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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pr 25. 2017

열대 화산에 오르다.
필리핀 클라크 여행


열대의 화산에 올라

필리핀 클라크 여행


피나투보 화산 꼭대기의 칼데라 호. ⓒ FOTOLIA.COM/BUGKING88


화산 폭발 이후

50억 톤의 화산재와 100억 톤의 용암. 1991년 6월 중순, 피나투보 산(Mount Pinatubo)이 쏟아낸 것들이다. 필리핀 루손 섬 중부에 자리한 피나투보는 삼발레스 산맥(Zambales Mountains)의 유일한 활화산이다. 600여 년의 긴 잠에서 깬 피나투보의 위력은 엄청났다. 1919년 알래스카의 노바럽타 화산(Novarupta Volcano) 이후 20세기에 발생한 두 번째로 큰 대폭발. 피나투보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닐라 하늘을 새카맣게 덮은 화산재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도달했다. 필리핀 정부는 지역 주민을 미리 대피시켰지만, 곧이어 태풍 윤야(Yunya)가 가져올 재앙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화산재 위로 휘몰아친 태풍은 어마어마한 양의 라하르(lahar, 화산이류)를 만들었고, 루손 중부 지역 인근의 온 마을을 덮었다. 결국 화산 인근의 도시 앙헬레스(Angeles)에 주둔했던 클라크 미국 공군기지도 피나투보의 분출 이후 완전히 철수한다.


클라크 공군기지가 있던 자리에 클라크 국제공항(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국제공항)이 들어섰다. ‘클라크 미군 기지’는 ‘클라크 특별 경제지구(Clark Freeport Zone)’라고 이름을 바꾸고 무역을 위한 경제 특구로 변신을 꾀했다. 그 경제적 성과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투자 기업 유치를 위해 들어선 골프 리조트 덕분에, ‘클라크 여행’ 하면 ‘골프’라는 수식어가 어느새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공항에는 어깨에 골프 클럽을 둘러멘 관광객 무리가 많이 보인다.


공항을 벗어나 앙헬레스 시티로 가는 길. 발리바고(Balibago) 바랑가이(barangay, 필리핀의 촌락)의 필즈 애

버뉴(Fields Ave.)를 따라 클럽과 바가 늘어서 있다. 거리의 스페인풍 파스텔 톤 건물은 빛이 바랬고, 그 앞에는 현지 교통수단인 트라이시클(tricycle)이 줄지어 서 있다. 갓 쪄낸 옥수수를 파는 상인과 흰 교복을 입고 깔깔대는 학생 무리, 줄이 풀린 채 뛰노는 강아지가 뒤섞인 풍경은 난잡하지만 생기가 넘친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니 열대의 초록빛이 선연하다. 소와 염소가 풀을 뜯는 초원 옆으로 자전거를 탄 소년이 손을 흔들고, 몇백 년은 산 듯 몸체가 굵은 나무 위에는 농구 골대가 걸려 있다. 피나투보가 폭발한 후 26년이 지난 오늘의 앙헬레스는 평온하다.



피나투보에 깃든 삶

사륜구동을 타고 1시간가량 이동한 후 피나투보 산 트레킹을 시작한다. ⓒ 김수지

피나투보의 거대한 폭발은 기이한 풍경을 만들었다. 산 한가운데에 황폐한 사막이, 뾰족했던 산봉우리 안에는 푸른 칼데라 호가 생겨난 것이다. 활화산의 비현실적 풍광을 체험할 수 있는 피나투보 트레킹은 아는 사람만 아는 필리핀 최고의 액티비티 여행 코스다. 피나투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입산 시간은 오전 7시 또는 8시로 제한하기 때문. 화산재가 퇴적된 피나투보의 트레킹 코스는 적은 양의 비에도 쉽게 쏟아져 내리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날이 갠 오전에만 입산을 허용한다. 타를라크(Tarlac) 쪽에 위치한 산 입구에서 입산 신고서를 작성한 뒤, 가이드와 함께 사륜구동에 올라 타는 것으로 여정이 시작된다.


