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고아는 4세기가 넘는 포르투갈 식민 역사를 끝마치고 인도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지금 동방의 로마라 불리던 고도부터 느긋한 해변까지, 도처에서
거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고아 특유의 우아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은 그대로인 채.
시에스타 무렵의 루아 31 드 자네이로(Rua 31 de Janeiro)는 단잠에 빠져 있는 것 같다. 2층에 발코니가 딸린 파스텔빛 건물이 늘어선 좁은 골목에 뜨거운 햇살이 쏟아진다. 손수레에 고리 모양의 전통 빵을 걸어두고 파는 상인의 얼굴에도, 파란 글씨로 집 주소를 적어놓은 꽃무늬 타일이나 흐드러진 흰 부겐빌리아꽃 위에도, 담 위를 기어가는 고양이의 보송한 등 위에도.
1510년부터 인도 남부 해안 지방 고아(Goa)를 지배한 포르투갈 세력은 1961년에 이곳을 떠났다. 그 이래로 고아의 주도 파나지(Panaji)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폰타이냐스(Fontainhas) 지구를 관통하는 이 오래된 거리는 옛것과 새것 그리고 포르투갈과 인도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의 일면을 보여준다.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가정집 사이사이에 주민과 여행자를 상대하는 가게가 나란히 자리한다. 양초를 제작하는 구멍가게, 열린 창 너머로 청년이 셔츠를 다림질하는 세탁소와 이발소, 게스트하우스, 식당, 카페 등. 오토바이를 탄 벽안의 여행자와 광주리를 머리에 인 사리 차림의 여인이 나란히 이 거리를 오고 간다. 포르투갈 가옥을 개조한 마테우스 부티크 호텔(Mateus Boutique Hotel)의 고요한 응접실에서 매니저 라지(Raj)는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어쩌면 오늘밤에 부를 오디션용 노래를 생각하며. 몇 블록 떨어진 동굴 같은 레스토랑에서는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무료한 표정으로 커리를 나른다. 벽을 장식한 아줄레주(azulejo, 포르투갈 채색 타일 공예)에 고아의 옛 거리 풍경이 그려 있다.
흰 타일 위의 세심한 붓질이
지나간 영광의 시절을 불러온다.
“고아는 인도가 아니에요.” 오를란두 드 노로냐(Orlando de Noronha)가 말한다. 그는 고아 최초의 아줄레주 작가이자 포르투갈 음악 기타리스트로, 여느 고안(Goan, 고아 사람)이 그렇듯 고향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파나지의 상징과 같은 새하얀 성모무염시태 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뒷골목에 그의 가게인 갈레리아 아줄레주스 드 고아(Galeria Azulejos de Goa)가 자리한다. 노란 포르투갈식 가옥 내부는 노로냐가 손수 복원했다. 비좁은 계단과 흰 자개를 덧댄 창, 도자기 파편으로 장식한 모자이크 바닥 등. “포르투갈과 인도 문화가 어우러지며 고아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생겨났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는 집에서 매일 포르투갈 어를 사용했고, 도시 어디서나 포르투갈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죠. 제게는 축복 같은 일이었어요. 대학 졸업 후에 포르투갈 기타를 배우려고 포르투갈 코임브라(Coimbra)로 떠났다가 우연히 아줄레주 공예를 접하게 되었죠.” 노로냐가 말한다.
전통 방식의 아줄레주는 타일 위에 유약을 칠한 뒤 붓으로 그림을 그려 가마에 굽는다. 포르투갈식 꽃 문양 타일과 그릇 사이로 고아 카니발, 파나지 시장, 힌두교 사원 등을 그린 타일 작품이 걸려 있다. 노로냐가 즐겨 그리는 옛 고아 풍경이다. 특히 고아 출신의 전설적 만화가 마리오 미란다(Mario Miranda)의 작품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다. “해방 이래로 인도 정부는 고아에 남아 있는 포르투갈 식민 지배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습니다. 옛 건축물과 문화가 조금씩 사라지며 많은 사람이 고아를 사랑하던 이유도 사라져가고 있어요. 그러나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미친 긍정적 영향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몇백 년도 지난 일이잖아요? 우리는 한때 고아였던 것을 지켜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파나지 시립 시장에 오늘 새벽에 들어온 생선. 오른쪽은 파나지 폰타이냐스 지구의 밤.
