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남부 레이크랜드의 사이마 호수는 오랫동안 수많은 이를 끌어모았다. 사람들은 사우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깨끗한 호수에 몸을 던지며, 숲속에서 산딸기와 버섯을 줍는다.
부연 안개가 내려앉은 도로를 지난하게 달리던 버스는 어느새 광활한 수평선 사이로 미끄러져 간다. 핀란드 레이크랜드(Lakeland)의 흩어진 수변 마을로 들어서는 길. 헬싱키에서 출발한 버스는 레이크랜드로 진입하는 관문인 라티(Lahti)와 미켈리(Mikkeli)를 지나 사이마(Saimaa) 호수의 심장부로 향한다. 호수에는 숨을 고르는 고래처럼 검은 바위가 드문드문 솟아 있고, 짙은 녹음 속에 작은 오두막이 보일 듯 말 듯 자리한다.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의 명성을 증명하려는 듯 온통 물에 덮인 땅 같은 풍경이다. 노르웨이처럼 육중한 산자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구불구불한 언덕과 호수는 지극히 평화롭고, 날렵한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드높은 장막을 치고 있어 야생동물이 숨기에 좋을 듯하다. 숲속에서 조심조심 움직이지 않으면 먹이를 쫓는 엘크가 순식간에 덮칠지도 모를 일이다. 레이크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인 사이마는 최고 수심이 86미터, 연안선 총거리가 1만3,700킬로미터에 달한다. 한 지리학자의 발표에 따르면 핀란드 연안선의 총길이가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와 비슷한 31만5,000킬로미터라니, 그것에 비하면 사이마 호수는 작은 연못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사이마 호수와 맞닿은 사한라티 리조트(Sahanlahti Resort)는 ‘제재소의 집’이라 불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1740년대에 설립한 미에툴라 제재소(Miettula Sawmaill) 부지였다. 목재를 실어나르던 배의 낡은 부품이 골짜기에 화석처럼 남아 있고, 물을 옮기던 수로는 축축한 이끼에 파묻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270년 전, 나무 증기선에 통나무를 실어 날랐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제재소 노동자와 그 가족은 골짜기 주변의 오두막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사이마 호수에서도 규모가 매우 크고 역사가 깊은 곳 중 하나죠.” 사한라티 리조트의 관리자 세실리아 마틸라(Cecilia Mattila)가 골짜기 사이의 붉은 오두막으로 길을 안내한다. 한때 숲을 가득 매웠을 톱질 소리는 사라지고, 이제 정착촌은 현대식 사우나를 갖춘 여름 코티지로 탈바꿈했다. 무덤덤한 숲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려 퍼진다. “숲에는 놀라울 만큼 많은 야생 열매가 자라요! 산딸기와 야생 버섯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따 먹을 수 있답니다.” 연신 땅을 두리번거리던 마틸라가 방금 딴 산딸기를 코앞으로 내민다. 요염한 산딸기가 입안을 차갑게 적신다. 달큼하고 진하다. 흥미롭게도 핀란드에는 국립공원이나 사유지에서도 특정 식물을 제외한 먹거리 채취를 허가하는 ‘만인의 권리’가 존재한다. 누구든지 땅과 물에 난 모든 길을 다닐 수 있는 것은 물론 버섯과 산딸기, 야생화 등을 자유롭게 채취할 수 있다. 실제로 핀란드 가정의 절반 이상이 각종 야생 열매를 직접 따 먹는다고.
밤 9시. 검은 숲이 파란 하늘과 맞서는 듯하다. 나뭇잎은 더 이상 햇살을 반사하지 않고 깊고 푸른 고요가 수면에 내려앉는다. 자작나무가 수직으로 도열한 숲 사이에서 한 사내가 통나무를 고른다. 그 옆 낡은 오두막 굴뚝에선 희끄무레한 연기가 공중으로 사라지고 있다. 사우나 문을 활짝 열자 훈연 향이 뒤섞인 정밀한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검푸른 불빛이 새어 들어오지만, 내부는 동굴처럼 어둡다. 전통적으로 핀란드 사우나는 단순히 목욕하는 장소를 넘어 명상과 치료의 공간이자 심지어 출산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낼 때도 사우나는 꼭 거쳐야 하는 신성한 절차였다. “사우나에 들어가면 교회 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속담도 있다. 그러니 핀란드의 사우나가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듯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사우나를 처음 접했어요. 요즘에도 열흘에 한 번은 꼭 사우나를 하지요.” 핀란드관광청 담당자 사리 헤이(Sari Hey)가 카우하(kauha, 국자)를 건네며 말한다. “핀란드 사람은 ‘스몰 토킹’을 하지 않아요. 대체로 낯선 이와 쉽게 대화하지 않고, 인내심이 많죠. 반면에 사우나는 사교적 공간이에요. 이곳에서는 서로 많은 소식을 나누고 시사 문제를 토론하거나 농담을 즐기기도 합니다.” 카우하로 몸에 물을 끼얹자 뢰윌뤼(löyly, 증기)가 기름 끓는 소리를 내며 뿌옇게 피어오른다. 육중한 난로 시우아스(kiuas) 안에는 통나무가 활활 타고 있으리라. 수증기 열이 극에 달하자 그대로 호수로 뛰쳐나간다. 온몸을 잠식한 뜨거움이 순식간에 짜릿하게 얼어붙는다. 핀란드 사람이 사우나와 겨울 수영을 함께 즐긴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다. 피로를 물속에 던지고 스트레스를 풀며 새로운 생각을 품는 것이다.
