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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n 18. 2018

아이다호의 좋은 삶



아이다호의 좋은 삶


괴짜 도시 보이시부터 드넓은 황야와 소투스 국유림을 거쳐 헤밍웨이의 마지막 발길이 머문 마을까지 시적인 여정을 떠난다. 별나고 외딴 미국 아이다호만의 삶을 찾아서.

구릉이 낙타 등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캐멀스 백 공원에서 내려다본 아이다호의 주도 보이시 도심 전경. © 정수임





보이시 사람의 중요한 임무


모던 호텔 앤드 바의 로비와 객실. © 정수임

보이시(Boise)에서 한밤중에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8번가에 늘어선 레스토랑과 바 중 1곳에 늘어져 있거나, 모던 호텔 앤드 바(Modern Hotel & Bar)의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워 리모컨을 누르거나. 39번 채널에서는 언제나 39 룸스 필름 페스티벌(39 Rooms Film Festival)이 상영 중이다. 모던 호텔이 세계 각국의 단편영화 39편을 직접 엄선해 호텔 내 텔레비전으로 연속 상영하는 깜짝 이벤트다. 1960년대 모텔을 개조한 이 부티크 호텔의 매력은 모순에 있다. 바스크 여인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는 로비와 연결된 레스토랑은 여느 미국 모텔이 그렇듯 지극히 조촐한 아침 식사를 낸다. 식은 빵과 잼, 우유와 시리얼, 보온병에 담긴 블랙 커피. 해가 지면 바로 그 자리에 앉아 고수와 재스민 라이스를 곁들인 메기 요리에 더글러스 퍼(Douglas Fir), 바랑코(Barranco, 화구뢰) 같은 친환경적 이름이 붙은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메뉴판을 들고 식자재를 공급해준 현지 농장과 빵집, 사이더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읽는 동안, 옆자리에서는 잠이 덜 깬 동료 투숙객 대신 한껏 빼 입은 손님이 상대방과 대화를 잇기 위해 거의 고함을 질러대고 있으리라.


폴 오스터(Paul Auster)의 소설 <달의 궁전>에서 클라리넷 연주자이던 주인공의 삼촌이 잘 팔리지도 않는 백과사전 외판원으로 일하다 죽은 도시. 혹은 영화 <라라랜드>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에마 스톤과 다툰 뒤 밴드 순회 공연을 하러 떠난 도시. 미국 대중문화에서 보이시는 이처럼 경계에 걸쳐 있는 도시의 대명사로, 종종 블랙코미디적 상황에 기여하기도 했다. 1820년대 프랑스계 캐나다인 모피 사냥꾼도 비슷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종일 사막과 황무지를 걷던 그들은 이곳에 이르러 “숲! 숲이다(Les bois)!” 하고 외치며 ‘나무의 도시’라는 뜻의 보이시라 이름 붙였다. 로키산맥 등뼈를 품어 한반도만 한 땅덩어리를 포괄하지만, 이웃한 와이오밍주(옐로스톤 국립공원을 품고 있다)와 달리 국립공원 하나 없는 아이다호의 주도. 오랫동안 감자 생산지로만 알려져온, 이름도 독특한 보이시. 어떤 연유로든 보이시까지 발길이 닿아 모던 호텔 앤드 바에 짐을 푼 이는 선입견과 실제 사이의 간극에 놀라움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이것은 아직 여행의 서막에 불과한데도.



보이시 근교의 친환경 와이너리 비트너 비니어즈. 골디스 브렉퍼스트 비스트로의 프렌치 토스트. © 정수임

아침 해가 비추는 낮은 건물이 들어선 도심을 어슬렁어슬렁 누빈다. 사무용 건물, 세련된 바버 숍을 지난다.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도는 이단하 아파트먼츠(Idanha Apartments) 1층에는 구루 도너츠(Guru Donuts)가 자리한다. 이웃 도시 포틀랜드의 부두 도너트(Voodoo Doughnut)를 떠올리게 하는 작명에, 인도인 구루를 알폰소 무하풍으로 그린 벽화가 장식하고 있지만 사워도, 마차 맛, 라즈베리 맛처럼 메뉴는 얌전하다. 쇼케이스 위에는 현지산 달걀과 밀가루만 사용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어쩌면 이것이 보이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포틀랜드를 꿈꾸는 듯 괴상해 보이지만 속은 더없이 순박한.