가게 뒤편의 거실로 간 노로냐가 고아 출신인 현 포르투갈 대통령이 선물한 포르투갈 기타를 꺼낸다. 그가 즉석에서 택한 곡은 ‘이제 작별할 시간(Adeus Korcho Vellu Paulo)’. 공교롭게도 그는 내일모레 리스본으로 6개월간 기타 연수를 떠날 것이다. 고아 전통 가곡인 만도(mando)의 정겹고 구슬픈 선율이 실내에 울려 퍼진다. 아버지의 공연을 익숙한 듯 감상하던 아이들이 박수를 친다. “물론 가족과 함께 갈 거예요. 이 녀석 없이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노로냐가 일곱 살 난 딸을 장난스레 껴안으며 말한다.
노로냐에 따르면 파나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줄레주 작품은 그의 가게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져 있다. 해 질 녘 메네제스 브라간자 협회(Institute Menezes Braganza) 건물에 도착한다. 수백 년 전 포르투갈 군사령부이던 노란빛 건물의 묵직한 문짝을 밀고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홀에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며 양쪽 벽면 가득한 아줄레주 벽화를 비춘다. 이는 포르투갈의 옛 화가 조르즈 콜라소(Jorge Colaço)의 작품. 항구를 떠나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를 축복하는 포르투갈 왕, 바다 괴물과 싸워 이기는 다 가마의 함대…. 흰 타일 위의 푸른 붓질이 잊힌 영광의 시절을 이 자리에 불러오는 듯하다. 어쩌면 이 순간, 따스한 햇볕이 마법을 부린 것 같기도 하다.
1534년, 포르투갈 의사이자 식물학자 가르시아 드 오르타(Garcia de Orta)는 고향을 떠나 포르투갈령 인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다. 봄에 출항한 배는 그해 9월 무렵 고아에 이르렀다. 그칠 줄 모르는 소나기와 섭씨 35도를 웃도는 더위가 그를 맞았다. 우연의 일치로, 포르투갈 모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 고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 것도 딱 10년 전의 9월이었다. 오르타는 30년 넘게 고아에서 열대 식물을 연구하며 식물학계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
파나지 성모무염시태 성당 앞 작은 시립 공원은 수백 년 전의 식물학자를 기리는 뜻에서 자르딩 가르시아 드 오르타(Jardim Garcia de Orta)라 불린다. 바다 건너 리스본에도 동명의 공원이 있다고 한다. 울창한 망고나무, 캐슈나무, 플루메리아, 극락조화 등이 찬란한 햇빛 아래에서 생명력을 뽐낸다. 200여 년 전 바스쿠 다 가마 흉상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이제 인도 정부를 상징하는 4마리 사자상이 들어서 있다. 전설적 탐험가의 위신은 조금 깎인 듯 하다. 가령 정원을 마주보는 건물 벽면을 메우고 있는 클럽 바스쿠 다 가마(Club Vasco da Gama)의 거대한 로고를 보라. 둥근 로고 안의 얼굴은 빛이 바래 알아볼 수 없고 탐험가의 상징 같은 베레모만이 인물의 정체를 암시한다.
