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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ug 22. 2017

'항구의 추억을 걷다'
목포 원도심 여행


Let’s Walk into RETRO MOKPO

목포의 추억을 걷다




목포는 항구다


1897년 10월 1일, 영산강 하구의 자그마한 나루터가 일약 근대도시로 부상한다.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목포가 한국의 네 번째 개항 도시가 된 것이다. 앞선 도시가 일본의 압박으로 마지못해 개항했다면, 목포는 고종의 칙령을 통해 비교적 자발적으로 항구의 문을 열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을 발판 삼아 목포는 항구도시로서 명성을 차곡차곡 쌓는다. 쉼 없이 오가는 선박은 신문물을 거침없이 쏟아냈고, 일터를 구하기 위해 밀려든 노동자와 상인을 수용하기 위해 목포는 간척 사업을 펼치며 꾸준히 몸집을 부풀렸다. 목포는 어느새 6대 도시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됐고, 호남선과 국도1 · 2호선의 기점이 된다.


올해로 목포가 개항한 지 120년. 가장 호황을 누리던 1930년대 이후 목포항은 조금씩 활기를 잃어갔다. 우리나라 3대 항구도시라는 옛 영광이 무색하게 오늘날 목포항은 흐릿한 인상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군데군데 정자를 등성이에 인 유달산과 이를 마주 보는 삼학도 사이로 이따금 여객선이 커다란 뱃고동 소리를 내며 항구에서 벗어난다. 분주한 새벽 일과를 마치고 정박한 어선 위에는 나른한 햇살이 쏟아진다.


왼쪽부터 구 일본영사관의 빨간색 벽돌에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구 일본영사관에서 바라본 원도심. 반듯한 신작로 뒤로 목포항이 보인다. ⓒ 임학현


“목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근대기 건물이에요.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지어 웅장한 느낌이 들죠. 저기 벽돌로 쌓은 동그란 문양은 욱일기를 상징합니다.” 이옥희 문화관광해설사는 빨간 벽돌의 2층 건물을 가리킨다.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 중인 옛 일본영사관이다. 유달산 자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위세를 뽐내는 얼굴. 건물 외벽엔 한국전쟁 당시 총탄이 뚫고 지나간 자리가 곳곳에 보인다. 산 뒤쪽에는 천황을 참배하던 신사가 있었고, 과거 전쟁을 대비해 뚫은 방공호가 유달산 줄기까지 이어진다. 일본영사관 건물 아래 앉아 있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이 더욱 측은하게 느껴진다. “우리 민족에게는 가슴 아픈 건축물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없애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대로 간직해서 역사를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죠.” 이옥희 씨가 말한다. 영사관 앞으로 난 반듯한 신작로가 목포항까지 쭉 뻗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목포를 수탈의 거점으로 삼았다. 호남 지방의 미곡과 면화를 가득 실은 선박은 목포항을 통해 일본 나고야에 도달했다.


그 옛날 번쩍번쩍하던 신작로는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패전한 일본은 목포에 학교와 교회, 적산 가옥을 남겨둔 채 본국으로 도망쳤다. 그 건물은 곧 우리의 생활양식으로 채워졌고, 그 후로 70년이 더 흘렀지만 변한 것은 없다. 다다미가 깔린 2층의 적산 가옥은 문방구나 목공소, 비디오 가게의 간판을 무심히 달고 있다. 그마저도 이제 문을 닫은 곳이 많지만, 유달동 골목은 오래된 동네가 안겨주는 친근함과 이국적 색채가 뒤섞인 묘한 매력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갑자옥모자점의 선반 위에 가지런히 진열해놓은 중절모. ⓒ 임학현

오래된 자전거가 서 있는 갑자옥모자점은 세월이 비껴간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제 90년쯤 됐죠? 1925년에 시작했으니까요.” 머리가 하얗게 샌 이태훈 대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지난 세월을 반추한다. “갑자옥은 갑자년에 처음 시작해서 붙인 일본식 이름이에요. 첫 번째 건물은 불이 나서 사라지고, 이 건물은 1968년에 다시 지은 것이죠.” 이곳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영업을 해오고 있는 목포 시내의 유일한 상점이다. 지금은 모자를 직접 제작하지 않지만, 그 옛날 목포에서 잘나가는 멋쟁이라면 이곳에서 손수 제작한 멋들어진 중절모가 필수품이었다고. 당시 일본인이 가득하던 거리에서 갑자옥모자점만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가게에 쌓인 세월처럼 겹겹을 이룬 모자 틈바구니에서 각이 잘 잡힌 모자 하나를 고른다. 모자를 담은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걸고 걷는 이 거리가 언젠가 사라질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 입장료 2,000원, 9am~6pm, 월요일 휴무, 영산로29번길 6.

