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에 머문 예술가는 뜻밖의 풍경과 조우하며 영감을 얻었다. 그들의 시선을 좇으며 일상을 빛낸 삶의 예술을 발견한다.
“눈은 절대 내리지 않을 겁니다. 수십 년 동안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르 피고네(Le Pigonnet) 호텔 컨시어지의 단호한 말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온 도시를 집어삼킬 듯 부는 비바람은 이내 먼지 같은 눈발로 뒤바뀐다. 차창 밖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격렬하게 춤을 춘다. 겨우내 푹 가라앉은 심신을 달래줘야 할 남프랑스의 햇살은 자취를 감춘 모양이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남프랑스에서 가장 젊은 도시라는 이야기 또한 곧이곧대로 믿긴 힘들다. 거대한 애플 스토어와 네스프레소 매장이 중심가를 꿰차고 있지만, 고풍스러운 중세도시 분위기 속에선 무기력한 자태다. 그 대신 오늘날 레스토랑, 상점, 박물관으로 변모한 옛 부호의 대저택을 지나칠 때마다 가이드는 옆집 숟가락 개수를 읊듯 과거의 영예를 자랑한다.
늘쩡늘쩡한 노인의 걸음처럼 엑상프로방스는 시류에 떠밀리지 않고 서서히 변화해왔다. “이곳 인구 절반이 은퇴한 노인입니다.” 구시가 투어를 맡은 엑상프로방스 관광안내소의 담당자가 의연하게 말한다. 나머지 절반은 ‘젊은’ 학생이 차지한다. 유수의 대학교가 모여 있는 엑상프로방스는 ‘지성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노부부가 노천 레스토랑에서 우아한 식사를 즐기는 동안 얼굴에 온갖 피어싱을 한 대학생은 노점에서 파는 2유로짜리 크레페로 점심을 때운다. 무얼 먹든 세대를 초월한 이들은 하나같이 한낮에 들이치는 노란 햇살에 삶의 경이를 표하는 듯 보인다. 일찍이 인생에 필요한 행복의 질량을 깨달은 것처럼.
폴 세잔(Paul Cézanne)이 엑상프로방스에서 여생을 보낸 시기는 늙어서도, 젊어서도 아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나고 자랐고, 영혼의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지독한 우울증을 앓던 그는 파리 주류 미술계에서 밀려난 예술적 자존감을 고향에서 회복했다. 절친했던 에밀 졸라(Emile Zola)와 매일 밤 카페에 앉아 예술을 논하고 도시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화폭을 개척해나갔다. 엑상프로방스의 모든 풍경은 세잔의 캔버스에 담겨 작품이 됐다. 생트 빅투아르산(La Montagne Sainte-Victoire)은 그의 시선이 머문 대표 장소다. 그는 말년에 매일 언덕에 올라 사이프러스 나무 틈에 걸린 바위산을 바라보며 수십 점의 작품에 담았다. 전망 포인트로 알려진 화가의 테라스(Terrain des Peintres)에는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화가를 알려주는 팻말이 박혀 있다. 세잔의 시선을 따라 온 모든 예술가가 이 목가적 풍경을 찬미했으리라.
엑상프로방스에서 자연 풍경이 먼저인지 예술 속 그림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도심 곳곳에 남아 있는 세잔의 흔적을 보라. 위엄 있는 동상, 돌바닥에 새겨진 이니셜 ‘C’, 삶의 무대가 된 생가와 손수 꾸민 아틀리에까지.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세기의 화가가 남긴 작품을 따라 여행하며, 풍경과 예술의 경계를 맴돈다. 도심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세잔 아틀리에(Atelier de Cézanne)는 자연의 인자함을 자각하고 작품에 몰두하던 세잔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 그는 사물과 풍경에 온 감정을 이입해 붓을 움직였고, 후대 미술사를 뒤흔든 걸작이 탄생했다. “이 작업실은 미술관이 아닙니다. 세잔 이외의 다른 것을 찾으러 오지 마세요.” 세잔 아틀리에의 안내문에 적힌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도시를 일군 건 대학생과 노인이 아닌, 고뇌에 가득 차던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세잔의 아틀리에를 빠져나오니, 그제야 이방인을 감싸주는 따뜻한 볕이 천천히 몸을 녹이기 시작한다.
