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외노자 일기 - 2
이주 준비를 시작한 지 벌써 다섯 달 째가 되어간다. 이번 포스팅의 괴상한 제목 문구는 힘들어서 점점 맛이 가는 내 상태를 보여준다. 험난한 여정을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좋은 서류, 나쁜 서류, 이상한 서류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서류가 필요하다. 간단하게는 가족관계증명서부터 시작해 헝가리 지사에서 고용한다는 관련 서류까지, 수십 장의 서류가 필요했다.
서류 발급비용이야 회사에서 부담을 해주었지만, 번거롭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포스티유"라는 공증 이후의 절차도 밟아야 했고, 미국에서 발급된 서류의 "아포스티유"를 받기 위해 플로리다 주도인 탤러해시까지 운전을 했다. 덕분에 플로리다에서 처음으로 '언덕'을 본 것은 덤. (플로리다에는 산은커녕 언덕도 흔치 않다. 오죽하면 플로리다에서 가장 높은 곳은 디즈니월드에 있는 스페이스 마운틴이라는 놀이기구라는 농담이 있을까)
바다 건너 서류가 날아다녔다. 한국에서 서류를 받아 다시 헝가리로 날렸다. 서류들을 헝가리에 있는 공인 번역기관에서 번역을 해야 된단다. 영어로 되어있는 서류이고 미국에 있는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는대도. 결국 서류들도 지구 반 바퀴를 돌고 말았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데...
이번에는 이주를 도와주는 업체가 말썽이었다.
12월에 워싱턴에 있는 헝가리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와 비자 신청을 했는데, 서류 상 여행일자를 12월로 하라는 게 말이 안돼서 (비자 처리에 두 달 가까이 걸린다고 했다) 업체와 협의해 2월로 변경하고 임시 비행기 티켓을 끊어놨더니, 업체에서 인터뷰 전날 4월로 변경하라는 메일이 날아왔다.
황당해서 몇 번이나 확인하고 투덜거리며 서류 상 날짜를 4월로 변경하고 티켓도 변경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워싱턴 대사관에서는 4월이 너무 나중이게 때문에 처리를 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니 나중에 다시 오라는 것이다.
사정사정을 해서 그 자리에서 비행기 티켓을 변경하고 여행 날짜를 다시 2월로 조정했다. 돌도 안 지난 아기와 비행기를 타고 다시 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 먹혔다.
이 사건 외에도 업체는 계속 잘못된 정보와 절차로 나를 괴롭혔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기 마련인데 이 업체는 하는 모든 일마다 죄다 틀리니, 참 이것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운전 삼매경에 빠지다!
급하게 한국에 들어갈 일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대사관에서 비자 도장을 찍어주기 위해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워싱턴까지 운전을 해야 했다.
네비를 찍어보니 727마일 (약 1170킬로미터), 10시간 반이나 되는 대장정이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감안하면 편도로 약 12시간 정도 걸렸다.
갈 때는 운전해서 가고, 여권을 찾고 나서는 편도 비행기를 타고 왔다(이 기회를 빌어 도와주신 헝가리 대사관 직원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물론 한글이라 못 읽으시겠지만...) 덕분에 한국에 다녀온 후에 차를 가지러 다시 워싱턴에 가야 했다. 24시간을 온전히 길 위에서 보낸 셈이었다.
온디멘드코리아(Ondemandkorea)라는 미국에서 한국 티비프로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사이트가 없었다면 이 대장정이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광고 아님). 길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직선 도로라 너무나 지루했기 때문이다. 다섯 시간쯤 지나고 나니 운전 삼매경에 빠져나와 차와 티비 예능프로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운전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이 진정 존경스러워지는 날들이었다.
갈길이 첩첩산중
문제는 아직도 갈길이 멀었다는 것이다. 먼저 두 대의 차를 팔아야 하고(회사에서 차와 주유비를 포함한 경비를 대준다고 한다. 만세!), 필요 없는 가구를 처분해야 한다(헝가리에서 아파트를 렌트하면 보통 가구가 포함되어있다. 만세!) 휴대폰도 해지해야 하고(...휴대폰도 지원해준단다... 만세...) 짐들을 국제화물로 부쳐야 한다. 그 외에도 잡다한 할 일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갑자기 업무량이 폭주했다. 보통 1-2월에는 업무가 느리게 돌아가기 마련인데 올해는 유달리 피크 시즌 못지않게 바쁘다. 발을 걸쳐있는 주 업무 외의 프로젝트만 해도 네다섯 개가 될 지경이니...
진정 끝없는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잘 정리하고 갈 수 있겠지?
미국에 올 때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비자 업무도 간단했고, 워낙 한미간 교류가 많아 짐 부치는 것도 저렴하고 쉬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초보자 튜토리얼을 진행하다 갑자기 보스전에 들어온 느낌이다. 나는 분명 때리는데 적의 HP가 안 빠지는 느낌.
힘들지만 한 번만 겪으면 되는 일이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다른 나라로 또 가게 되면 또 겪어야 할 일이겠지만... 미래의 걱정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천일야화에 나왔다고 하는 유명한 격언으로 오늘의 주저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