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in Wonju
사색에 잠기는 자연 속 뮤지엄, 원주를 사랑한 문학가의 집, 오래된 마을과 성당, 청춘이 변화시킨 옛 시장. 원주의 봄이 피어나는 4개의 장소로 떠난다.
차 문을 열고 내려 처음 들이마신 공기가 꽤 서늘하다. 해발 273미터. 원주시 지정면 월정리 산자락에 자리 잡은 뮤지엄 산에는 봄이 더디 찾아온다. 웰컴 센터를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플라워 가든에도 성미 급한 패랭이꽃 몇 송이가 전부다. 개관 2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5월 중순은 되어야 이 정원에 보랏빛 야생화 물결이 일 것이다. 그래도 주위를 둘러싼 산자락에는 새순의 맑은 연둣빛이 감돌고, 노출 콘크리트를 감싼 파주석이 햇살을 품어 온화한 기운을 더한다. 복합리조트 단지인 한솔 오크밸리 내에 있는 뮤지엄 산은 슬며시 왔다가 스치듯 사라지는 이 찰나의 계절을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음미하기에 적합한 장소다. 원주 도심에서 차로 40여 분. 그중 절반은 호젓한 산길을 타고 올라온 까닭에 미술관은 오롯이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이는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 그의 베네세 하우스(Benesse House)가 있는 시코쿠 현의 나오시마가 ‘예술의 섬’이라면 이곳은 ‘예술의 산중’ 쯤 되겠다.
“실제 이곳을 지을 때 나오시마를 벤치마킹했다고 합니다.” 배현국 도슨트가 선선히 인정한다. 나오시마가 특별한 이유는 특정 작가의 미술 작품이나 건축물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도 얼마든지 있다. 건축과 예술 작품 그리고 자연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는 사실에 나오시마의 가치가 있다. 뮤지엄 산 역시 마찬가지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산(SAN)’이라는 이름은 이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예. 안도 다다오가 설계하고 8년에 걸쳐 완공한 뮤지엄은 크게 3개의 건물과 3개의 가든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정원이 연결하고, 건물의 창은 전시와 자연을 하나로 잇는 구조다. “장경(障景)과 차경(借景)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서 중요한 특징입니다. 공간이 한 번에 노출되지 않도록 담벼락 등의 구조물을 차단막으로 활용하기도 하죠.” 그의 말대로다. 뮤지엄 안팎을 거닐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새로운 공간이 ‘짠’하고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진짜 감탄사를 내뱉고 싶은 장면은 따로 있다. 안도 다다오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리트 골조를 경기도 파주에서 가져온 파주석으로 마감해 한국적 이미지를 더한 것. 플라워 가든에 설치한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작품과 워터 가든에 있는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Liberman)의 <아치웨이(Archway)>가 마치 한 사람의 작품인 양 절묘한 짝을 이루는 것. 예부터 종이 대용으로 사용한 자작나무를 심어 놓은 산책길이 페이퍼 갤러리로 이어지는 것. 그리고 워터가든의 깨끗한 물과 반짝이는 해미석은 이곳 직원이 합심해 팔을 걷어 부친 덕분이라는 뒷이야기 같은 것.
전시공간은 페이퍼 갤러리와 청조갤러리로 나뉘는데, 야외 설계 못지 않게 공 들여 기획한 전시가 기대 이상이다. 종이의 가치를 표현한 설치 작품 <더 브리즈(The breeze)>는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고, 한지를 테마로 한 청조갤러리의 <하얀 울림>은 원주가 한지의 본고장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스톤 가든한편에 자리한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특별 전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뮤지엄 산이 왜 이 산자락에 있어야 하는 지를 확인시켜주는 장소다. 작가 역시 자신의 대표작인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와 <호리즌 룸(HorizonRoom)>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장소라고 했다는데, 그 뜻을 이해하려면 직접 관람하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빛을 매개로 창조한 공간에서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는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도 살짝 귀띔하자면, 스카이스페이스는 돔형 천장에 뚫린 창 너머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빛깔을 바라보며 각자의 사색을 즐기는 독특한 체험이라는 정도만 일러두겠다. 뮤지엄 홍보를 맡은 장용빈 주임의 말에 의하면 한 중년 관람객은 “20대 때 터렐의 작품을 봤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단다. 인생이 바뀔 나이를 지나서일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스카이스페이스 못지않게 스톤 가든이 좋다. 안도 다다오가 경주의 고분군을 모티브로 설계했다는 돌의 정원. 