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가 리더십이 되는 놀라운 현상
어렸을 적부터 참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기적이라기보단 의견을 내는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MBA를 할 당시 동기 하나가 내 성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You've got zero immunity to bull shit!
너는 헛소리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어!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정확한 평가였다.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란 탓일까, 제사나 조상, 선배나 권위 따위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학창 시절부터 전통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와는 평행선을 걸어왔다.
학교에서 그랬던 게 회사에서 달라질 리 없었다.
전체 팀 회의를 하는 날이었다.
각자 의견을 개진하는 가운데, 내게 차례가 돌아왔고, 조금 급진적일 수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듣던 이 중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런데 신경 쓸 내가 아니었다.
“잠깐 좀 보지?”
회의가 끝나고, 아니나 다를까 고참 직원 하나가 나를 불러냈다.
“왜 그러세요?”
“어린놈이 뭘 안다고 그런 얘기를 해? 고참들이 우습게 보여?”
아니 무슨 드라마 같은 시추에이션인가. 이럴 때 보통 멋진 본부장님이 나타나서 구해주는데, 그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
그렇게 삼십 분 가까이 설교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던져진 한 마디.
”고놈 참 싸가지 없네!“
그 일이 있은 후, 공개 석상에서 거슬릴만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 고참 직원과 척을 지는 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후에는 무조건 그 직원을 치켜세워주고 기분을 맞춰줬다.
아마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경험들이 한두 번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사건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회사 생활에 회의감이 들던 무렵, 미국으로 탈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오고, 첫 전체 팀 회의에서 바로 문화 충격을 받는다.
회의가 시작하고, 우리나라처럼 대학을 갓 졸업한 막내직원이 회의 자료 출력본을 가져온다.
임원들이 앉아있는 가운데, 직원이 회의 자료를 건넨다... 아니, 던진다.
“나이스 캐치!”
한 임원이 던진 자료를 한 번에 받자 막내 직원이 센스 있게 한마디 날린다. 분위기가 훈훈해진다.
자료를 모두 던진(?) 막내직원이 자리에 앉는다. 다리를 쫙 꼬고 자료를 들여다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 마음 속의 숨겨둔 꼰대가 속으로 욕을 한다.
‘아니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회의 자료를 던지는 것도 그렇고, 그걸 받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임원들도 그렇다.
게다가 회의 중에는 어떠한가. 막내 직원도 서툴지만 자유롭게 의견을 낸다. 눈치를 주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없다.
그 후로 회사 생활에 대한 나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아무리 외국계였다지만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권의 의식에 젖어있었던 것. 권위 의식을 버리고 최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려 했다.
처음에는 언어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의견을 내고자 해도 조리 있게 말하는 게 힘들었고, 그 후에 이어지는 토론을 이어나갈 영어실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어실력이 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게 되자 점점 직원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엠제이는 리더십이 훌륭하다 “
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것.
내 직급과 연차에 상관없이 의견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했던 것이 크게 먹혔던 것이다.
우리 회사는 고과를 성과와 리더십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평가하는데, 그 해 리더십 항목에서 최고 등급인 S를 받게 되었다. 승진한 것은 덤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조직문화를 무엇이 낫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직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한국의 끈끈한 정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아니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조직문화가 훨씬 잘 맞았다. 미국에서의 첫 승진 이후 방향은 더욱 명백해졌다.
더 나대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로. 결국 그 방향을 옳았고, 커리어 면에서도 훨씬 빠른 성공을 하게 된다. 싸가지가 리더십으로 빛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