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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Sep 11. 2015

서울 24시간 소풍 가이드

국어사전에 따르면 소풍(消風)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야외에 나갔다 오는 일”을 뜻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별다른 준비나 계획 없이 내키는 곳으로 나가도 좋다는 뜻일 테다. 오늘 하루, 온종일 서울에서 소풍해보기로 했다. 도시 속 푸른 섬을 찾아 연희동에서 방이동으로, 방이동에서 이촌동으로. 그런데, 오늘 날씨가 어떻더라?


 이기선 ・ 사진 이규열



Morning 숲 속의 소풍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의 아침. © 이규열

서울에 숨을 수 있는 숲이, 그것도 시내 한복판 연희동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남산보다 약간 높은 해발 295미터의 안산은 지하철 독립문역이나 무악재역에서 내려 몇 분만 걸으면 닿을 수 있다. 걷기 편한 안산자락길이 산을 1바퀴 감싸는데, 이곳에 서울에선 보기 힘든 메타세콰이어 숲도 있다. 여기야말로 서울 소풍을 상쾌하게 시작하기에 딱이다. 이른 아침, 배낭에 물통과 바나나만 넣고 출발!


오늘의 출발점은 무악재역. 이쪽으로 올라가면 금방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역 3번 출구 앞 편의점에 들러 콤보(Combo) 크래커를 1봉지 사 들고 가파른 골목길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금세 정갈한 나무 덱이 나온다. 아침부터 산책하는 이가 꽤 많다. 무장애(barrier-free) 숲길인 안산자락길은 환경친화적으로 설계했다. 나무를 헤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구간에는 덱에 구멍을 내어 나무가 자라게 했다. 덕분에 제대로 숲 속을 걷는 기분이 난다.

아침은 숲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 오늘은 살짝 안개가 낀 덕분에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안산을 시시한 동네 뒷산으로만 알았다면 오산. 높이는 낮지만 산세가 험하고 호랑이까지 득실거려 조선 시대에는 군사의 호위를 받아야 넘을 수 있었다고. 시내에서 고작 몇 걸음 들어왔을 뿐인데 숲이 꽤 울창해 딴 세상 같다. 무성한 나뭇잎을 통과한 햇살이 몽환적으로 빛나고, 멋스럽게 휘어진 나무 몸통은 힘차게 붓질을 한 듯하다. 숲 냄새도 훨씬 짙고. 동행한 사진가는 어릴 적 포천수목원을 놀이터 삼아 드나든 덕분에 수종(樹種)을 잘 알려준다. 아까시나무, 참나무, 벚나무, 편백나무, 잣나무. 그의 말에 따르면 안산은 큰 나무가 없는 대신 수종도 다양하고 잡목이 많아 예쁜 산이라고. 머리 위 햇살을 가리는 무수한 나뭇잎의 그림자가 하도 곱고 예뻐, 자주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음이 더없이 평화로워져 내내 미소를 머금고 조잘조잘 떠들며 걷는다. 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엿보이는 잿빛 풍경이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까치와 다람쥐, 제비꽃과 밤송이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메타세콰이어 숲에 이른다. 하늘 높이 수직으로 뻗은 나무가 빽빽하고, 어디선가 토토로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들뜬 마음으로 걷던 메타세콰이어 길이 끝날 무렵, 자락길을 이탈해 가파른 흙길로 방향을 바꾼다. 안산 정상의 봉수대로 가기 위해서다. 정상에선 끝내주는 서울 경치를 볼 수 있다. 생각보다 등산로가 가팔라 숨이 가빠질 즈음, 때마침 눈에 들어온 평상에 앉아 챙겨온 바나나와 크래커로 원기를 보충한다. 얼마 안 가 정상에 다다랐다. 그런데 아뿔싸! 오늘은 사방에 안개만 자욱하다. 가까운 남산타워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보일 뿐. 맑은 날, 여기서 360도 파노라마를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서쪽으로 우뚝 솟은 북한산과 그 너머 북악산, 천마산까지. 동쪽으로는 한강과 국회의사당까지. 오늘은 그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 숲과 서대문형무소 정도만 보인다. 뭐 오늘만 날인가? 숲길 산책이 즐거웠으니 됐다.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미련 없이 하산.