삶과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경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기도 한데, 일본의 건축가와 그 정서를 공유한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원주 귀래석으로 쌓아 올린 9개의 돌무덤 사이를 거닐다 지난 봄 이 길 위에서 더없이 행복했다고 말한 지인을 떠올린다. 그녀와 나 사이에도 삶과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한솔 오크밸리 내에 있는 뮤지엄 산은 슬며시 왔다가 스치듯 사라지는 찰나의 계절을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음미하기에 적합한 장소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박경리 작가의 ‘옛날의 그 집’은 원주시 단구동에 있다. 통영 출신인 작가는 2008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30년간 원주에 머물렀는데, 그중 18년을 단구동에서 살았다. 한때 택지개발로 사라질 뻔한 이 일대가박경리 문학공원으로 조성되면서 홍이동산, 평사리마당, 용두레벌 등 소설 <토지>에서 이름을 따온 3개의 테마 공원이 들어섰다. 2010년에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하고 디자이너 안상수가 내부 전시를 연출한 문학의 집도 개관했다. 맹꽁이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목련 꽃망울이 부풀대로 부푼 이른 봄, 그 집을 찾아간다. 그녀가 ‘오로지 적막뿐’이라고 회고한 옛집에는 이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공원에 들어서면 넝쿨 줄기로 뒤덮인 야트막한 돌담 너머로 단정하게 머리를 내민 2층 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문에서 마당까지 이어지는 돌길. 무심히 발을 내딛다가 임의숙 해설사의 말에 깜짝 놀란다. “이곳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원주천이 흘러요. 이 바닥의 돌은 박경리 선생님이 직접 리어카를 끌고 그곳에서 일일이 실어 나른 것이에요.” 무려 26년의 세월 동안 한 작품을 품고 산 작가는 이 돌길을 내는 데 5년을 공들였다. 옛집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식이다. 어린 손주를 위해 청돌만 골라 손수 만든 연못, 글이 막힐 때면 달려나가곤 했다는 텃밭, 현관 앞 박태기 나무와 작업실 창문가의 산수유처럼 제각기 자리를 꿰찬 수목까지 이 공간에는 무엇 하나 허투루 생긴 것이 없다. 그뿐인가. ‘거위야’라고 부르던 오리 2마리와 집고양이 17마리까지 애지중지 돌보며 그 와중에 토지 4부와 5 부를 집필했다니 놀라 자빠질 일이다. 2,500제곱미터에 이르는 너른 마당을 홀로 돌보고 가꾸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금세 아득해지고 마는데!
옛집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동안 바지런히 움직이는 작가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다. 한시도 몸을 놀리지 않는 것이 결국 원고지 3만 매에 이르는 대작을 수십 년에 걸쳐 집필하는 노작과 동의어임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인내와 집념이니까. 아버지의 부재 속에 보낸 어린 시절, 남편과 아들을 잃은 20대, 사위의 옥살이 그리고 투병. 일일이 나열하는 것조차 가혹하게 느껴지는 삶을 작가는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지 않은가. 범인(凡人)은 절대 할 수 없는 일.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해설사가 작업실 책상 위 커피잔을 가리키며 말한다. “박경리 선생님이 생전에 즐기시던 것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커피고, 또 하나는 담배였어요. 지독한 애연가셨죠.” 그래, 사마천(궁형의 치욕을 겪고도 <사기>를 집필한)만으로는 고된 삶을 견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커피와 담배 같은 사소한 낙도 하나쯤 있어야지. 해설사의 이 말 덕분에 내내 크고 멀게만 느껴지던 작가에게 윙크라도 건네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 집을 떠난 박경리 작가는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회촌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단구동 옛집에서 그녀가 크고 작은 생명체를 돌보았다면, 회촌마을에서는 후배 작가와 예술가를 거두었다. 박경리 작가가 다양한 창작·연구 활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토지문화관은 그녀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작가 레지던시 역할을 하고 있다. 옛집 마당 한편, 작가의 동상이 놓인 바위에 걸쳐 앉는다. 작가가 텃밭에서 일하다 쉴 때면 즐겨 앉았다는 바위다. 정면으로 치악산과 백운산 자락이 펼쳐지고, 곁에는 고양이와 호미, 책이 놓여 있다. 평생 대지를, 생명을 품고 산 작가에게 원주(原州)만큼 어울리는 지명이 또 있을까 싶다.
정면으로 치악산과 백운산 자락이 펼쳐지고, 곁에는 고양이와 호미, 책이 놓여 있다. 평생 대지를, 생명을 품고 산 작가에게 원주만큼 어울리는 지명이 또 있을까 싶다.
글 표영소・사진 정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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