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로텐부르크, 바이로이트. 바이에른주 북부 세 도시 기행.
크리스마스 마켓의 본고장부터 로맨틱 가도의 중세 마을을 거쳐 바그너와 운명을 함께한 소도시까지. 풍요로운 문화유산과 예술가의 영감이 깃든 장소를 찾아 독일 바이에른 북부의 세 도시로 떠나다.
“프랑켄 지역은 이번이 첫 방문인가요?” 가이드 마르티나 에베르트(Martina Ebert)가 인사를 건네며 넌지시 물어본다. 바이에른주 북부에 걸쳐 있는 프랑켄(영어로는 프랑코니아(Franconia)라 통칭) 현지인은 바이에른과 자신의 터전을 애써 구분 짓길 바라는 눈치다. 실제 마인강(Main River) 양안의 완만한 구릉지대에 자리한 프랑켄은 19세기 바이에른에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 공국이었다. 뮌헨을 비롯한 바이에른 남부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사실. 팔뚝보다 굵은 맥주잔을 기울이는 떠들썩한 비어 가든 대신 소규모 비어홀을 선호하고, 선 굵은 바이에른 알프스 대신 부드러운 산세의 자연이 프랑켄만의 포근한 정취를 이끌어내는 듯하다. 색바랜 밤색 지붕을 쓴 가옥이 촘촘히 늘어선 뉘른베르크(Nürnberg)의 거리에선 알 수 없는 쓸쓸한 기운이 감돌기도 한다.
뉘른베르크는 프랑켄의 비공식 수도이자 바이에른 북부 기차 여행의 관문 도시다. 중앙역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장대한 성벽 안으로 들어서면 곧장 구시가가 펼쳐진다. 신성로마제국의 보석 같은 유산이 바로 이 안에 모여 있다. 구시가 한복판, 분홍빛 첨탑이 솟은 성 제발두스 교회(St. Sebalduskirche)를 지나 언덕으로 향하자 알브레히트 뒤러 하우스(Albrecht-Dürer-Haus)가 기다린다. “이탈리아에 미켈란젤로가 있다면 독일에는 뒤러가 존재하죠.” 에베르트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16세기 독일의 르네상스를 개척한 뒤러는 아내 아그네스(Agnes)와 함께 이 4층짜리 목조 가옥에 머물며 수많은 걸작을 완성했다. “뒤러는 목판 삽화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수의 자화상을 남겼죠. 군중 속에 자신을 몰래 그려 넣기도 했어요.” 3층에 자리한 아틀리에에는 인쇄기와 판화 도구, 색을 조합하는 천연 염료, 심지어 습작을 위해 수집한 동물 뼈가 진열되어 있어 괴짜 과학자의 연구실을 연상시킨다.
구시가 북단에 고고하게 솟아 있는 카이저부르크(Kaiserburg)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깊은 애정을 보내며 수시로 찾은 궁전이다. 보리수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운 안뜰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자 위풍당당한 역대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황제의 홀과 기사의 홀이 차례로 등장한다. 황제가 실제 예배를 거행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우아한 예배당도 궁전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카이저부르크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모이는 장소는 뉘른베르크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진벨 탑(Sinwell Tower).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검게 그을린 성벽을 경계로 프랑켄 정통 목조 가옥과 성벽 너머의 현대적 빌딩이 그려낸 장면은 뉘른베르크가 거쳐온 오랜 시간을 농축한 것 같다.
독일 근현대사에서 뉘른베르크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은 도시도 드물다. 신성로마제국의 총애를 받던 이 도시는 산업화 시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인다. 가파른 성장 속에서 뜻밖의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1933년 독일 수상에 오른 히틀러가 노동자 계층이 밀집한 뉘른베르크를 나치당의 거점으로 삼은 것.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한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 역시 이때 발효됐다.
히틀러의 연설과 나치당의 대규모 퍼레이드가 이뤄진 나치 전당 대회장 라이히슈파르타이탁스겔렌데(Reichsparteitagsgelände)가 도시 남동부에 잔존해 있다. 기록 보관소로 개조한 별관인 도쿠멘타티온스첸트룸(Dokumentationszentrum)에서는 나치의 엄혹한 과거를 연대순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히틀러의 화려한 언변에 열광하는 수십 만 군중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인류의 비이성적 과오를 돌아보게 한다. 나치가 대규모 퍼레이드를 벌이던 전당 대회장 일대에서는 오늘날 콘서트와 스포츠 이벤트 등을 개최하며 어두운 과거를 지워내는 중이다. 마침 분데스리가 축구 경기 관람을 마친 이들이 응원가를 합창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1930년대 뉘른베르크를 뒤흔든 광기 어린 에너지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현장에 안도감이 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범 재판을 거쳐 불온한 과거와 작별한 뉘른베르크는 고색창연한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마켓 역시 마찬가지. 12월 한 달간 뉘른베르크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찾는 방문객이 20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마켓이 열리는 중앙 광장 하우프트마르크트(Hauptmarkt)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니더라도 여행자와 현지인이 자연스레 뒤섞여 활기가 넘친다. 황금 탑을 형상화한 분수대 쇠너 브루넨(Schöner Brunnen)을 바라보며 소원을 빈 다음, 광장의 노점을 돌아보자. 도시를 상징하는 생강 케이크 레프루헨 (Lebkuchen)을 고르거나 뉘른베르거 브라트부르스트(Nürnberger Bratwurst)와 글뤼바인을 맛보며 뉘른베르크만의 온화한 정취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다.
*Pick Souvenir 뒤러 판화 복제본
중앙 광장 서쪽에 있는 코른 운트 베르크(Korn und Berg)는 1531년에 문을 연,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서점이다. 영문 서적을 비롯해 방대한 장서를 갖췄는데, 뒤러의 판화 복제본과 엽서 등의 기념품도 판매한다.
글/사진. 고현
고현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뉘른베르크의 한 펍에서 바이에른 뮌헨 축구팀 이야기를 꺼냈다가 재빨리 화제를 돌려야 했다.
ⓘ 취재 협조 바이에른주관광청 한국홍보사무소 bavari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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