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에 정착한 후손들은 선대의 지식을 잊지 않고
아무도 없는 땅에 포도를 재배했다. 오직 와인을 위해.
그리고 불과 몇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오늘날 남호주에는 와인의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
“디저리두.”
“뭐라고요?”
“디-저-리-두요.”
“네? 철자가 어떻게 되는데요?”
“디, 아이, 디, 지, 이, 알, 아이, 디, 오, 오….”
“디드리두?”
“디저리두! 여하튼, 일단 들어봐요.”
가이드 벤 네빌(Ben Neville)은 자세를 잡고 앉더니 디저리두에 숨을 불어넣는다. 성인 키만 한 디저리두는 호주 애버리지니의 전통 악기다. 기록에 따르면 약 1,500년 전부터 사용했다고. ‘디저리두’라는 이름은 호주에 정착한 서양인이 악기의 음색을 듣고 붙인 의성어인데, 애버리지니는 부족에 따라 이를 일피라(ilpirra), 이라카(yiraka), 쿠르무르(kurmur) 등으로 칭한다. 이 역시 쉽게 발음하기는 어렵다.
남호주의 주도인 애들레이드와 캥거루섬(Kangaroo Island) 사이, 플러루 반도(Fleurieu Peninsula) 내륙에 자리한 온카파링가강 국립공원(Onkaparinga River National Park). 우리는 온카파링가강의 한 줄기 옆 공터에 이동식 피크닉 테이블을 펼치고, 디저리두의 울림을 듣는다. ‘부웅’ 하며 건조한 공기 중으로 떠도는 파동은 마치 땅속 맨틀층에서 헤집고 나오는 지구의 울음소리 같다. 네빌은 어릴 적 트럼펫을 배운 이력으로 디저리두를 연주할 수 있다지만, 그리 쉬어 보이지는 않는다. 볼이 호빵처럼 부풀어오르고 얼굴이 발개지니 말이다. 언뜻 재즈 뮤지션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의 부푼 볼이 연상된다. 바로 앞에 놓인 피크닉 테이블 위에는 매클래런 베일(McLaren Vale)산 와인과 치즈가 소박하게 있다. 주변의 원시적 자연 풍경은 기원전부터 시간이 멈춘 듯하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유칼립투스나무 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귀여운 코알라 1마리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륙 호주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에 정성껏 대답해준다.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나라이자 하나의 대륙은 드넓다. 이 나라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자연을 기대했다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무지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연 한복판에서 하품의 질량을 측정할 만큼 외로워질 수 있다. 도시에 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자리 잡은 인구 200만 명의 대도시가 호주에 있으니(매클래런 베일에서 약 2,500킬로미터 떨어진 퍼스다). 수평선 아득히 청록빛 바다를 기대했다면, 그 풍경에 더해 세계 최고의 산호와 고래, 돌고래, 상어 같은 해양 동물까지 패키지 상품으로 보여준다. 1억 년의 나이를 먹은 땅에서 영글어가는 포도는 또 어떤가. 시라즈(Shiraz)로 대표되는 강렬한 레드 와인이 미감을 깊숙이 자극하는데, 그중 최고로 평가받는 펜폴즈(Penfolds) 그레인지(Grange)의 1951년 빈티지는 요새 경매장에서 병당 5,000만 원쯤 한다. 아, 캥거루도 잊으면 안 된다. 이 나라에서 캥거루의 개체 수는 사람보다 많다. 와인을 사러 가던 길에 캥거루를 마주쳤다고 호들갑을 떨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는 십중팔구 도착한 지 이틀쯤 지난 관광객일 것이다.
자, 남호주는 위에 열거한 사실 중 와인만큼은 호주 최고를 자랑한다. 호주 와인의 절반가량을 남호주에서 생산한다. 펜폴즈 와이너리도 남호주 버로사 밸리(Barossa Valley)에 적을 두고 있다. 주도 애들레이드에서 차로 1시간만 달리면 다채로운 와이너리를 마주치게 되니 남호주의 와인은 너무 당연한 삶의 일부다.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와인 없이 남호주를 여행하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무엇을 하러 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잠깐의 피크닉과 디저리두 청음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와인 탐험에 돌입한다. 이번에는 남호주의 대표적 와인 지역인 매클래런 베일이다. 이 지역은 지중해성기후에 인도양과 가깝고 여름은 건조해 시라즈로 대표되는 훌륭한 레드 와인을 생산한다. 19세기 중반부터 와이너리가 간판을 걸기 시작했으며, 수령 100년이 넘는 포도나무가 여전히 결실을 맺는다. 19세기 말 전 세계 포도나무를 싹쓸이한 필록세라(Phylloxera) 전염병이 남호주를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대륙의 역사에 비해서야 걸음마 수준이지만, 품질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가족 운영의 부티크 와이너리가 대부분이어서 개성 넘치는 제품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꽤 실험적이라는 것. 첨단 장비와 자동화에 집착하고, 스크루 마개를 주로 사용하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포도밭에서도 포도를 가져와 블렌딩해버리는 과감함도 그 연장선이다.
