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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ug 25. 2016

이란의 닿지 않은 땅으로

into the strange land

미지의 나라를 자처하던 이란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란 북서부의 변방의 땅을 돌며 고대 페르시아제국과 그들의 후예가 남긴 찬란한 역사 유산 그리고 매혹적인 풍경에 한 발짝 다가선다.

이란 북서부의 국경을 이루는 아라스 강. 험준한 황적빛 협곡을 통과하는 강 건너편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토다. ⓒ 고현

Tehran

근대의 영화를 누린 도시, 테헤란


테헤란 도심을 메운 잿빛 빌딩에 드문드문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은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끈 이맘 호메이니(Imam Khomeini)다. 그가 근엄하게 내려다보는 격자 도로 위에는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꼬리를 문 차량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은 이 도시에서 방문자가 운전대를 잡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다. 이란의 국민차로 통하는 사이파(Saipa) 행렬이 편도 2차선 도로를 아무렇지 않게 3차선으로 만드는 곳이 바로 테헤란이니까.


알보르즈(Alborz) 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종종 여행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지방 터미널을 연상케 하는 낡고 혼잡한 공항에서 빠져 나오자 멀찍이 모던하게 솟아 있는 435미터의 밀라드 타워(Milad Tower)가 보이는가 하면, 시커먼 터번을 쓴 이슬람 신자 옆으로 형형색색의 히잡과 선글라스로 멋을 낸 현지 여성이 유유히 지나간다. 테헤란 북부 셰미란(Shemiran) 지구에 있는 이맘자데 살레(Imāmzādeh Sāleh) 모스크에서도 의외의 장면을 목격한다. 에메랄드빛 타일로 화려하게 외관을 두른 이 웅장한 모스크는 테헤란에서 가장 영적인 장소로 꼽히는 곳이다. 남녀를 구분해 기도를 드리는 실내는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도를 올리는 신자 외에도 노트북을 펴놓고 업무를 하고 신문을 읽거나 단잠에 빠진 채 딴청을 피우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테헤란 북부의 이맘자데 살레 사원. 이란 인에게 모스크는 기도를 드리는 성스러운 공간이자 휴식처이다. ⓒ 고현

“이란을 처음 방문했나요?” 옆자리에서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이는 전자공학을 공부하는 마수드 다라비(Masoud Darabi). 그는 흙으로 만든 자그마한 돌을 하나 꺼내 보이며 이슬람교에 대해 차근차근 들려준다. “이 녀석은 페르시아어로 모르(mohr)라 불러요. 보통 기도를 드릴 때 이 돌을 땅에 두고 머리를 맞대죠. 나의 영혼을 신에게 전하는 매개체니까요.” 자신의 종교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그는 곧 모르를 바닥에 내려놓고 메카(Mecca)를 향해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이슬람교 국가 중에서도 시아파를 국교로 삼는 이란은 주변 아랍 국가와 종파부터 언어, 인종 등 여러 방면에서 다르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제국(Persian Empire)의 후손이라는 이란 인의 강한 자긍심도 한몫했다. 파르티아(Parthia), 사산조(Sasanian) 등 페르시아제국을 잇는 수많은 왕조가 약 2,500년에 걸쳐 이란 고유의 역사를 완성시켰다. 테헤란이 이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카자르(Qajar) 왕조가 수도로 내세운 18세기 이후부터다.