PICNIC GUIDE

무엇을 챙겨야 할까? 배낭, 물통, 자외선 차단제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산책, 수종 알 아맞 히기, 돌 위에 앉아 명상하기, 서울 시내 전망 감상
알맞은 만찬 바나나, 크래커, 물
읽을 만한 책 도시의 숨은 자연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수요일은 숲요일>(북노마드, 1만6,000원), 위안을 주는 식물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 <반려식물>(지콜론북, 1만3,000원)
근처에 갈 만한 곳 연희동 카페 거리


Afternoon 공원의 피크닉

‘나홀로나무’가 있는 몽촌토성의 잔디밭. © 이규열

산에서 내려오니 휴식이 간절하다. 그래, 등산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소풍은 풀밭 위에 누워 배불리 먹고 한없이 늘어지는 게 제맛이지. 올림픽공원으로 차를 달리는 길, 마치 낙원으로 향하는 듯한 기분이다. 드디어 도착! 역할을 바꾸는 배우처럼 차 트렁크에 배낭을 집어넣고 피크닉 바구니를 꺼낸다.


올림픽공원은 정말로 낙원일까 아닐까? 여기엔 별의별 게 다 있다. 백제 사람이 이곳의 구릉 지형을 이용해 진흙을 쌓고 해자를 판 지 1,500년 후, 토성은 푸르른 잔디로 뒤덮였고 해자는 호수가 됐다. 그 주변에 경기장과 공연장, 조각 공원, 미술관에 커피숍과 한식 레스토랑까지 생겨났다. 모든 나무와 잔디를 단정하게 가꿨고, 2인용 자전거와 호돌이열차가 산책길을 누비며, 온종일 공원 곳곳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클래식, 재즈, 팝송, 국악까지 장르도 골고루. 여기 오면 모두가 각자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오늘 우리가 찾는 것은 경치가 멋진 풀밭. 올림픽공원이 낙원이 맞다면 그 증거는 몽촌토성이다. 완만하고 푸른 구릉이 멜로디처럼 오르락내리락 펼쳐지는데, 길이가 2.7킬로미터에 이른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구릉은 한복판에 ‘나홀로나무’가 덩그러니 서 있는 그림 같은 풍경으로, 최근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여름과 가을을 맞아 토성의 잔디를 개방하니 천국의 동산에서 피크닉을 즐길 기회. 슬슬 걸어 나무가 있는 구릉에 도착하자 비현실적인 광경이 나타난다.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초원.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다. 곳곳에 담요를 펼쳐놓고 앉아 속삭이는 연인, 홀로 독서에 열중한 이도 보인다.

작정하고 제대로 피크닉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피크닉 경험이란 봄날 샴페인 1병과 딸기 1팩, 비닐 매트, 휴대용 스피커만 달랑 들고 공원에 가서 즐긴 것 정도. 최근 빈티지한 스타일의 피크닉이 유행하면서 고급 피크닉 전용 제품도 시중에서 판매하지만, 사실 피크닉은 거창한 게 아니다. 간단한 음식과 평소 즐기는 놀 거리를 챙겨 가까운 풀밭으로 나오면 그만. 단, 이번에 깨달은 사실인데 잘 챙긴 담요 하나만으로 피크닉의 화룡정점을 찍을 수 있다. 수수한 리넨 담요라도 펼쳐놓으면 그 위에 뭘 놓아도 근사해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까. 풀밭 위에 파란색과 흰색 스트라이프 매트를 깔고 만찬을 차린다. 아까 공원의 빵집에서 사 온 샐러드에 바게트, 주스와 초콜릿 칩 쿠키, 바나나와 복숭아. 여기에 향초까지 켜니 제법 피크닉 기분이 난다. 배불리 먹고, 우쿨렐레를 연습하고, 신나게 떠들고, 만화책을 뒤적거리다 신발을 벗고 풀밭에 드러눕는다. 하늘이 이렇게 파랬던가? 자연으로 떠나는 소풍은 분명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일 것이다. 산으로 계곡으로 유람을 즐겨 떠났다던 조선 시대 선비가 떠오른다. 그들도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올림픽공원 5am~12am, 몽촌토성 잔디는 10월 31일까지 개방, olympicpark.co.kr