10년 만에 가장 추운 여름날을 만난 사본린나(Savonlinna) 사람들은 저마다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움직이기 바쁘다.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남녀와 홍조 띤 얼굴로 수변을 따라 조깅하는 사람이 지나가고, 텐트와 묵직한 배낭을 동여맨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드문드문 서 있다. 레이크랜드 북동부의 아름다운 도시 사본린나는 하파베시(Haapavesi)호와 필라야베시(Pihlajavesi)호 사이의 두 섬에 걸쳐 자리한다. 여행자가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올라빈린나(Olavinlinna)성을 보기 위해서다. 덴마크 태생의 스웨덴 통치자 에리크 악셀손 토트(Erik Axelsson Tott)가 노르웨이의 왕 상트 올로프스보리(Sankt Olofsborg, 핀란드어로 올라빈린나)의 이름을 따서 15세기에 지은 웅장한 석조 요새. 50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호수 위 화강암 바위에 솟은 성은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가이드 이카 세톨라이넨(Ilkka Ketolainen) 옆에서 상트 올로프스보리 전신상이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북유럽 전역에서 올라빈린나의 동상이 발견되었지만, 그의 이름을 딴 성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좁고 높은 돌계단으로 연결된 3개의 탑을 돌아보려면 먼저 준비 운동을 좀 해야 할 거예요.” 세톨라이넨이 종탑(Bell Tower) 지층에 자리한 창고 문을 연다. “전쟁에 대비해 수많은 식량과 맥주, 옷가지를 보관하던 곳입니다. 천장에 보이는 작은 구멍이 유일한 출입구였죠. 식량은 소중하니까요. 군인들은 이곳에 머물며 임금의 일부를 맥주로 받았는데 하루에 5리터, 일요일에는 7리터를 받았다고 해요.” 성 내부는 사우나와 채플, 무기고, 안뜰 등을 갖추고 있어 흡사 작은 마을 같다. 어둡고 축축한 통로를 지나 새하얀 곡선형 천장, 길게 뻗은 나무 의자, 제법 널찍한 창문을 갖춘 긴 구조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17세기 초 왕의 연회 장소로 쓰던 곳입니다. 두 층 아래에 놓인 벽난로에서 생긴 뜨거운 공기로 난방을 하는 유일한 곳이죠. 이곳은 여전히 주요 행사장으로 사용합니다.” 왕의 홀(King’s Hall)에서 세톨라이넨의 목소리가 한층 유쾌해진다. “1달 후면 저도 이곳에서 결혼식을 치러요.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도 문제없겠죠?”
사본린나에서 나고 자란 세톨라이넨은 4년째 올라빈린나성의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 성에 올라 발틱해의 역사와 절대 얼지 않는 호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실제로 성의 남북 고도차로 유속이 심해 영하 30도가 되어도 호수가 얼지 않는다고. 이 급류는 러시아 함대에 맞서 성을 방어하는 데 지리적으로 최적의 요건이었다. 배가 급류에 중심을 잃고 전복되기 쉬운 지형이기 때문이다. 아마 세톨라이넨은 수백 번 반복하는 이야기겠지만, 그의 말에서는 이 요새가 500여 년간 사본린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오래된 믿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타워 꼭대기 너머로 보이는 호수에는 백조 조형물이 빠른 물결 위에 고정되어 있다. 거세진 바람을 헤치고 1달간의 축제를 막 끝낸 오페라 무대의 장막을 지나친다. 세톨라이넨은 이곳에서 곧 복싱 경기와 메탈 밴드의 공연이 열릴 것이라 덧붙인다.
화강암 암벽 위에 자리한 호텔 앤드 스파 리조트 예르비쉬덴의 로비. 사이마 호수를 오가던 선박을 그대로 실내로 들였다. 레이크랜드 미켈리의 대표 농장 테르티 마노르(Tertti Manor)에선 제철 과일로 만든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 신진주
은빛 자작나무 숲 사이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사본린나에서 다시 50킬로미터 떨어진 사이마 호수의 북쪽으로 향한다. 한참 동안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니 이윽고 화강암 암벽에 지은 통나무 건물과 현대식 빌라가 섞인 호텔 앤드 스파 리조트 예르비쉬덴(Hotel & Spa Resort Jarvisydan)에 다다른다. 막 스파를 끝낸 남녀가 하얀 가운 차림으로 자갈길을 걸어가고, 작은 망원경을 채비한 여행자들은 막 보트에 몸을 싣고 사이마 호수로 출발하려는 참이다. 엄청난 크기의 목제 선박을 그대로 들여놓은 로비에서 엘크 뿔 가루를 뿌린 슈납스를 전통 컵 쿡사(kuksa)에 담아 건네는 이가 있으니, 바로 11대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탄야 헤이스카넨(Tanja Heiskanen)이다.
