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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y 30. 2017

2번 국도 자동차 여행


2번 국도 자동차 여행


보성에서 순천, 광양을 거쳐 하동까지. 2번 국도를 타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남도 여행을 즐긴다. 대하소설 속 무대를 누비며 시간 여행을 즐기고, 남도의 진미로 입맛을 깨운 다음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차나무 아래에서 느긋하게 쉬어가자.




1. 태백산맥 문학길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한 현 부잣집은 일본식 건축과 한옥의 구조가 뒤섞인 독특한 모양이다. 제각에서 보성여관 정원에서는 전통 다도 체험과 비정기적으로 음악회가 열린다. © 최남용

따사로운 남도의 볕은 소슬한 기운을 일찍이 내몰고 봄꽃을 피운다. 목포부터 부산까지 이어지는 2번 국도 여행의 기점으로 전체 구간 허리 즈음에 자리한 보성을 택한다. 순천으로 연결되는 2번 국도에서 벌교역으로 향하니 원조를 내건 꼬막 식당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벌교에 입성한 관광버스와 나들이 차량은 대부분 식당가에 한 번, 그리고 이 고장의 상징인 벌교 홍교 시계탑 주변에서 또 한 번 멈춘다. 바닷물이 바닥을 드러낸 얕은 벌교천 위에 부채꼴 모양의 홍예를 뽐내는 다리가 보인다. 1723년 조선시대에 지은 벌교 홍교는 보물로 지정된 전국 6개의 홍예다리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남다른 미감을 자아내는 문화재로 손꼽힌다. 3칸으로 나뉜 아치 끝에는 돌로 조각한 용머리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밀물 때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고. “홍교는 벌교의 근원이고, 포구는 벌교의 모태성을 대변합니다.” 태백산맥 문학관의 명예관장 위승환 씨가 말한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바로 이 홍교가 들어서기 전 벌교 포구를 잇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백산맥 문학관 전시실 입구에 놓인 오래된 손 지도에는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둘러보던 벌교 마을의 옛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벌교에는 이 고장의 기형적 탄생 비화를 품은 장소가 여럿 자리한다. 그중 순천만으로 열려 있는 벌교 포구는 마을의 부흥과 역사의 주 무대가 된 곳이다. 벌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철저한 계획하에 개발된 지역으로, 해로와 철로를 이용해 수탈의 통로 역할을 했다. 포구의 끝인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뱃길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순천과 화순, 장흥 등 내륙에서 생산한 곡식을 벌교역에서 이곳까지 실어왔다. 자연스럽게 포구를 중심으로 상권이 부흥했고, 돈의 활기를 좇는 사람이 들끓었다. 벌교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주먹패’도 이때 등장한 것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1983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을 반추한 소설 <태백산맥>이 탄생했다. 소설가 조정래의 상상력은 오늘날까지도 벌교를 문화와 역사를 고증하는 마을로 숨 쉬게 한다.

보성여관 정원에서는 전통 다도 체험과 비정기적으로 음악회가 열린다. © 최남용


“벌교는 어딜 가든 소설 속 이야기가 스며 있습니다.” 위승환 명예관장이 말한다. 제석산 자락에 자리한 태백산맥 문학관 건너편에는 소설 속 현 부잣집과 소화의 집을 재현해 놓았고, 실제 배경인 철교와 소화다리, 중도 방죽, 김범우 집, 남도여관 등이 산책길로 이어진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로 조성한 거리마다 귀물처럼 보이는 건축이 자리한다. 일제강점기 번화했던 본정통 길에는 2층 일제식 목조 건물이 태연히 세월을 버티고 있다. <태백산맥>에 등장한 남도여관이다. 현재는 보성여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는데,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고즈넉한 카페와 박물관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니, 꽃을 떨구고 푸른 잎을 맺은 목련나무가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아담한 정원을 둘러싼 ‘ㅁ’자 구조의 가옥은 투숙객을 위해 개방 중이다. 소설 속에서는 토벌대가 여기에 숨어 여관 잠을 잤지만, 오늘날엔 정원에 핀 석류꽃을 감상하며 진귀한 보성 녹차를 내려 마시고, 김성춘 매니저가 들려주는 구성진 노래를 감상한다. 툇마루에 내려 앉은 포근한 볕을 쬐며 망중한을 즐기거나 2층 다다미방에서 부용정을 올려다볼 수도 있다. “벌교는 풍광이 굉장히 멋진 동네예요.” 김성춘 매니저가 첨언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벌교 포구로 밤 산책을 나서면 갯벌 틈새로 달빛이 스며드는 몽환적인 일품 야경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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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 문학관 입장료 2,000원, 9am~6pm,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

     tbsm.boseong.go.kr

 보성여관 입장료 1,000원, 1박 8만 원부터, 10am~5pm, 월요일 휴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19, boseonginn.org




태백산맥길을 따라 가다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순천 방향으로 향한다.
중앙2길을 따라 시민로, 연자로를 차례로 지난 후 옥천길에 접어들면
창작예술촌이 들어선 순천 원도심에 도착한다.




2. 순천 창작예술촌


순천부읍성 자리였던 원도심에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예술 공간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 최남용

옛 가옥을 개조한 카페, 작은 독립 서점, 젊은 아티스트의 소규모 갤러리. 언뜻 보면 순천의 골목 재생 프로젝트는 여느 지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태동의 중심인 향동 골목에 들어서면,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걷어내는 벽화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흉물스러웠던 빈집이 유명 작가의 창작 공간으로 변신하고, 다채로운 문화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아온 골목에 이렇게 신선한 문화의 바람이 불자, 순천시가 ‘역사를 되짚는 원도심 재생’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 성곽길로 짐작합니다.” 순천도시재생지원센터 우승완 센터장이 다부진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근의 낙안읍성과 별개로 오늘날 순천 원도심의 중심부인 영동, 옥천동, 중앙동, 남내동을 에워싸고 1430년 성곽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순천은 도호부로서 인근 지역을 관할했는데, 1925년 일본이 성곽과 성문을 모두 철거하기 전까지 약 495년간 순천부읍성으로 전통 도시 형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현재는 100년 전 미국 선교사가 남긴 몇 장의 흑백사진에서 발견한 성문터에 동서남북 4개의 표지석을 세워 그 규모를 가늠한다. 성인 남자 2명이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은 해자,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는 성곽길로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를 더듬는 식이다.