카자르의 왕가가 누린 부귀영화를 엿보려면 도심 한복판의 골레스탄 궁전(Golestan Palace)으로 향하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국왕별로 건립 시기가 다른 총 8개 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궁은 외관을 두른 타일과 실내장식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기는 공간은 타흐테 마르마르(Takht-e Marmar). 이란 중부의 야즈드(Yazd)에서 들여온 대리석으로 완성한 이곳의 테라스는 카자르의 왕위 수여식을 거행한 곳으로, 솔로몬 왕의 의자를 모티프 삼은 웅장한 왕좌가 놓여 있다. 기다란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는 메인 궁전 2층에는 ‘거울의 방’이라 불리는 탈라레 아이네(Talar-e Aineh)가 기다린다. 궁정화가를 묘사한 조형물을 둘러싸고 있는 눈부신 거울 장식은 카자르 왕가의 고상한 취향을 잘 드러낸다. 왕이 리셉션을 위해 만든 탈라레 살람(Talar-e Salam)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간. 정교한 문양의 타일 바닥과 유리 장식, 샹들리에로 가득 메운 널찍한 응접실 내에는 유럽 각국에서 보낸 진귀한 보물이 진열되어 있다. 러시아와 프랑스 등 유럽식 궁에 대한 나세르 알딘 샤(Naser al-Din Shah) 국왕의 환상을 실현시킨 이 궁전은 좀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슬람 혁명을 단행한 이란은 서방 세계에 단단히 문을 걸어 잠궜으니 말이다.

(왼쪽)카자르 왕조의 왕위 수여식을 거행한 장소로 쓰인 타흐테 마르마르. (오른쪽)골레스탄 왕궁의 중정. 정면에 보이는 메인 궁전에는 탈라레 아이네와 탈레레 살람이 들어서 있다. ⓒ 고현


Tabriz

실크로드의 향수, 타브리즈


타브리즈는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이 이란 북서부를 통과할 때 거쳐간 관문 도시다. 그 흔적은 도시 한복판을 차지한 타브리즈 바자르(Bazaar of Tabriz)에서 확인할 수 있다. 7제곱킬로미터 면적에 무려 5,000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는 이 바자르는 16세기 사파비(Safavid) 왕조 때 벽돌로 완성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꼽힌다. 아치형 천장 아래 미로처럼 얽힌 시장 골목을 따라가면 양털로 짠 아제르바이잔 스타일의 모자, 스카프, 카펫, 향신료, 차, 약재 등 다채로운 물건을 팔며 실크로드의 영광을 이어가는 상인들을 만날 수 있다. 2015년 세계공예위원회(World Crafts Council)에서 세계 카펫 도시로 선정한 타브리즈는 화려한 문양과 빼어난 품질의 카펫 산지로도 유명하다. 고급 카펫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모자파리에(Mozaffarieh) 구역에는 3억5,000만 리알(약 1,300만 원)을 호가하는 카펫도 있다. 근래에 화폐 가치가 곤두박질한 이란에서 가장 큰 화폐 단위는 10만 리알(약 4,000원). 누군가가 이 고가의 카펫을 현금으로 구입하길 고집한다면 가게 안을 온통 돈다발로 채워야 할지도 모른다. 바자르 건너편에는 현대적으로 꾸민 쇼핑몰이 대조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쇼핑몰 너머에는 활기 넘치는 보행로 테르비예트(Terbiyet)가 이어진다. 이는 실제 실크로드 행상인이 이용하던 길인데, 과거 이 길의 모습을 재현한 조각상 사이로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와 바쁘게 오가는 타브리즈 시민들이 오늘날 실크로드의 풍경을 채우고 있다.

(왼쪽)이란의 모든 역사를 망라한 문양을 새긴 카펫. (오른쪽)카펫 상점이 모여 있는 타브리즈 바자르의 모자파리에 구역. ⓒ 고현


골목 끝자락의 모퉁이를 돌면 150년 전에 지은 목욕탕 하맘(hammam)에 다다른다. 옛 목욕탕의 원형이 남아 있는 이곳은 현재 이란 전통 음식과 차를 선보이는 샤리아르 레스토랑(Shahriar Restaurant)으로 운영 중이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웨이터가 화덕에 갓 구운 납작한 빵 산가크(sangak)를 내온다. 이어 다진 고기를 미트볼처럼 둥글게 뭉친 코프테(kofteh)와 데친 포도잎에 쌀과 채소를 넣고 찐 돌메(dolme) 등 전통 방식의 전채 요리가 차례로 올라온다. 메인 요리는 양고기와 닭고기, 토마토 등을 긴 꼬치에 구워 접시에 담아 내는 쿠비데 케밥(kubideh kebab). 사프란을 얹은 따끈한 쌀밥을 곁들이면 호사스러운 이란식 정찬이 완성된다.