1658년 러시아 황제와 스웨덴 왕이 핀란드를 횡단하는 도로 건설을 논의하면서 이 지역에 30킬로미터마다 숙소와 마구간을 지을 것을 명했다. 헤이스카넨(Heiskanen) 가문은 이때부터 숙박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가 연상되는 옷을 입은 헤이스카넨이 우아한 손짓으로 미로 같은 호텔 내부로 안내한다. 선박의 녹슨 부품과 낡은 도끼, 박제, 세계지도, 대대로 사용해온 오래된 연장과 쓸모를 알 수 없는 공예품이 벽을 장식하고, 나무 바퀴는 테이블의 일부가 되었다. 통나무 서까래 아래 커다란 석조 벽난로를 지나 복도를 비추는 미세한 불빛을 따라가다 보니 곧 낯선 모험을 떠날 여행자의 마음에 호기로움이 솟는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배를 타야 해요. 호수에 부는 바람은 날카로우니 따뜻한 옷을 챙겨 입으세요.” 헤이스카넨이 40년 된 목제 선박 아르미타(Armiita)호의 밧줄을 능숙하게 풀어낸다. 선착장을 떠난 배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이 흩어져 있는 린난사리 국립공원(Linnansaari National Park)으로 들어선다. “운이 좋으면 사이마고리무늬물범(Saimaa Ringed Seal)을 만날지도 모르죠.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친구라 쉽지 않을 겁니다. 사이마 호수에 서식하는 물범은 360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거든요.” 동행한 트레킹 가이드 헤이디 후르스카이넨(Heidi Hurskainen)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다행히 국제자연보전기금(WWF)과 시민의 지속적 노력으로 조금씩 개체 수가 회복되고 있어요.” 보트가 출발한 지 15분 정도 지나 카르넷사리섬(Kaarnetsaari Island)에 도착한다. 선착장 앞 붉은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는 트레킹 가이드를 제외하면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무심코 땅을 내려다보니 제멋대로 난 풀 사이에 산딸기와 버섯이 지천이라 깜짝 놀란다. 핀란드 실정법에서 명시하는 만인의 권리를 떠올리며 노란 버섯 하나를 주워 흙을 툭툭 털어내고 입에 넣는다. 쫄깃하고 알싸하다. “백조가 섬으로 날아와 베리를 주워 먹는 계절이죠!” 후르스카이넨이 웃으며 숲속에 있는 보호 센터로 향한다.
린난사리 국립공원을 찾는 이에게 사이마고리무늬물범 영상을 보여주는 일은 후르스카이넨의 업무 중 하나다. 영상 속 물범은 이름대로 흰 고리무늬가 등에 한가득 그려 있다. 얇아진 호수 얼음을 코로 깨는데, 숨을 고르는 콧구멍이 흡사 고릴라를 닮았다. 물속에서 어린 물범이 얼음 위로 올라가려고 수차례 배 치기를 시도한다 “사이마고리무늬물범은 호수 빙판에 쌓인 눈을 모아 새끼 둥지를 만드는데, 최근 기후변화로 적당한 장소를 찾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올해 태어난 새끼 물범 81마리 중 90퍼센트가 인공 장치인 스노 뱅크(snow bank)에서 태어났답니다.” 2014년에는 사이마 호수에 눈이 쌓인 곳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스노 뱅크가 없었다면 새끼 중 절반은 죽을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자, 이제 사이마 지역에서 만든 소시지를 구워보세요. 핀란드 팬케이크도 있습니다!”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피우고 쇠꼬챙이에 꽂은 소시지를 굽는다. 핀란드 사람이 하루 평균 9잔을 마신다는 커피도 주전자에 담아 불 위에 올린다. 돌아오는 선착장에서는 후르스카이넨이 그물망에 넣어 호수에 담가둔 샴페인을 꺼내 쿡사에 1잔씩 따라 준다. 노란 버섯을 안주로 곁들여 마시는 샴페인 맛이 기막히다.
아르미타호가 다시 호수에 고요한 물결을 만들며 뭍을 향해 나아간다. 혹시나 사이마고리무늬물범의 콧구멍이 물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 호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유리처럼 말간 호수는 데칼코마니처럼 숲을 그대로 담아내고, 멀리서 딱따구리가 나무 기둥을 명랑하게 쪼아댄다.
글. 신진주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에디터였으며, 현재 프리랜서 여행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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