다렌버그(d’Arenberg)의 큐브(Cube)를 보면 딱 그런 생각이 들겠다. 포도밭 한가운데 떡하니 놓인 거대한 퍼즐 큐브는 다렌버그 와이너리의 최신 셀러다. 1912년 설립된 와이너리를 4대째 잇는 주인 체스터 오스본(Chester Osborn)은 자신의 괴짜 기질을 한껏 발휘해 2017년 큐브를 완성했다. 갤러리와 전시장, 레스토랑, 와인셀러, 테이스팅 룸을 갖춘 큐브의 꼭대기에 오르니 매클래런 베일의 포도밭들이 물결치듯 동서남북으로 펼쳐진다. “오너인 오스본은 와이너리뿐 아니라 큐브를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어요. 외관 디자인과 실내 인테리어, 전시장은 물론 테이블과 의자까지 디자인했죠. 여기에 걸린 현대미술 작품도 전부 그의 소장품이에요.” 다렌버그의 직원인 데이브 달리(Dave Daly)가 말한다. 히피의 소굴 같던 전시장과는 상반되게, 모던하고 깔끔하게 꾸민 테이스팅 공간에서 그가 와인을 따라준다. 그르나슈(Grenache)와 시라즈를 혼합한 아이언스톤 프레싱(Ironstone Pressing)은 전통적 시라즈와 달리 가볍고 풍부한 향에 달콤함이 느껴진다. 루산(Roussanne) 품종으로 제조한 화이트 와인 머니 스파이더(Money Spider)는 보디가 가볍고 끝맛이 상큼하다. 이 외에도 많은 와인이 기다린다. 다렌버그는 30여 종의 포도로 무려 72종의 와인을 생산한다. 보통 한 와이너리에서 많아야 30여 종의 와인을 출시하는데, 그런 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전통보다 혁신을 추구하고, 와인을 즐기려 한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 큐브를 만들었을 리도 없다. 여하튼 덕분에 매일 1,000여 명의 방문객을 맞이한다고 하니 결과적으로는 성공이겠다.
실험적이고 크리에이티브한 와인의 대척점까지는 아니어도, 전통을 고수하며 남호주만의 단단한 캐릭터를 쌓는 와이너리도 분명 존재한다. 1960년부터 서서히 와인 산업이 성장할 때 그들은 매클래런 베일의 주축을 담당했다. 1979년 마크 맥스웰(Mark Maxwell)이 설립한 맥스웰 와인스(Maxwell Wines)처럼. “레드 와인용 포도는 수확하고 나서 일주일 후부터, 화이트 와인용 포도는 수확하자마자 양조를 시작하죠. 저희는 100퍼센트 프렌치 오크 배럴로 숙성시킵니다.” 40년 가까이 와이너리를 이끄는 맥스웰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한다. 석회암 토양 위에 자리 잡은 맥스웰은 포도 블렌딩 비율을 적게 하고, 포도 자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와인이 장기다. 와인 평론가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liday)도 맥스웰 레드 와인의 탁월함을 주저 없이 인정한 바 있다. 노란빛 석조 건물 안 테이스팅 룸에서 엘렌 스트리트(Ellen Street)를 1잔 마셔본다. 진한 자줏빛과 진한 향, 묵직한 보디에 씁쓸하기까지 한 베리 맛과 깔끔한 뒷맛을 자랑하는 시라즈 와인의 전형이 혀의 미각 돌기를 스쳐 고스란히 몸속으로 들어온다.
허태우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편집장으로 11년 전 남호주 와인 여행에서 시라즈의 존재를 처음 알았으나 아직도 시라즈와 카베르네 소비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글/사진. 허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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