아침 식사와 브런치를 먹으려는 보이시 주민이 영업시간 내내 줄을 서는 골디스 브렉퍼스트 비스트로(Goldy’s Breakfast Bistro)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사거리 카페 골디스 코너(Goldy’s Corner)로 잠시 후퇴한다. 오늘의 별자리 운세와 십자말풀이란을 오려 붙여놓은 카운터에서 엄청나게 상냥한 직원이 활짝 웃으며 주문을 받는다. 커피를 들고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맞은편에 현대적 외관의 시청사가, 몇 블록 너머에는 아이다호 주청사의 육중한 돔이 보이고, 대각선 방향으로는 1920년대의 기념비 같은 디 이집션 시어터(The Egyptian Theatre)가 자리한다. 투탕카멘 무덤이 새로 발견되고 아르데코와 이집트풍 건축이 유행한 이른바 ‘광란의 1920년대’ 분위기에 젖어, 카이로 수준의 뙤약볕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자니 곧 골디스 브렉퍼스트 비스트로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웨이터가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는 비스트로의 실내에 앉아 이곳의 특제 시즈닝을 뿌린 감자와 메이플 소시지, 팬케이크로 배를 채운다. 이제 보이시의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끝냈다. 다음 코스는? 근교 스네이크 리버 밸리(Snake River Valley)에서 양봉 생물학자 가족이 운영하는 비트너 비니어즈(Bitner Vineyards)에 들러 달콤한 유기농 와인을 홀짝이는 것이다. 





근원을 찾아서


라피티 수백 점이 그려진 프리크 앨리 갤러리의 외벽. © 정수임

프리크 앨리 갤러리(Freak Alley Gallery)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시점이 분명 지금은 아닐 것이다. 갈아엎은 도로 위에서 굴착기와 노란 안전모를 쓴 인부들은 무참한 소음과 작열하는 햇살 속을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이곳에 걸맞은 배경이라 할 만하다. 8번가와 9번가 사이 골목과 주차장을 그라피티로 가득 채운 거대한 야외 갤러리에는.


시작은 2002년 겨울, 창립자 콜비 애커스(Colby Akers)가 문스 키친 카페(Moon’s Kitchen Cafe) 뒷문에 운영자의 허락을 받고 흑백의 그라피티를 그리면서부터다. 프리크 앨리 갤러리는 이제 보이시의 필수 명소가 되었고, 이제까지 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당시의 문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최초 작품 위에는 이름 모를 작가들이 저마다 창작 욕구를 펼쳐놓았다. “지우기를 포기했어요.” 애커스가 말한다. 얼굴의 문신에 어울리는 수염을 기르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긴 나무 막대를 들고 다니는 그는 보이시 예술계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참여하는 작가에게는 어떠한 문턱도 없어요. 단지 마음대로, 최대한 이상하게 그리라고 부탁하죠. 일반인도 사전에 신청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요.”




보이시 파머스 마켓에 처음 참가한 태미(Tammy)와 아들 사이러스(Cyrus)는 근교 니사(Nyssa)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 정수임

예술의 세례를 흠뻑 받은 뒤에는 바로 뒤쪽 8번가의 레스토랑 주니퍼(Juniper)에서 미각을 깨우면 된다. 1900년대 초의 층고 높은 건물에 들어선 이곳은 보이시에서 유기농 다이닝을 처음 내세운 곳 중 하나. 철마다 바뀌는 메뉴판에는 식자재를 하나하나 적어놓았다. 현지 풀을 먹고 자란 소, 스네이크강(Snake River) 농장의 햄, 아이다호 송어 등. 저녁에 ‘커트 앤드 캐치 오브 더 데이(Cut & Catch of the Day)’라는 메뉴를 주문하면 바로 그날 잡은 해산물을 활용한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좋은 식자재에 대한 보이시 사람들의 열광은 보이시 파머스 마켓(Boise Farmers Market)에서 극에 달한다.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도심에서 열리는 이 시장에서는 보이시 일대의 농부와 생산자가 저마다 자랑스럽게 생산물을 내보인다. 예쁘게 포장한 유기농 채소 부스부터 로컬 사이더리와 와이너리 부스, 수제 치즈와 초콜릿, 잼, 화장품, 푸드 트럭까지.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내려주는 네카 커피(Neckar Coffee) 트럭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은 뙤약볕에서 기꺼이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직접 만든 캐릭터 티셔츠를 입은 운영자 그랜트 실리(Grant Shealy)와 수다를 떤다. “네커 입방체(Necker Cube)를 고안한 학자 루이스 앨버트 네커(Louis Albert Necker)에서 로스터리 이름을 땄어요.”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실리가 말한다. “파머스 마켓에는 6년간 참여해왔고, 몇 주 후면 바로 저 골목에 첫 카페를 열 거예요. 사람들의 얼굴에 1초라도 미소가 떠오르는 게 제 사업 목표예요. 어떻게 하면 좋은 커피를 내리느냐고요? 저는 늘 좋은 원두로 시작하라고 말해요.”




