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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n 21. 2018

독일 바우하우스의 끝과 시작

아방가르드, 누벨바그, 보사노바 등 시대를 뒤흔든 예술 사조는 사라진 뒤에도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신기루처럼 출현한 조형 학교 바우하우스의 유산을 좇으며 모더니즘의 흐름을 따라가보자.





BACK TO THE BAUHAUS

독일 바우하우스의 끝과 시작 



자동차, 기차, 항공기, 드릴 심지어 치약에 이르기까지. ‘Made in Germany’에 대한 세간의 신뢰는 굳건하기만 하다. 실용적이면서 견고하며 절제된 디자인을 앞세운 독일의 완성도 높은 제품은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가 남긴 유산과 맞닿아 있다. 예술과 공예의 결합으로 시작해 기술과 산업을 접목한 조형 학교이자 예술 양식. 혹은 기하학적 개념과 기능적 요소, 최신 재료로 구현한 모든 형태의 창조적 결과물. 바우하우스는 1920년대 발현한 모더니즘의 한 줄기로 뻗어나갔다.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독일이 쌓아 올린 신뢰의 근원을 찾아 베를린으로 향한다.




BERLIN 베를린

1932-1933

통일 이후 유럽에서 가장역동적인 도시로 변모한 베를린. ⓒ 고현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2001년 시장에 취임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가 내건 슬로건이다. 이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예술가의 아지트이자 자유분방한 라이프스타일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를 중심으로 펼쳐진 실험적 거리 예술과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의 전설적 클럽 문화에 이어 최근에는 유럽 스타트업의 허브로 거듭나며 역동적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가 관통하던 20세기의 베를린을 떠올리면 이런 과감한 변신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리는 최후의 전장이자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갈라선 냉전의 산물이었으니. 공교롭게도 바우하우스가 역사에서 퇴장한 무대 역시 베를린이다.


베를린 근교의 슈테클리츠(Steglitz)의 전화 공장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던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가 통치를 시작하면서 일순간 최후를 맞는다. 예술가를 ‘퇴폐주의자’로 낙인 찍던 나치는 바우하우스를 불온한 예술가 집단으로 여기고 폐교를 명령한다. 이후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를 비롯해 수많은 교수와 학생은 미국 등 해외로 도피해 자신들의 철학을 전파한다.



레너베이션을 진행 중인 베를린의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 고현

 베를리너의 주요 휴식처 티어가르텐(Tiergarten) 남단에는 바우하우스를 총망라한 전시관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에 돌아온 그로피우스가 설계를 맡은 바우하우스 아카이브(Bauhaus-Archiv). 롤케이크가 연상되는 원형 지붕 아래에서 바우하우스의 방대한 컬렉션을 선보이던 이곳은 탄생 100주년을 앞둔 올해 안식년을 보내기로 했다. 4월 30일 전시를 끝으로 레너베이션 공사를 시작하면서 당분간 운영을 중단하는 것. 1층 숍과 카페는 그대로 여니 그로피우스가 남긴 유산은 엿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를 테마로 제작한 디자인 소품을 둘러보고 카페에 앉아 안내서를 차분히 넘기며 바우하우스 여행을 시작해보자. 바우하우스의 전시 포스터와 가구로 꾸민 카페는 그들의 미학을 음미하기에 더없이 이상적인 출발지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집(Haus)’과 ‘짓다(Bau)’를 도치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를 이루는 근간은 결국 건축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발터 그로피우스를 비롯해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지낸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 미스 반 데르 로에(Mies van der Rohe) 모두 건축가 출신이다. 학교 설립 초기에는 예술과 공예를 기반으로 한 교육에 집중하고 가구 디자인, 그래픽, 연극, 텍스타일 등 여러 분야를 총망라했지만, 후기의 목표는 건축으로 귀결된다. 이는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설립하면서 발표한 선언문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모든 창조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건축이다!” 




왼쪽부터 베르나우에 있는 ADGB 노동조합 학교.  ADGB 노동조합 학교의 다이닝 홀. 전면부와 천장을 유리로 설계해 채광과 공기 순환 기능을 높였다. ⓒ 고현

베를린 북동부의 근교 도시 베르나우(Bernau)에는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실현시킨 건축 유산이 있다. 지난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ADGB 노동조합 학교다. 언뜻 산업 단지처럼 보이지만 바우하우스의 2대 교장인 하네스 마이어와 한스 비트버(Hans Wittwer)가 데사우(Dessau)에 있던 바우하우스 교사를 모티프 삼아 1930년에 노동조합원의 학교로 완성한 곳이다. “바우하우스의 새 교장이 된 마이어는 대중의 필요가 부르주아의 취미보다 고결하다고 생각했죠.” 베르나우의 바우하우스 유산을 안내하는 프레드만 제거(Freedemann Seeger)가 말한다. 실제 마이어가 취임한 1928년부터 바우하우스는 실용성을 높인 건축 설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유리창으로 파사드 전면을 채우고, 유기적으로 건물을 연결하는 방식은 사용자의 편리성을 고려한 바우하우스 건축의 특징이다. 천장을 비스듬하게 설계하고 높은 위치에서 개폐가 가능한 창문을 설치해 공기의 흐름을 최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든 것도 마찬가지. 결과적으로 이러한 실용적 접근은 건축의 절제된 미감을 끌어올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ADGB 노동조합 학교에서 눈에 띄는 공간 중 하나는 체육관이다. “바우하우스는 학생들의 건강한 신체 또한 중시했죠.” 제거는 학교에서 별도로 체육 시설을 지어 운동 시간을 보장한 것은 당시로는 혁신적 교육 방식이라고 덧붙인다. 체육관 한쪽 면 전체를 폴딩 문으로 제작해 잔디밭과 자연스럽게 공간을 연결했다. 다이빙대를 갖춘 야외 수영장은 오늘날 베르나우 주민을 위한 공공 수영장으로 사용한다고.



ADGB 노동조합 학교의 바우하우스 양식을 안내하는 프레드만 제거. ⓒ 고현

 ADGB 노동조합 학교를 비롯해 바우하우스 유산 대다수는 구 동독 지역에 산재해 있다. 나치에 이어 집권한 공산주의 정권 역시 예술을 자본주의의 산물로 규정했고, 바우하우스 유산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았다. 제거가 설명한다. “구 동독 시절에 이곳은 소방서,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다가 곧 방치되고 말았어요.” 그러다가 통일 이후 바우하우스를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2007년에 대대적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고. “아직 원형대로 복원을 끝내지는 못했어요. 당시 수공예 방식으로 제작한 패브릭은 오늘날 재현하기가 굉장히 까다롭거든요.” 노동조합 학교 최초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과 강당의 벽면을 번갈아 가리키며 제거가 고개를 내젓는다.





발터 그로피우스. ⓒ THURINGIA TOURIST BOARD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베를린 출신의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1년 강철과 유리로 외벽을 구축한 파구스(Fagus) 공장을 설계하며 일약 스타 건축가로 떠오른다. 1919년 바이마르의 미술공예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미술과 공예, 건축을 통합한 바우하우스 학교를 설립한다. 1928년 바우하우스 교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베를린의 모던한 공동주택 단지를 세웠다. 나치 정권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하버드 대학교의 디자인대학원장을 맡아 하버드 대학원 센터, 시카고 매코믹(McCormick) 빌딩 등 모더니즘 건축의 걸작을 남겼다.












고현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독일의 바우하우스 취재를 마치고, 방의 인테리어를 대폭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글. 고현




바우하우스 건축 여행 Part. 2  1925-1932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축 여행 Part. 3   1919-1924 바이마르

독일 바우하우스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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