1949년이 되었을 때, 만화가 마리오 미란다는 클럽 바스쿠 다 가마에서 흥청망청 새해를 맞았다. 고아 출신인 그는 어릴적부터 매일 겪은 일을 기록했는데, 이날의 그림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1949년 1월 1일, 새해가 되었다. 클럽 바스쿠 다 가마에서는 파티가 이어졌다. 새벽 4시 30분에 빈센트의 차를 타고 알티뇨 지구에 있는 아돌포네 집에 가서 9시까지 잤다.” 22세 때 미란다가 쓴 일기를 엮은 책 <더 라이프 오브 마리오 1949(The Life of Mario 1949)>에는 이처럼 사소한 일상이 빼곡히 담겨 있다. “5월 6일, 오늘 갑자기 어머니가 거실로 손님을 데려왔는데 나는 속옷 바람이었다. 테이블 아래에 기어 들어가 30분이나 숨어 있어야 했다.” “12월 31일, 저녁에 프란시스쿠 미란다와 마르가오에서 온 두 소년과 배드민턴을 쳤다. 게임이 끝난 후 춤을 추러 가서 자정까지 놀았다.”
1949년 1월 1일.
클럽 바스쿠 다 가마에서는 파티가 이어졌다.
미란다는 <더 타임스 오브 인디아(The Times of India)>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위클리 오브 인디아(The Illustrated Weekly of India)> 등 인도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의 삽화를 그리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관음증적일 정도로 꼼꼼한 관찰력과 유머가 그의 장기였다. 일본, 싱가포르, 호주, 프랑스 등 각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펜과 스케치북을 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곤 했다. 미란다의 우스꽝스러운 삽화는 옛 고아의 느긋한 삶을 생생히 담고 있다.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고아의 유명 건축가 제라르드 다 쿠냐(Gerard da Cunha)가 마리오 미란다 갤러리(Mario Miranda Gallery)에 앉아 미란다에 대해 회상한다. 쿠냐는 고아 전역과 뭄바이에서 갤러리 지점 6곳을 운영한다. 파나지 북부 교외의 한적한 포르보림(Porvorim) 지구. 가로수 사이에 위치한 이 갤러리는 그중 가장 규모가 크다.
쿠냐는 마리오 미란다 액자, 마리오 미란다 엽서, 열쇠고리 등에 둘러싸인 채 미란다의 삽화가 담긴 책을 뒤적이다가 인상 깊은 페이지를 보여준다. <더 라이프 오브 마리오 1949>를 비롯한 책은 쿠냐가 미란다의 부탁을 받아 직접 편집하고 출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쿠냐는 미란다가 평생 간직해온 수만 장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야 했다고. 쿠냐가 편집한 책은 미란다의 풍자적 신문 삽화와 달리 한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마리오에게는 예상치 못한 것을 포착하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어디서든 재미있는 측면, 작고 사소한 것을 찾아냈죠. 거리를 돌아다니는 강아지, 키스하는 연인처럼요. 한번은 그와 함께 공항에 간 적이 있어요. 그가 뭘 했는지 아세요? 1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모든 사람을 마치 빨아들이 듯 뚫어져라 관찰하더군요. 말 한마디 안 하고요!”
포르보림 지구를 찾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쿠냐를 따라 갤러리 바로 앞에 위치한 고아 건축 박물관(Houses of Goa)에 들른다. 쿠냐가 직접 설계한 이 벽돌 건물은 배를 형상화한 외관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으며, 자연 풍광에 어우러지는 환경 건축으로 유명한 쿠냐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1층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박물관 안의 나선형 층계를 오르면 층마다 쿠냐가 직접 모은 고아 건축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녹지가 보이는 둥근 창 앞에 앉아 고아 가요 앨범을 들을 수도 있다. “저는 구자라트(Gujarat) 출신이지만 20대에 처음 파나지에 오자마자 반해서 정착하게 되었어요. 장소가 전하는 느낌 때문이겠죠. 아쉽게도 요즘 파나지에서는 옛 건축물이 많이 사라지고, 자연도 파괴되고 있어요.” 쿠냐가 말한다. 날이 저물고 그가 자신이 직접 지은 맞은편 집으로 돌아간다. 어스름, 키 큰 열대나무 너머로 꺽다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 적어도 포르보림의 이 한적한 지역에는 파나지의 옛 분위기가 아직 떠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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