배병우 작가의 창작 레지던시 1층에서 그의 소나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 최남용

 문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순천 원도심 거리를 걷다 보면, 심리적 간극을 느낄 수 있다. 아담한 찻집을 끼고 골목에 들어서면 불현듯 태극 문양을 새긴 위엄 있는 기둥이 있고 순천향교가 도시를 품듯 자리한다. 일본풍 기와집이 늘어선 거리에는 빼꼼하게 입면만 그럴싸한 빈티지풍으로 꾸며놓은 신식 건물이 서 있기도 하다. “순천부읍성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공간을 보전하되 현대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길 바라죠. 도시 산책자의 상상으로 오래된 현재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함께 동네 골목길을 걷던 우승완 센터장이 조언한다. 최근 순천 원도심은 창작예술촌을 꾸려 지역 예술가와 청년, 시민과 방문객이 함께 예술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공간을 선보이고 있다. 둘레길처럼 1~3시간짜리 마을 탐방 코스를 마련해 도시 역사와 문화, 생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투어 가이드를 제시하고, 7개의 창작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 워크숍을 연다. 올초 시민창작예술촌에 1호로 입촌한 배병우 사진가의 아트 레지던시를 시작으로 김혜순 한복 명인의 스튜디오, 조강훈 미술가의 스튜디오도 차례로 개방했다. 옥천 변 상설시장과 북부시장 웃장에서는 장인의 솜씨를 만나는 생활 예술의 판이 벌어진다. 태양광 문패를 단 생태골목길을 중심으로 ‘향동 금곡 에코지오 마을’도 구상 중이다. 날씨가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해지면, 남문교에서 시민교까지 이어지는 옥천의 경관을 개선해 수변 음악회도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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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창작예술촌 11am~7pm,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길 19.

▣ 순천원도심투어 socitytour.blog.me


순고오거리에서 순천역 쪽으로 향하면 순천만 방면 강변로에 진입할 수 있다. 표지판을 따라 순천만길로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드넓은 습지를 만난다.



3. 순천만습지


바닷물이 빠져나간 순천만 갯벌에 붉은 태양 빛이 물들기 시작한다. © 최남용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가상 공간 무진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순천만 연안의 대대포 앞바다 갯벌에서 탄생했다고 전해온다. 여명이 밝기 전, 어스름한 순천만은 고요하다. 종종걸음으로 갯벌에 발자국을 남기는 철새 무리의 움직임만 어렴풋이 보일 뿐 연한 해무가 내려앉아 시야를 가린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에 깊숙이 자리한 항아리 모양의 연안 습지는 광활한 갈대밭과 갯벌을 품는다.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상내면에서 흘러온 이사천이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3킬로미터의 물길에는 갈대 숲이 장관을 이룬다. 하천에서 흘러온 영양분으로 기생하는 수천 종의 갯벌 생물, 철마다 찾아오는 희귀 조류만 230여 종에 달하는 순천만은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출사지인 동시에 우리나라 자연 생태의 보고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 규모도 어마어마해서 해수역으로만 따지만 75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순천만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당연히 감흥도 달라진다. 누군가는 용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순천만 S자 곡선의 낙조를 최고로 꼽고, 누군가는 비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생태 습지 탐조선을 타고 물길을 가르며 희귀 조류를 구경하는 체험을 권하기도 한다. 물론 하천 둔치에 포진한 5.4제곱킬로미터의 광활한 갈대는 순천만을 대표하는 비경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만약 김승옥 작가에게 소설적 영감을 준 몽롱한 안개에 젖은 순천만을 기대한다면, 아침 일찍 서둘러 화포해변으로 가는 게 좋다. 순천만 초입에서 화포마을로 진입하면 학산해안길을 따라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펼쳐진다. 갈대밭 끝자락에 펼쳐진 ‘ㄷ’자 연안에 가없는 갯벌로 좀 더 가까이 차를 몰고 들어가면, 낮은 구릉 사이로 서서히 빛이 새어 들어오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검은 갯벌 위로 연한 붉은빛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낮은 산봉우리에 걸친 해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않는다. 마치 소설 속 서정이 짙게 깔린 무진의 아련한 풍경을 조금 더 즐기라는 듯 사위는 어렴풋한 어둠에 오래 둘러싸인다.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나면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는 철새 떼의 분주한 움직임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해안길을 따라 순천만을 좀 더 누비고 싶을 땐 순천에서 여수로 향하는 2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해룡면에서 와온마을로 진입해보자. 가을이면 칠면초가 붉은빛을 발하는 와온해변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없는데다 순천만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숨은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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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입장료 8,000원, 8am~7pm, 전라남도 순천시 순천만길 513-25,

     suncheonbay.go.kr

 화포해변 061 749 3107,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학산리.



순천만길로 따라 들어왔던 강변로를 타고 팔마로, 하풍길을 차례로 지나면
역전길이 나온다. 역전2길로 접어들면 동천을 끼고 대로변에 자리한
바구니 호스텔이 보인다.



글. 유미정 사진. 최남용



2번 국도 자동차 여행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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