수십 척의 배가 정박한 마르세유(Marseille) 구 항구(Vieux Port)에 도착하자 막 상경한 사람처럼 시선이 바쁘게 돌아간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크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이자 지중해 연안 최대 항구. 그리고 낯선 여행자에겐 위험한 도시. 엑상프로방스가 남프랑스의 전형적 전원을 대표한다면, 마르세유는 자유로운 영혼이 들끓는 관광 도시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약 2,600년의 역사를 이어온 마르세유의 여러 단면은 각국에서 넘어온 이민자만큼이나 다채롭다. 기원전 600년경 고대 그리스 선원이 이 땅에 정착한 이후, 수많은 이방인이 항구에 밀려 들어왔다. 자치 국가로서 힘이 없을 때는 약탈과 식민지 건설의 희생자였고, 도시가 비약적 부흥을 이뤘을 때는 자본의 냄새로 그들을 이끌었다. 지중해 항해 도중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예 눌러앉은 이도 적지 않다. 덕분에 마르세유에는 인근 유럽 도시뿐 아니라 아프리카, 터키, 아시아 문물과 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도시의 모태인 항구는 문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석회암 언덕에 우뚝 솟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Basilique Notre–Dame de la Garde)의 황금빛 성모마리아는 항구를 드나드는 뱃사람을 오랫동안 지켜왔다. 여행자의 나침반처럼 어디서든 눈에 띄는 종탑의 금동상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자 어둠을 밝히는 등대다. 19세기 로만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성당은 중세 종교예술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행자 사이에선 도심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공짜 전망대로 더 유명하지만. “저 멀리 기이한 주택 단지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이에요. 저기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선박 회사 빌딩도 보이나요?” 마르세유 관광안내소 담당자 시릴 사부아(Cyrille Saboya)가 손가락으로 바다 너머 풍경을 열심히 가리킨다. 마르세유는 2013년 유럽 문화의 도시로 선정되면서 백팔십도 탈바꿈했다. 뱃사람이 들끓던 항구 이미지는 이제 빈티지 포스터에만 남아 있을 뿐, 새롭게 이식한 현대 건축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한다.
현지인이 체감하는 도시의 급진적 변화도 2013년 전후로 나뉜다. 정부가 대대적인 재개발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아이콘은 유럽 지중해 문명 박물관 뮤셈(MuCEM)이다. 대형 그물망이 건물을 뒤덮은 듯 보이는 건물은 세계적 건축가 뤼디 리키오티(Rudy Ricciotti)의 작품. 그는 현대 건축물이 마르세유 항구의 주변 경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 오래 골몰했을 것이다.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박물관이 해풍에 부식될 가능성과 중세 시대부터 항구를 지켜온 생장 요새(Fort St-Jean)와 연결점도 감안해야 했으니까. 그는 초강력 콘크리트를 촘촘하게 꼬아 독특한 파사드를 완성했고, 요새까지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놓았다. 건축가의 기발한 발상으로 탄생한 뮤셈은 사방으로 기이한 장면을 연출한다. 박물관 내부에는 외벽과 맞닿은 복도가 있는데,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지중해의 바람과 햇살이 쉼 없이 드나든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넘실대는 그림자는 한 편의 몽환적인 작품 같다. “뮤셈은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자유와 조화 그리고 개방적인 자연요.” 사부아는 박물관 옥상 테라스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현지인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마르세유에 입성한 예술가는 도시 구석구석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곤 한다. 관람객을 가득 싣고 떠나는 유람선의 행선지는 이프성(Château d'If)이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몽테 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1844)에 등장한 감옥 말이다. 그는 외로운 바위에 견고하게 세운 성을 배경으로 처참하고 절망스러운 감옥을 표현했다. 중세 시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정치범을 수용했던 감옥은 오늘날 관광객이 끊임없이 드나들지만 황량한 분위기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이집트 출신의 유세프(Youssef)가 예술가의 공방이 모여 있는 르 파니에 지구(Le quartier du Panier)에 터를 잡은 이유는 뒤마처럼 걸작을 탄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오래된 집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야외 부엌을 작업실 삼아 매일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작품이 지중해의 빛을 쬐도록 마당 여기저기에 걸어두면서. “파니에 언덕은 마르세유의 몽마르트예요. 골목마다 저 같은 아마추어 예술가가 숨어있죠.” 그가 테이블에 펼쳐둔 그림을 하나씩 설명하며 말한다. 마르세유 전통 마을, 구 항구에서 잡아 올린 생선 등 강렬한 색감이 돋보이는 유세프의 그림은 10분 만에 끝냈다고 믿기 힘들 만큼 완성도가 높다.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그저 떠오르는 것을 그려요. 이곳에선 모두가 예술가니까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평화로운 아틀리에를 빠져나오자 프랑스 인기 드라마에 등장한 ‘범죄의 바’가 불현듯 나타난다. 마르세유의 이면은 이처럼 의외성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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