사륜구동을 타고 용암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달린다. 사방에 널린 잿빛 모래는 화산 활동의 흔적이다. 자욱한 흙먼지 때문에 눈을 뜨기 힘겹고, 잠시라도 입을 열면 작은 알갱이가 씹힌다. 저 멀리 풀을 뜯는 물소 떼가 보인다. 황량한 벌판 뒤에는 화산재가 쌓여 이룬 낮은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잿빛 단면을 드러낸 암벽의 기이한 형태는 라하르가 흘러내린 흔적이다. “피나투보 화산의 모습은 매년 달라집니다. 비와 바람이 그려내는 풍경이죠. 이곳은 자연이 만든 갤러리예요. 화산재가 흘러내린 암벽의 모습이 마치 그림 같지 않나요?” 매년 피나투보를 찾는다는 현지 가이드 지나(Gina)가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황야 한쪽에는 타루칸(Tarukan) 강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며 굽이친다. 강의 지류와 길이 계속 달라지기에 가이드와 드라이버는 정상까지 향하는 새로운 길을 매번 찾아야 한다. 문제없다는 듯 숙련된 드라이버는 낮게 흐르는 강줄기로 망설임 없이 돌진한다.


사륜구동이 잠시 멈춰 서자 허허벌판 어디엔가 숨어 있던 어린이들이 몰려와 인사를 한다. 아에타(Aeta) 족 아이들이다. 까만 피부에 곱슬곱슬한 머리칼, 흑갈색 눈동자, 작은 체구를 지닌 이들은 한눈에 봐도 다수의 말레이계 필리피노와는 다른 모습이다. 네그리토(Negrito), 즉 지역 토착 인종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피나투보 산에 거주하는 토착 원주민이다. “아에타 사람들은 피나투보 꼭대기의 호수 속에 신이 산다고 믿습니다. 매일 새벽 6시와 오후 6시 산 정상에서 예배 의식을 치르죠.” 가이드 지나에 따르면 이들은 이 험한 산을 매일 두 번씩이나 오르내린다.



트레킹 중간에 만난 매점. 물과 간식 거리를 판매한다. ⓒ 김수지

“그들의 유일한 소유물은 활과 화산이다.” 15세기 필리핀에 도달한 스페인의 성직자 겸 역사가 페드로 치리노(Pedro Chirino)는 저서 <필리핀과의 교류(Relacion de las Islas Filipinas)>에서 아에타 족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아에타 족은 피나투보뿐 아니라 필리핀의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만 년 전 아에타 족은 필리핀에 가장 먼저 정착했다. 그들은 스페인의 정복을 피해 피나투보 산에 들어왔고, 피나투보는 그 이름의 뜻처럼 그들에게 오랜 세월 ‘풍요로운 땅’이 되어주었다. 화산 폭발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지만 뿔뿔이 흩어졌던 아에타 족은 황폐한 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1시간가량 달린 후, 더 이상 차로 오를 수 없는 험한 길이 시작되면 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정상까지 오른다. 그리 험난한 코스는 아니지만 돌덩이가 널린 산길과 미끄러운 계곡을 여러 번 넘나드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더구나 트레킹을 시작할 때쯤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길은 점점 험해진다. 앞장서는 가이드를 따라 산 넘고 물을 건너길 두어 시간. 피나투보 꼭대기에 다다랐다는 표지판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안개가 덮여 있지만 칼데라 호의 빛깔은 청명하다. 가까이 다가서니 위압적인 풍경에 마음이 겸허해진다. 둘레는 2.5킬로미터고, 호수 중앙의 깊이는 600미터나 되지만, 한없이 맑고 고요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호수의 바닥은 아직도 폭발 당시의 열기가 남아 뜨겁다고 한다. 깊은 잠에 든 피나투보는 아주 천천히 식어가는 중이다.



화산에 일군 축복

피나투보 산 중턱에 자리한 푸닝 온천에서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겨보자. ⓒ 김수지

피나투보는 팜팡가(Pampanga), 타를라크, 삼발레스(Zambales) 총 세 지역에 산자락을 걸치고 있다. 트레킹을 시작할 때 타를라크 주에서 입산 허가를 받고 삼발레스 주에 속한 정상에 다다랐으니, 이번엔 팜팡가 쪽의 피나투보를 방문할 차례다. 팜팡가 쪽의 피나투보 산자락에 자리한 푸닝 온천(Puning Hot Springs)은 피나투보 꼭대기에서 흘러나온 물을 이용하는 곳으로, 산의 주인인 아에타 족에게 임대료를 내고 운영하고 있다. 이 역시 사륜구동을 타고 산 깊숙이 들어가야 하기에 가는 길은 트레킹 코스 못지않게 박진감 넘친다. 산 초입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덜컹거리는 사륜구동에 리드미컬하게 몸을 맡긴다.

험난하지만 아름다운 길이 이어진다. 매번 새롭게 나타나는 절경 때문에 카메라를 떨어뜨릴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한다. 타를라크에서 시작한 트레킹 코스에는 화산재가 널린 황량한 황무지가 펼쳐진 데 반해, 이쪽에는 급속도로 식은 용암이 만들어낸 암석 절벽이 솟아 있다. 절별 사이로 난 길 한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올라가는 길이 마치 그 물줄기의 근원을 찾아 탐험을 떠나는 것 같다. 중간중간 산 고개를 넘어온 아에타 족은 신기한 듯 우리를 구경한다. 모험의 끝. 산 중턱의 푸닝 온천이 별세계처럼 등장한다.



