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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y 11. 2017

거제에 봄이 오면

거제도 자동차 여행


거제 동남부 해안에는 원시림이 무성한 섬과 비밀스러운 화원, 안온한 항구 마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완연한 봄기운이 내려앉은 거제의 은밀한 명소를 찾아 느긋한 자동차 여행을 떠나보자.


거제 동남부의 해안을 따라 이어진 14번 국도에는 전망 포인트가 즐비하다. ⓒ 김주원




거제에 봄이 오면

<거제도 자동차 여행>



평일에도 수많은 방문객을 실어나르는 동백섬호. ⓒ 김주원

거제도는 먼 곳이었다. 버스나 차를 타고 진주를 거쳐 통영까지 내려간 다음, 거제대교를 건너 마침내 거제도에 진입해도 동부 해안까지 최소 1시간은 더 걸렸으니. 그야말로 거제 여행은 산 넘고 바다 건너 다시 산을 넘는 머나먼 여정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2010년 말, 부산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를 잇는 거가대교의 개통은 거제로 향하는 길을 대폭 단축시켰다. 서울에서 출발하며 KTX(혹은 SRT)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린 뒤, 차를 렌트해 거가대교 초입에 있는 가덕해양파크 휴게소까지 지금은 3시간 30분만에 도달한다. 휴게소에서 바다 내음 가득한 멍게 비빔밥을 맛봐도 시간이 넉넉하다. 햇살에 반짝이는 거제 앞바다는 이런 격세지감을 모르는지 육중한 거가대교의 주탑 아래를 유유히 오간다.




바다에 떠 있는 숲


우리나라 섬 중 제주도 다음으로 면적이 넓은 거제도. 섬 연안을 따라 흩어진 크고 작은 70여 개의 섬과 함께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단, 거제 동부 연안은 예외다. 북쪽의 이수도와 남쪽의 지심도가 홀연히 떠 있을 뿐이다. 그중 장승포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15분 정도 항해해야 닿을 수 있는 지심도는 거제에서 원시림이 가장 잘 보존된 섬으로 꼽힌다. “지심도는 흔히 ‘조물주가 만든 정원’이라 불리곤 하죠.” 선글라스를 쓰고 능숙하게 동백섬호의 키를 움직이는 전동석 선장이 말한다.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40년 넘게 상선 시운전을 하던 그는 은퇴 이후 지난해부터 장승포와 지심도 사이를 오가는 도선의 운항을 맡고 있다. 동백섬호가 잔잔한 물살을 가르는 사이 숲 하나를 망망대해에 떼어놓은 것 같은 지심도가 슬며시 다가온다.

지심도가 자연의 원형을 고스란히 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에 포대 기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거제 동쪽 끝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 탓에 해방 이후에도 해군이 섬을 관리했고, 십 수 명 남짓한 주민이 머물며 개발과는 거리를 뒀다. 그러다가 올해 해군이 섬의 소유권을 거제시로 완전히 이전하면서 지심도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지심도의 탐방로 곳곳에는 동백나무가 터널처럼 우거져 있다. ⓒ 김주원

사실 해군이 관리하던 시절에도 지심도는 여행자의 발길을 허락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나 할까요? 조선소에서 일할 때, 지심도에 한나절 머물고 돌아가면 마음이 넉넉하게 풀리곤 했죠.” 접안 시설이 따로 없는 지심도 선착장에 노련하게 뱃머리를 댄 전동석 선장이 말한다. 평일에도 100명 정원의 도선에 빈자리를 찾기가 힘든 이유는 동백 군락이 한몫했을 것이다. 12월부터 4월까지 붉은 꽃봉오리가 지심도 전체를 물들이며 동백섬이란 별칭을 얻었으니 말이다.


지심도를 찾은 방문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탐방로를 따라 걷는 게 전부나 다름없다. 섬 둘레를 따라 약 2킬로미터로 이어진 탐방로 전체를 걷는 데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걷는 일에만 집중했을 경우다. 선착장에서 동백 터널과 지심분교 등을 차례로 지나치는 탐방로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지만, 낯선 세계에 당도한 기분 탓에 걷는 속도는 느려지게 마련이다. “마치 사방에 스피커를 설치해놓은 것 같네요.” 동행한 사진가가 팔색조의 청아한 울음소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꽃봉오리가 지기 시작한 동백나무를 비롯해 후박나무, 까마귀쪽나무 등 육지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수목이 신록을 내뿜고 짙푸른 바다가 수풀 사이로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섬 북단으로 향하는 도중 빛바랜 단층 목조 가옥이 눈에 띈다. 이는 옛 일본 전등소 소장의 사택으로, 오늘날 탐방객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쉼터로 운영하고 있다. 자그마한 안뜰에는 파라솔이 테이블마다 그림자를 드리우고, 주변에는 노란 유채꽃이 완연한 봄을 알리는 중이다.