화로에 산가크를 굽는 장면은 이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리 풍경 중 하나다. ⓒ 고현

바자르 동쪽에는 카부드 모스크(Kabud Mosque)가 있다. ‘블루 모스크’라 불리는 이곳은 1465년에 세운 곳으로, 18세기 때 두 차례에 걸친 강진으로 돔과 첨탑 등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가 20세기 초 약 40년에 걸쳐 복원했다. “파란 타일에 윤이 나던 화려한 모스크였죠.” 타브리즈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하는 레자 다나이(Reza Danaee)가 말한다. “처음에는 옛것과 똑같은 모양과 색의 타일로 복원을 진행했어요. 그러다가 본래 색보다 좀 더 엷은 타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복원 작업을 바꿨죠. 이는 원형과 새로 복원한 타일을 구별하기 위해서예요.” 지하는 모스크를 건립한 자한 샤(Jahan Shah)와 부인의 무덤이라는데, 텅 비어 있다. 그 이유를 묻자 다나이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이슬람교 쿠란에는 ‘먼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경구가 있어요. 누구든 죽은 뒤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니까요.”

테르비예트 거리에는 옛 실크로드 상인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이 군데군데 자리한다. ⓒ 고현

Jolfa

협곡이 품은 성당, 졸파


아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감독의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는 이란의 초현실적인 산악 지대와 초원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타브리즈 북서부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졸파(Jolfa)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마주친 풍경은 그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문명의 손길을 전혀 거치지 않은 듯한 산야가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 나무 하나 없는 너른 연녹빛 구릉 위로 목동이 염소와 양을 치고, 도로 위에는 구형 벤츠 트럭과 낡은 푸조 세단이 드문드문 지나갈 뿐이다. 이따금 길 한쪽에 세운 픽업트럭 옆으로 이란 인이 즐겨 먹는 빨간 라바샤크(lavashak, 과일을 섞어 만든 젤리)를 장대에 말리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졸파 근방에 흐르는 아라스 강(Aras River)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을 가른다. 정확하게는 아제르바이잔령 나히체반(Naxçıvan) 자치공화국.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아르메니아와 이란 틈에 끼어 있는 이 자그마한 자치공화국에 가려면 구불구불 흐르는 강만 건너면 될 테지만, 국경을 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황적빛을 띤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며 험준한 협곡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스 강에서 이란 방면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산등성이에는 성 스테파노스 성당(St. Stephanos Monastery)이 요새처럼 숨어 있다. 9세기 무렵 아르메니아 인이 해발 890미터 고지대에 세운 곳으로, 수 차례의 지진과 주변국의 침략을 겪으며 파괴와 재건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카자르 왕조 때 이곳에 머무는 아르메니아 인을 보호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란의 몇 안 되는 기독교 유산으로 남은 것이다. 중세 시대 아르메니아 인이 새긴 기록이 성당 벽면을 채우고 있으며, 매년 한 차례씩 아르메니아 교인이 모여 정교회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아르메니아 인이 이란 영토에 세운 성 스테파노스 성당은 아라스 강이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 낸 험준한 협곡에 둘러싸여 있다. ⓒ 고현

성당과 나란히 붙은 수도원은 이곳을 거처로 삼은 아르메니아의 과학자, 예술가, 수도승이 머무는 침실을 갖추고 있다. 어둑한 빈 방에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낸 작은 창 너머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어 들어온다. 수도원 너머로 난 오솔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성 스테파노스 성당의 드넓은 전경이 펼쳐진다. 인근 바위산에서 캐낸 암석으로 지은 성당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같은 빛깔의 자연이 신비로운 조화를 이룬다.