캐멀스 백 공원은 보이시 주민이 즐겨 찾는 휴식처다. 공원 잔디밭에서 슬래클라이닝을 연습하는 존 그린. © 정수임

보이시의 너그러운 자연은 식도락뿐 아니라 활기찬 아웃도어 활동에까지 기여한다. 이튿날 도시 북쪽 자락의 캐멀스 백 공원(Camel’s Back Park) 구릉 꼭대기에 서서 숨을 고르는 참이다. 노란빛과 보랏빛 야생화가 만발했고, 햇살은 온몸에 약처럼 내리쬔다. 태양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는 기분이다. 운동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활기차게 지나간다. “날씨 정말 좋죠?”라고 인사를 건네며. 푹신해 보이는 수목에 감싸인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나무의 도시’라는 보이시의 별명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도시 반대편으로는 소투스 국유림(Sawtooth National Forest)과 로키산맥까지 이어지는 구릉 위로 모험을 보장하는 오솔길이 아득히 뻗어 있지만 오늘의 모험은 여기까지다. 다시 공원으로 내려와 나무 사이에 긴 줄을 설치하는 존 그린(John Green)을 만난다. YMCA의 파트타임 클라이밍 강사로 일하는 그는 짬이 나면 오늘처럼 공원에서 슬래클라이닝(slacklinging, 줄타기) 연습을 한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 후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맨발로 줄 위를 흔들흔들 걷기. 비록 매번 절반쯤 가서 풀밭에 착지하고 말지만 동작은 우아하고 춤을 추는 듯 보인다. “이건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균형을 잡고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죠.” 운동의 효과인지 그린이 더없이 차분하게 말한다.



보이시 도심 바로 인근에서 서핑과 카야킹을 즐길 수 있다.보이시강을 따라 이어지는 그린벨트는 옛 공장 지대에 조성했다. 에스터 심플로트 공원(Esther Simplot Park,

 보이시 도심 바로 인근에서 서핑과 카야킹을 즐길 수 있다. 보이시강을 따라 이어지는 그린벨트는 옛 공장 지대에 조성했다. 에스터 심플로트 공원(Esther Simplot Park, 사진)과 가든 시티, 앤 모리슨 공원(Ann Morrison Park), 줄리아 데이비스 공원 등 여러 명소를 한 번에 잇는 코스이기도 하다. © 정수임


보이시는 잘 갖춰진 그린 바이크 시스템을 자랑하고, 보이시강(Boise River)을 따라 자전거 도로인 보이시 리버 그린벨트(Boise River Greenbelt)도 갖추고 있다. 무려 48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길은 도심과 접근성이 높아 보이시 사람들의 출퇴근로 역할까지 한다고. 늦은 봄날 오후를 더 기분 좋게 보내려는 이들로 북적이는 파예트 브루잉 컴퍼니(Payette Brewing Company)에서 출발해 캐나다 구스가 노니는 강가를 달려본다. 최근 아티스트 커뮤니티로 떠오르는 가든 시티(Garden City) 옆을 지나는 김에 창고를 개조한 로스터리 카페에 들러 카페인을 충전한다. 강가에서 일광욕과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니 미술관과 박물관이 모여 있는 줄리아 데이비스 공원(Julia Davis Park)이다. 1840년대 골드러시 때 이주자들이 금을 캐러 서부로 향하던 오리건 트레일(Oregon Trail)이 정확히 이곳을 통과한다고. 강변의 숲에 해먹을 걸어놓고 피크닉을 즐기는 이들 위로 웅장한 산자락이 빼꼼 보인다. 곧 저곳으로 떠날 작정이다.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소투스 국유림에서 주운 거대 솔방울로 다음 행선지인 포틀랜드의 호텔 직원에게 부러움을 샀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진가 정수임이 아이다호 여정에 동행했다.





글. 이기선            사진. 정수임






아이다호의 좋은 삶 Part. 2 - 소투스 국유림 & 케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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