간이 쉼터로 사용하는 옛 전등소 소장 사택은 빼어난 전망을 자랑한다. ⓒ 김주원


해안 전망대에 이르자 난간에 나란히 기댄 단체 관광객이 감탄사를 내지른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바다가 망망한 수평선을 채우고 있다. 청록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수면에는 숭어 떼가 자유롭게 방향을 틀며 먹이를 찾아 나선다. 섬 한복판의 옛 지심분교 벚나무 아래 꽃잎이 봄바람에 휘날리고, 과거 비행기 이착륙장으로 사용한 너른 평원에선 사방으로 남해 바다와 지심도의 수림이 어우러진 장관이 펼쳐진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다 휴대폰 시계를 살피니 어느덧 섬을 돌아다닌 지 2시간이 훌쩍 넘겼음을 깨닫는다. 흥미진진한 액티비티 혹은 독특한 볼거리가 있지는 않지만, 자연 속에서 걷고 응시하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섬. 그것이 지심도가 지닌 힘 아닐까.




비밀의 화원


거제를 빛내는 명소가 단지 자연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거제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몰리는 외도 보타니아가 단적인 예다. 1973년 한 부부가 외딴섬을 사들여 이국적 아열대식물로 가득한 정원으로 가꿨는데, 오늘날 ‘남국의 파라다이스’라는 수식어와 함께 연간 방문객만 100만 명이 넘는 인기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개인이 공들여 완성한 외도 보타니아는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다소 인공적인 분위기가 엿보이는 것도 사실. 여기에 매일 수십 차례씩 오가는 유람선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방문객과 제한된 방문 시간은 느긋한 꽃구경을 방해하는 요소기도 하다. 만일 차분한 꽃놀이를 즐기길 원한다면 예구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공곶이를 대안으로 택하자. 공곶이로 가는 길은 은밀한 비밀 통로 같다. 우선 마을 초입에서 언덕을 오른 후,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룬 가파른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가쁜 숨을 내쉬게 하는 긴 계단 끝에는 느닷없이 너른 꽃밭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흡사 암막을 거둔 뒤 무대가 등장한 것처럼. 마침 이곳을 가득 메운 수선화가 절정에 달해 있다. 샛노란 꽃봉오리 주변으로는 황금빛이 감도는 금사철나무가 에워싸고, 꽃밭 너머로 종려나무와 함께 몽돌 해변이 펼쳐진다. 무릉도원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수선화의 꽃망울이 활짝 핀 봄은 공곶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기다. 오른쪽의 무스카리꽃도 볼 수 있다. ⓒ 김주원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정말이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았어요.” 화원 한쪽에서 작업을 하던 강명식 씨가 말한다. 여든을 훌쩍 넘긴 그가 바로 공곶이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진주가 고향인 그는 1969년부터 지금의 공곶이를 눈여겨봤는데, 그 무렵 지자체에서 농어민 소득 증대 사업으로 지원하던 밀감나무를 심기 위해 이곳의 구릉지대를 정성스레 매만졌다. 총 4,000미터 길이로 개간한 계단식 밭에 약 2,000그루의 밀감나무를 심었을 때만 해도 강명식 씨는 일확천금을 얻을 것이라 확신했다고. 밀감나무 1그루만 제대로 키워도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1976년 겨울, 이상기후로 나무가 모두 동사하는 바람에 그는 오랜 꿈을 잃고 만다.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죠.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이 땅에 온 이유가 단지 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나의 소명이 아마도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봄기운이 듬뿍 담긴 도다리쑥국. ⓒ 김주원

이듬해 그는 부산의 어느 화원을 찾았다가 당시만 해도 희귀하던 수선화를 발견했다. 주머니를 털어 수선화 종자 2개를 산 뒤 공곶이에 심었다. 그렇게 단출하게 시작한 꽃밭을 20년가량 애지중지 가꾸자 외부에 꽃을 팔아도 될 만큼 규모가 커졌다. 10년이 더 지나자 ‘봄날의 화원’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강명식 씨의 강인한 의지 덕택에 바다를 면한 평범한 논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기적의 화원으로 뒤바뀐 셈이다. 이곳 역시 외도 보타니아와 마찬가지로 개인 소유지지만,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한다. 셀카봉을 든 커플도, 하늘에 드론을 띄운 촬영 전문가도 공곶이에 내려앉은 봄의 절경을 마음껏 담을 수 있다.


예구마을로 되돌아온 뒤, 항구 변 식당에서 저녁의 허기를 달래기로 한다. 마침 도다리가 적당하게 살이 오른 시기다. 향긋한 쑥을 넣고 뭉근하게 끓인 도다리쑥국은 경남의 남해안 일대에서 맛볼 수 있는 봄날의 별미. 부드럽게 씹히는 도다리 살과 쑥 내음 가득한 뽀얀 육수가 어우러져 공곶이에서 누린 봄기운을 이어가기에 충분하다.




거제도 자동차 여행 두번째 이야기

거제도 자동차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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