Kermanshah

고대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 케르만샤


이라크 바그다드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이란 서부의 케르만샤. 사산조 당시 이란과 이라크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세운 이 고대 도시에는 고고학자와 탐험가를 홀릴 유적이 즐비하다.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케르만샤 여행은 구도심을 이루는 파이즈아바드(Faizabad) 지구에서 시작해보자. 좁다란 골목 안으로 100년 넘은 건물이 줄지어 있는 이곳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건축물은 비글라르 바이기 테키에(Biglar Baigi Tekieh). 카자르 왕조의 화려한 거울 장식과 목조 지붕, 분수대를 갖춘 아름다운 중정으로 이뤄져 있는 가옥이다. 무더운 여름날 바람이 잘 통하도록 고안한 지하 별채 또한 인상적이다. 근방에 있는 모아벤 알몰크 테키에(Moaven al-molk Tekieh) 사원에서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란 중세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볼 수 있다. 이슬람교 시아파를 탄생시킨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기리는 후세니에(Hossenieh)와 종교 행사를 관장하는 자이나비에(Zeinabieh)를 지나 이란의 종교적 주요 인물을 모자이크 벽화로 담은 아바시에(Abbasieh)까지 3개 공간으로 나뉜 알록달록한 사원을 가볍게 거닐어봐도 좋다.

이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모아벤 알몰크 테키에 사원. ⓒ 고현

가파른 자그로스(Zagros) 산맥이 솟아오른 도시 북쪽에는 1,700년 전 사산조 시대로 인도하는 석굴 유적타케 보스탄(Taq-e Bostan)이 자리한다. 오랜 침식과 풍화를 견딘 타케 보스탄의 석굴은 총 4개로 나뉘는데, 가장 오른쪽에는 사산조의 아르다시르 2세(Ardashir II)의 부조가 새겨 있다. “페르시아제국이 국교로 삼은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가 왕위를 수여하는 장면이죠.” 케르만샤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쿠르드 족 가이드 조레 자파라파나(Johreh Jafarpanah)가 말한다. “발아래에 밟고 있는 사람은 바로 고대 로마 군인이에요. 페르시아제국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을 드러낸 것이죠.”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조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은 덕분에 석굴에는 연꽃 문양 등 불교적 색채 또한 남아 있다.

타케 보스탄은 사산조에 세운 중요한 석굴 유적이자, 메마른 산악 지대로 둘러싸인 케르만샤의 주요 휴식처다. ⓒ 고현

케르만샤 시내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북부의 교외로 나가면 이란의 가장 먼 과거와 만나게 된다. 고대 페르시아 어로 ‘신의 땅’을 의미하는 비소툰(Bisotun) 유적이다. 가파른 바위산이 둘러싼 이곳의 위압적인 풍광은 방문객을 압도한다. 물론 유적 초입에 있는 헤라클레스 조각상은 예외로 두자. 고대 그리스가 페르시아제국을 지배할 때 세웠다고 알려진 오래된 조각이지만, 사람 정도의 크기인 데다, 배경을 이루는 웅장한 바위산 탓에 한층 초라해 보인다.


비소툰의 하이라이트는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Darius) 황제가 세운 업적을 기리는 비소툰 비문(Bisotun Inscription). 깍아지른 듯한 아찔한 바위산 중턱에 다리우스 황제가 9명의 왕과 싸우는 장면을 묘사한 암각화이자 비문이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유적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지만, 이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비소툰 비문이 고대 문명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암각화를 배경으로 고대 페르시아 어와 바빌로니아 어, 엘람 어로 당대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죠.” 자파라파나는 비소툰 비문이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덧붙인다.

비소툰 유적을 길게 연결한 보행로. 멀리 보존 공사를 하고 있는 지점에 비소툰 비문이 자리 잡고 있다. ⓒ 고현

옛 페르시아제국의 위대한 업적이 담긴 거대한 바위산을 등지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지대를 향해 걸어본다. 야생초가 핀 초원에는 스러진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성이 허물어진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현지인조차 모르는 옛 성의 과거까지 알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초원 너머로 아직 밟지 않은 땅과 그곳을 채운 또 다른 찬란한 유산이 궁금할 뿐이다.

케르만샤를 대표하는 지역 요리 중  하나인 단데 케밥(dandeh kebab). ⓒ 고현

고현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금주국인 이란에 머무는 동안 매 끼니 때마다 다른 종류의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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