PICNIC GUIDE

무엇을 챙겨야 할까? 피크닉 매트와 바 스켓, 향초, 휴대용 스피커, 우쿨렐레, 모기 퇴치 스프레이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악기 연주, 토끼에게 먹이 주기, 카드놀이, 낮잠 자기
알맞은 만찬 샌드위치, 바게트, 천도복숭아, 주스, 초콜릿 칩 쿠키
읽을 만한 책 어른 아이를 위한 만화책 <고스트 월드>(세미콜론, 8,000원)
근처에 갈 만한 곳 프로퍼 커피 바, 한미사진미술관


Night 한강의 소풍

이촌 한강공원에서 LG 미니빔 TV PV150G를 사용해 영화를 보고 있다. © 이규열

해는 하루의 마지막 빛을 내뿜고, 한강은 붉은 비늘을 단 듯 번쩍이고, 저 멀리 남산타워와 빌딩 숲은 검은 그림자로 잠긴다. 황홀한 광경을 보는 일행의 속마음은 살짝 지쳐간다. 노들섬 너머 여의도에 지는 해를 보기 위해 겁도 없이 퇴근 시간에 한강을 건너 이촌 한강공원으로 가는 일정을 짠 탓이다. 휴일이라면 괜찮았겠지만. 아슬아슬하게 석양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63빌딩과 여의도 풍경이 낭만적이지만, 기대하던 화려한 석양의 모습과는 좀 다르다.


그래도 괜찮다. 선선한 바람도 불겠다, 우리에게는 긴 밤이 남아 있으니까. 억새풀과 코스모스 사이를 걸어 주차장 옆의 아담한 풀밭에 도착한다. 이촌 한강공원은 농구장, 테니스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을 보유하고 있어 갖가지 스포츠를 즐기기 좋은 장소다. 하지만 오늘밤 마지막으로 즐길 소풍은 한강 변에서 영화를 보는 것. 풀밭 한쪽에 조촐하게 야외 영화관을 마련한다. 빔 프로젝터와 휴대용 스크린, 캠핑용 의자와 테이블, 램프. 바람이 생각보다 거세 스크린이 쓰러지지 않도록 전용 피크로 단단히 고정시킨다. 검은 하늘을 천장 삼아 즐기는 밤의 소풍은 살짝 캠핑 분위기가 난다. 캠핑용 의자에 푹 파묻혀 영화 <문라이즈 킹덤(Moonrise Kingdom)>을 틀어놓으니 머릿속이 텅 비고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동화 같은 아기자기한 장면들이 넘어가고, 그 너머로 풀밭 위에 누워 있는 이, 조깅하는 이, 검은 강물을 떠가는 반짝이는 유람선이 보인다.

영화 속 소년과 소녀처럼 서울의 푸른 섬에 숨어 소풍하며 지낸 하루. 아이러니하게도 전에 없이 이 도시와 가까워진 듯하다. 안산에서는 안개에 휩싸인 서울 시내가, 올림픽공원에서는 바벨탑 같은 롯데월드 타워가, 한강공원에서는 휘황찬란한 마천루가 보였다. 서울의 숲과 풀밭은 도시가 숨기고 있던 또 다른 맛이다. 영화가 끝나간다. 소년과 소녀도 결국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만 그냥 여기, 보이지 않는 별 아래서 잠들어버릴까?



PICNIC GUIDE

무엇을 챙겨야 할까? 휴대용 빔 프로젝터, 의자, 램프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한강 야경 보기, 영화 감상
알맞은 만찬 맥주, 편의점 치킨
볼 만한 영화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의 <문라이즈 킹덤>
근처에 갈 만한 곳 카페 테이스트릿


이촌 한강공원에 걸쳐 있는 한강대교의 밤. © 이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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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24시간 소풍 가이드 P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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