 반론은 듣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였다. 나는 갑자기 소나기 랩을 하고 싶어졌다. 이프 유 체인지 유어셀프, 아윌 컬잇 미라클, 스탑 집안내력 플리즈 엉클….
수작은 삼촌의 건물 1층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으로, 구가 동업자였다. 카페 옆, 건물 뒤편 마당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스무 개 정도의 좌판이 깔렸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동업까지 할 사업인가 싶었으나, 주말에는 천만 원의 매출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수수료 30%니까 천만 원이면,
순수익 삼백만 원이었다. 한 달에 대략 천만 원 가까이 순수익이 발생한다고 했다. 천만 원이라니.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천만 원이라니.
그 쏠쏠한 용돈벌이 수단을 삼촌은 확대할 요량이었다. 공간 임대로 인근에 수작을 5-6개 동시 오픈하여, 장차 홍대는 물론 서울을 대표하는 프리마켓 브랜드로 성장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거랑 문발이랑 무슨 상관이야.
- 상관없지.
- 근데 왜 이영락 씨가 같이 해요?
- 이영락 씨는 나의 리스크 매니저니까?
- 근데 왜 문발에서도 돈을 줘요?
- 우리는 공동운명체니까?
당최, 뭔 말을, 하는 건지.
- 이영락 씨가 프리마켓에 대해 뭘 알아요?
- 고구마 장수부터 시작했대. 생과일주스부터 가죽제품까지 길거리에서 안 팔아본 물건이 없더라. 화장품 가게, 옷가게 등등을 매니징 한 적도 있고.
- 알겠어요. 그럼 문화에 대해선 뭘 알아요?
- 문화에 대해선 네가 알잖아?
- 그럼 제가 해야죠.
- 넌 사업을 모르잖아? 임원들 중에 사업을 제대로 아는 건 나뿐이지.
- 저는 문화를 알고, 삼촌은 사업을 아니까 그럼 됐네요.
- 뭐가 돼. 나는 사업을 모르는 너만 알고, 너는 문화를 모르는 나만 아는데.
- 아 뭐야 그게. 똥 같은 말이야 말 같은 똥이야.
- 사업을 모르는 게 너의 리스크고, 인문학을 모르는 게 나의 리스크란 뜻이다. 너와 나의 간극을 채워서 시너지를 일으켜줄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거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거니와, 삼촌과 말로 싸워 이길 방법은 없었다. 물론 똥으로 싸워도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말이 아니라 똥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삼촌이 왜 갑자기 이영락 씨에게 꽂혔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었다. 서비스는 물건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형의 것이지도 않다. 예를 들어, 마사지라면 아무리 스트레스 해소용이라지만 어쨌든 몸을 다루는 거잖아? 힐링 상품이라고 해도 물질을 거치지 않는 것은 없잖아? 반면 콘텐츠 회사란 본질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을 상품으로 제공하는 곳이었다. 영화나 드라마가 물질은 아니잖아. 강연강좌라 해도 마찬가지지. 학교는 졸업장이나 학위기 같은 공인된 자격이라도 부여하지, 조찬회 강연 들어서 회사에 도움이 되었다한들 정확히 얼마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낳았는지 수치화할 방법은 없잖아?
콘텐츠 사업은 물건을 파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마침 나는 삼촌이 제안한 사업의 중대한 허점을 발견했다. 나는 임원회의에서 그 문제를 지적했다.
- 대사관에서는 수익사업을 할 수 없답니다.
- 그렇지. 다 우리 수익이야. 대사관에는 돈 안 줘.
- 그게 아니라 대사관이 하는 행사를 유료로 운영할 수 없답니다.
- 뭐야? 정말?
- 우리가 대사관의 행사를 유치하는 방법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씨이오 같은 특정 집단을 상정하면 제안서 통과가 안되겠죠. 그것도 그거지만 제안서는 누가 쓸 겁니까? 제가 해봐서 아는데 정부에 제안서 집어넣는 건 기본이 오십 장이에요. 경쟁률은 보통 몇백 대 일이고요.
당연하게도 선뜻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삼촌은 입을 뾰로통하게 닫고 있었다. 나는 통쾌한 걸 티내지 않느라 힘이 들었다.
- 씨이오 조찬회 제안서는 제가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원고는 엄청난 노력이 들기 때문에 지금 만드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씨이오는 어느 분이 섭외할 겁니까?
나는 일부러 장 선생부터 쳐다보았다.
- 저는 원고는 만들 수 있는데….
다음에는 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아무래도 노 대표님이 많이 아시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구와 함께 삼촌에게 초점을 모았다.
- 특별히 아는 사람들은 없는데?
- 그럼 영업이라도 해야죠. 영업은 누가 할 건데요.
명 실장이 한숨을 쉬었다.
- 저는 자신 없습니다.
뭐야 이 사람들, 그럼 제안서도 내가 쓰고 영업도 내가 하라고? 그럴 거면 뭐 하러 같이 사업을 해?
나는 실망한척했으나 예상한 바였다. 예상치 못한 것은 이영락 실장의 반응이었다.
- 무대포로 영업을 할 수도 있슴돠.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안될 건 없슴돠. 프리랜서 영업사원을 기간제로 고용하는 것도 방법임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랑 두 개의 콘셉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무리임돠. B2B를 하려면 최소 이십 개의 아이템은 있어야 할 검돠.
삼촌의 얼굴이 구겨졌다. 회의는 내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의도 이상이었다. 나는 임원들이 B2B를 포기하게 만들 거였다. 회의가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딱 삼십 초만 기다렸다 넌지시, B2C를 제안할 거였다.
스무 개 아이템은 있어야 할 거라고? 걱정 마시라. B2C이기만 하면 이백 개도 만들어낼 자신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