갑자옥모자점 061 244 0570, 번화로 58.





자수가 피워낸 꽃


다반을 받쳐 내는 다가올의 금황녹차. ⓒ 임학현

구도심의 잿빛 풍경 아래 한구석, 차 소반을 올린 테이블에서 소담한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2층 구조의 건물과 목조 계단, 흙벽. 외관은 영락없이 개항기의 일본식 목조 가옥이지만, 내부는 목포 구도심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세련된 감각으로 꾸몄다. 밖에서 입던 옷을 걸어두던 횟대는 예쁜 자수를 놓은 천을 걸자 멋진 커튼으로 변했고, 재봉틀 상판은 앤티크 테이블로 탈바꿈했다. 조각 낸 자수 병풍을 액자에 거니 하나의 예술 작품 같다. 오래된 물건이 예쁜 장신구로 변신한 이곳은 우리나라의 전통 자수와 차살림을 선보이는 카페 ‘다가올’이다.


“보통 차 문화라고 하면 일본이나 중국을 떠올리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차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어요.” 다가올을 손수 단장한 오경희 대표는 숙성한 녹찻잎을 차호에 넣고 잔에 야무지게 따라 낸다. “옛날 어머니들은 손님에게 차를 낼 때 요즘처럼 절대 잔만 달랑 내지 않았어요. 꼭 다반에 받쳐서 냈죠. ‘다반사’란 단어는 차를 마시는 일을 뜻해요. 그러니 ‘일상다반사’라는 말은 차를 마시는 일이 흔한 문화였다는 걸 보여주죠.”


오경희 대표가 다도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단순하다. 우연히 초대받은 집에서 차를 대접받았는데, 하얀 백자에 우린 녹차는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다도에 흠뻑 심취해 공부를 시작했다. “차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주부인 제가 살림살이를 하며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고민 끝에 그녀는 집 안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바느질을 다도에 접목해 차살림을 손수 짓기 시작했고, 그 위에 하나씩 자수를 넣으면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했다.


왼쪽부터 화려한 자수를 넣어 장식한 노리개. 다가올 대표 오경희 씨가 차를 내리고 있다. ⓒ 임학현


“어때요? 이 자수 하나가 들어가니까 느낌이 확 다르죠?” 오경희 씨의 말처럼 자수 하나를 더했을 뿐인데, 밋밋했던 티 매트에 기품이 살아난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조선 후기 궁중에서 사용한 길상도 등 조선 시대의 전통 문양이 그녀 손을 거치면 신기하리만치 세련된 패턴이 된다. 전통 자수라는 말은 자칫 고루하게 들리지만, 그녀는 현대적 감성으로 풀어낼 줄 안다. 명장 유희순 선생 아래에서 바느질에 입문해 한상수 선생으로부터 고집스레 전통을 익혔고, 이제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현대적이면서도 편안한 감성으로 풀어낸다. 쉽게 더러워지는 티 매트는 삼베나 모시 대신 세탁이 쉬운 화학 섬유로 제작한다. 오경희 씨의 작품은 적산 가옥 아래에서도 위화감 없이 잘 어우러진다.


다가올 곳곳에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20년간 모아놓은 차기를 내놓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냅킨마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접어둔다. “손님이 안 깨면 꼭 제가 깨더라고요. 인연이 거기까지인 거죠.” 어여쁜 잔에 정성스레 내린 녹차는 떫지 않고 입안 가득 구수한 향을 전한다. 오경희 씨의 작품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감탄을 터뜨리면 으레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이 하시던 걸 저는 흉내만 낸 거예요. 제가 만든 건 하나도 없어요.”



다가올 금황녹차 5,000원, 자몽구기자차 5,000원, 11:30am~10pm, 

월요일 휴무, 061 245 5646, 유동로 58.



글. 김수지     사진. 임학현





목포 원도심 여행 Part.2 

목포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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