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술도 담배도 tv도 없지만, 커피는 있다. 아내가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조심하기 시작한 이후로 커피는 나만 마셔서 아내에게 괜한 미안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포기 못 한다. 현대인의 생명수이자 허락된 중독. 대체품이 없는 독보적인 존재.
커피 맛을 처음 알게된 건 또(!) 교환학생 시절이었다. 커피 맛을 처음 알게된 그 날 그 곳을 마치 종교적 체험처럼 또렷하게 기억한다. 입시공부할 때는 공부할 때 졸지 않으려고 캔커피를 약처럼 마셨다. 캔커피가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그저 달고 고카페인일 뿐. 나는 커피를 마실 수는 있으나 커피 맛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교환학생 1년 중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이 되니 외로웠다. 외로움은 타지생활이 주는 역설적인 힘이다. 외로워 힘들지만 그 외로움이 내가 이전에 하지 않던 달리기를 하게 하고 사진을 찍게 했다. 그리고 커피 맛에 눈을 뜨게 했다.
뉴욕 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센트럴파크 서쪽에 붙어있는, 관광지로도 유명한 카페를 두어번 갔다. 카페랄로(cafe lalo, 지금은 폐업했다고 한다.)라는 이름이었다. 유명하지만 특별히 좋은 원두를 쓴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낮의 카페랄로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 특유의 쓴 맛이 입에서는 쓴데 마음에서는 달게 느껴졌다. 외로움을, 인생 쓴 맛을 커피에게 공감받은 느낌. 커피를 각성제가 아니라 맛으로 먹기 시작한 전환점. 생활에 즐길 것이 하나 추가된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여전히 커피에 대한 지식도 얕고 맛을 잘 모른다. 좋아하지만 공부까지 해가며 격식 차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욕구 충족의 역치도 낮아서 싱글오리진은 커녕 프랜차이즈 아메리카노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그래도 커피의 장점을 말하라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게 있다. 달리기나 사진처럼 커피는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어떤 것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때 매우 큰 장점이다. 게다가 커피는 일상을 벗어난 공간에서 마실 때 더 맛있다. 여행 중 마시는 커피가 더 맛있다고 느낀 것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특히 숙소에서 무료 제공하는 드립백이나 캡슐 커피 말고 아침에 영업하는 해당 지역의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여행지의 풍경과 여행지에서 아침을 맞는 설렘이 어우러져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직장생활하면서, 또는 육아하면서 전투적으로 커피를 마시다 보면 문득 각성제 말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출근하자마자 습관적으로 커피머신으로 직행하는 건 삶을 즐기는 루틴이 아니라 기계적 절차다. 각성제가 아닌 커피를 마시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커피는 사치품일지도 모르겠다. 커피값은 낼 수 있으나 함께 치러야 할 여유값은 통장잔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늘 같은 결론이다. 아이들부터 잘 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