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한 섬과 국경 마을의 일상, 도마뱀이 헤엄치는 원시림, 굽이치는 석회암 벽. 투명하리만큼 맑은 안다만해가 품은 얼굴은 이토록 다양하다. 태국 남서부의 끄라 지협을 따라 내려오는 아름다운 여정.
산지로 둘러싸인 도시는 초록이 선연한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방콕을 경유해 도착한 곳은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끄라 지협(Kra Isthmus)의 한 자락, 태국의 라농주(Ranong Province)다. 기다란 땅은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며 서쪽으로 안다만해(Andaman Sea)에, 동쪽으로 푸껫산맥(Phuket Range)에 두루 닿는다. “라농주는 산이 많아 태국에서 가장 습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요. 우기가 8개월이나 되죠. 끄라 지협에 도착한 몬순은 거대한 푸껫 산맥을 넘지 못하고 이곳에 많은 비를 뿌립니다.” 현지 가이드 본드(Bond)의 말처럼 지금도 비가 올 모양인지 흐릿한 하늘엔 구름이 짙게 걸려 있다.
많은 강수량은 끄라 지협에 활엽수가 우거진 커다란 우림을 만들었다. 산지에 폭 안긴 아담한 라농 시내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빛이다. 커다란 응아오 폭포(Ngao Waterfall)가 도로 옆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가 하면, 산등성이 아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초원에서는 새 떼와 소가 어울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흰 증기가 피어오르는 노천 온천을 만날 수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락사와린 핫 스프링(Raksa Warin Hot Spring)에서 현지인은 보글보글 솟아나는 따끈한 물에 발을 담그거나 널찍한 온돌 위에 누워 느긋하게 쉰다.
라농에서 어선을 개조한 페리로 2시간, 제트 보트를 타고 40분 정도면 아담한 섬마을 꼬빠얌(Koh Payam)에 닿는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안다만해는 강처럼 잔잔하고, 맹그로브가 뿌리를 내린 작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빠얌은 태국어로 ‘시도한다’는 뜻이에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본드가 말한다. 그럴듯한 이름이다. 꼬빠얌은 안다만해의 다른 섬에 비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이곳을 찾는 누구든 모험심이 조금은 필요하다. 보트가 출발하니 그제야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땀을 식힌다.
꼬빠얌에서 재배한 열대 작물과 녹두로 만든 당면에 각종 채소를 넣고 새콤한 소스를 버무린 얌운센(yam woon sen). ⓒ 김수지
주변 풍경은 계속 시선을 빼앗는다. 섬 안에는 키 큰 야자수와 플라스틱 접시를 매단 고무나무, 캐슈너트나무 등 갖가지 초록빛이 무성하다. 활짝 핀 부겐빌레아가 빨간색, 노란색, 보라색으로 숲을 장식하고, 커다란 이파리를 번쩍이는 활엽수는 도로까지 가지를 뻗는다. 바와 레스토랑, 무에타이 훈련장, 공방이 드문드문 보이는 길을 지나자 풍경의 끝에서 기다란 해변이라는 뜻의 아오야이(Aow Yai) 비치가 펼쳐진다. 시원하게 우는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한 바다에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뿐이다. 몇몇 여행자는 커다란 나뭇가지에 로프를 묶어 만든 그네를 타거나, 수풀에 파묻힌 방갈로에 누워 잠을 청한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재촉하는 이도 없는 섬마을의 일상이다.