푸닝 온천 직원들이 피나투보 화산에서 직접 캔 진흙으로 만든 머드 팩. ⓒ 김수지

산 위에 자리한 11개 노천탕의 온천수는 매일 피나투보에서 새롭게 끌어온 물을 화산의 지열을 이용해 데운 것이다. 20도부터 100도까지 온도별로 구분되며, 화산의 유황 성분을 함유해 피부 미용과 관절염에 좋다고. 그 효과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피나투보 화산의 절경을 바라보며 뜨끈하게 몸을 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열대 기후의 필리핀에서 온천이라니, 답답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접어둬도 좋다. 피나투보 산자락이 드리운 그늘은 생각보다 서늘하고, 눈앞에는 화산 용암이 만든 절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니까.


온천욕이 끝나면 화산재를 이용한 모래찜질과 머드팩이 기다린다. 자리에 누우면 가마에 데운 뜨끈한 화산재를 몸에 가득 쌓아준다. 조금 뒤 아에타 원주민 직원이 올라타 발로 온몸을 꾹꾹 눌러 마사지하니 누적된 피로가 풀린다. 머드 팩은 피나투보 화산에서 직접 캔 진흙을일주일간 말리고 유칼립투스잎을 섞었다고. 얼굴은 물론 전신에 발라주는 시원한 머드가 피나투보의 여정을 마무리해준다.








꿈꾸던 해변으로

방카가 늘어선 푼타키트 비치는 이국적 풍광을 자랑한다. ⓒ 김수지

앙헬레스 시티 근교의 삼발레스 해안과 수비크(Subic)는 산과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는 휴양지로 각광받는다.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 현지인에게 인기가 좋다. 건기의 필리핀은 생각보다 습하지 않고 선선한 기운마저 감돈다. 삼발레스 해안으로 향하는 길, 하늘엔 구름이 잔뜩 꼈다. 덕분에 열대의 끈적한 더위는 피할 수 있지만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불안하다. 삼발레스 해안 주변에는 수많은 무인도가 흩어져 있는데, 작은 어촌에 자리한 푼타키트 비치(Pundaquit Beach)를 호핑 투어의 거점으로 삼는다.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20~30분이면 멋진 경치를 자랑하는 카포네스 섬(Capones Island)과 아나왕긴 만(Anawangin Cove)에 닿는다.


방카(bangka)에 몸을 싣고 투어를 시작한다. 마치 소금쟁이처럼 생긴 방카는 나무다리가 선체를 지탱해 거친 물살에도 뒤집히지 않게 설계한 필리핀 전통 어선이다. 모터 엔진을 장착해 제법 속도가 빠르다. 아나왕긴 만은 섬 중앙에 잔잔한 호수를 품고 있다. 호수 뒤로 첩첩이 산이 흐른다.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깃든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다. 상념에 빠진 사이, 이미 옆에선 그 풍경에 몸을 던지고 있다. 호수 안에 몸을 담그고, 보트를 띄워 둥둥 떠다니며 섬의 낭만을 만끽하거나 여기저기 텐트를 치고 캠핑을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해변에서 물장구를 치는 젊은 필리피노 무리는 마냥 신난 듯하다. 아나왕긴 만의 기다란 해변가엔 적당한 바람이 불어 서핑을 즐기기 위해 찾는 이도 많다. 필리핀의 바다는 남색 물감을 탄 것처럼 짙푸르다. 바다 한가운데 잠시 보트를 세운 뒤 물속에 풍덩 빠진다. 물안경을 끼고 들여다본 바닷속은 온통 산호 천지다.


호핑 투어를 마친 후 돌아온 푼타키트 비치의 오후는 느긋하다. 어선이 질서 없이 흩어진 호젓한 해변에는 커플 몇 쌍과 공예품을 파는 상인이 느릿느릿 제 갈 길을 간다. 바나나잎을 엮어 지붕을 얹은 소규모 리조트의 바에는 서양인 몇 명이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마당에선 강아지 서너 마리가 모여 자기들끼리 장난을 친다. 구름이 걷힌 삼발레스의 하늘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모래사장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던 커플은 금빛으로 빛나는 바다 앞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자연이 주는 기쁨에 젖어, 그렇게 별이 가득한 필리핀의 밤을 맞는다.



필리핀 클라크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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