레스토랑을 겸한 커다란 방갈로에 앉아 탁 트인 바다를 내다본다.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비가 한바탕 쏟아진다. 다시 구름이 걷힌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내일 아침에는 화창한 라농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과일과 채소, 식료품, 옷가지 등을 죽 세워놓은 가판대에서 두 나라의 일상이 교차한다. 아침 장이 열리는 므앙라농 시장(Mueang Ranong Municipality Market)에서는 검은색 차도르를 두른 모슬렘 여인과 미얀마 전통 타나카(thanakha) 가루를 칠한 얼굴이 자연스레 섞여 이국적 풍경을 만든다. 이들은 민족도 언어도 다르지만 국경 마을에선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국인과 미얀마인이 뒤섞여 장을 보거나 때늦은 식사를 하고 있다. 갓 끌어올린 생선이 힘차게 펄떡대는 수산물 가판대 뒤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미얀마 상인은 밤이 되기 전 다시 바다를 통해 국경을 넘을 것이다. 안다만해는 태국과 미얀마 두 나라 모두의 보고이자 서로를 잇는 통로다.
라농 포트 안에 자리한 태국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뒤, 뱃사공과 뱃삯을 협상하는 것으로 국경을 넘는 여정이 시작된다. 라농의 수로 위에 태국과 미얀마의 어선을 비롯해 사람과 물자를 나르는 각종 배가 쉴 새 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목조선에 대충 천막을 두른 롱테일 보트에 조심스레 올라타자 곧 덜덜거리며 그 사이를 행진한다.
안다만해는 태국과 미얀마에 걸쳐 기막힌 풍경을 흩뿌려놓았다. 최근 알려지기 시작한 하트 모양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품고 있는 콕스콤섬(Cock’s Comb lsland)이나 미얀마 최초의 5성급 리조트와 카지노가 들어선 매클라우드섬(Macleod Island)이 대표적이다. 모두 미얀마의 메르귀제도(Mergui Archipelago)에 속하지만, 태국 서쪽 해안을 통해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비밀스러운 풍광 때문에 라농을 찾는 이가 점차 늘고 있다.
므앙라농 시장에서 채소를 판매하는 태국 상인과 화려한 금색으로 치장한 미얀마 코타웅 피토아예파야 사원. ⓒ 김수지
오늘의 행선지는 섬이 아니라 미얀마 본토다. 해상에 둥둥 떠 있는 국경 사무소에서 최종적으로 신분 검사를 한 뒤 보트는 다시 30여 분을 달린다. 도착한 곳은 미얀마 최남단의 해안 마을인 코타웅(Kawthaung). 눈앞의 도시는 사뭇 다른 공기와 풍경으로 일순간 생경한 느낌을 안겨준다. 황금빛 건물이 중앙에 자리한 복잡한 시내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며 질서 없이 오가고, 다양한 문양으로 타나카를 칠한 얼굴은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힐끔댄다. 두 나라 사이에는 30분의 시차도 존재한다. 코타웅의 시간은 라농 포트에서 보트를 타던 때로 되돌아가 있다.
미얀마의 강렬한 햇살이 흰 타일 바닥에서 이리저리 반사된다. 그 위로 황금색을 두른 정사각형의 불교 사원이 우뚝 솟아 있다. 번잡한 도시는 일순간 고요해지고, 너른 바다의 수평선 끝에서 태국의 땅은 흐릿하다. 고요한 언덕에서 코타웅 시내를 굽어보는 피토아예파야(Pyi Taw Aye Paya) 사원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모습의 불상을 모신다. “이 불상은 소원을 빌면 아주 빨리 소원이 성취되는 것으로 유명해요. 어머니가 아파서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었더니, 신기하게도 다 나았죠.” 본드가 입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커다란 불상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대신 소원이 이뤄지면 다시 이곳에 와서 꽃이나 춤 등 어떤 방식으로든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죠.” 정말일까? 석가모니는 알 듯 말 듯한 인자한 미소로 방문객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사원 한쪽에도 넉넉한 품을 자랑하고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나무 그늘 밑의 쉼은 고요하다. 코타웅 시내 너머로 펼쳐진 망망한 바다는 묵묵히 세상의 짐을 실어 나른다. 파란 바다 위에 지금도 분주히 오가는 선박이 가느다란 물길을 드리운다.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안다만해를 건너 두고 온 시간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글. 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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