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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pr 01. 2019

고대 신선의 협곡 속으로

중국 저장성에서는 여전히 신선의 땅을 보려는 이가 안개 속으로 향한다.

송나라의 진종(眞宗) 황제가 거대한 석기둥으로 둘러싸인 협곡 너머를 선셴쥐(神仙居, 신선이 머무는 곳)라 명명한 이후부터
사람들은 신선의 부름을 좇기 시작했다. 


항저우만 대교로 들어서자 희멀건 물안개가 더욱 높아진다. 상하이에서 저장성(浙江省)으로 향하는 길이다. 저장성 닝보시(宁波市)까지 맞닿는 바다 위 도로가 36킬로미터를 뻗어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맞춰 개통한 해상 대교는 육로로 갈 거리를 6시간에서 2시간으로 앞당겼지만, 수시로 출몰하는 안개 경보 탓에 도로에서 기약 없이 대기하는 경우도 잦다. “저장성은 총면적의 70퍼센트가 산지와 구릉이고 20퍼센트는 물, 나머지는 밭으로 이뤄져 있지요.” 조선족 출신 가이드 국봉이 운무에 가린 도로를 응시하며 말한다. 저장성 서남부에는 유명한 산이 많다. 톈타이산(天台山), 쓰밍산(四明山), 옌당산(雁荡山)이 잘 알려져 있고, 목적지인 선셴쥐(神仙居)와 쉐더우산(雪窦山)이 있다. 가장 큰 하천인 첸탕강(钱塘江)은 명나라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강의 조수가 산에 부딪쳐 열 번이나 꺾이며 굽이돌고, 그 물결은 일어날 기세가 있다고 묘사된다. 수시로 안개에 잠식되는 침봉을 마주하며 그곳에 도인이 살 것이라 상상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 닝보시의 펑화(奉化) 내륙으로 들어서자 도시는 온통 축축한 황갈색의 그림자로 채워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노란 가로등으로 정돈한 도시는 부유하고 깨끗하다. 육중하게 올라가는 고층 빌딩 공사장에 가려진 탓인지 신선이 산다는 산은 아직 보일 기미가 없다.




인력거를 타고 장제스의 마을을 달리자 

(좌) 인력거는 장스구쥐의 일상을 돌아보는 가장 흥미로운 방법이다. (우) 시커우진 곳곳에선 지역 특산품인 토란 찌는 증기가 피어오른다. ⓒ 신진주



모두가 신선을 찾아오는 곳은 아니다. 쉐더우산 자락에 자리한 시커우진(溪口鎭)은 장제스(蔣介石) 타이완 중화민국 초대 총통의 고향으로, 장스구쥐(蔣氏故居)에는 일찍부터 그의 거주지를 구경하려는 관람객으로 북적인다. 장제스가 교장을 지낸 우닝(武寧)학교, 조부의 소금 상점인 위타이옌푸(玉泰盐铺), 가족이 함께 머물던 서양식 2층 가옥 샤오양팡(小洋房)과 펑하오팡(丰镐房) 등에서 중국인은 장제스의 흔적을 찾고 느릿느릿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다고 국민당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모습을 관광하는 것뿐이죠.” 국봉 가이드의 말이다.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내전에 성공하고 중국 본토를 통일했다면 이곳이 어떤 풍경으로 변했을지 상상해본다. 거리 한편에 국민당 시대의 복장을 입고 호객하는 상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손짓하지만, 관심을 보이는 이는 드물다.

인력거를 타고 장스구쥐 거리의 끝까지 달려본다. 삐걱거리는 자전거 페달이 군중 사이를 날렵하게 가로질러 장기를 두는 남자 무리를 지나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이들을 스쳐가면 민국 시대로 달리던 로드 무비가 막을 내린다. 장기판만큼이나 사람을 모으는 곳은 거리에 늘어선 시커우(溪口) 한족의 전통 과자 천층병(千層餠) 가게들이다. 자물쇠 크기의 납작한 과자를 베어 물자 반죽이 바삭 부서진다. 텁텁하고 고소하며 이끼 같은 향이 입안에 스민다. 토란 가루와 김을 섞어 얇은 반죽으로 치대고 이것을 항아리처럼 커다란 화덕에 넣어 구워 내는데, 담백해 연신 손이 간다. 가게 옆 토란 찜기에서 증기가 몽실 올라온다. 토란이라 하기엔 야자수처럼 크고 거칠다. 큰 것은 그 무게가 3킬로그램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노점에는 온갖 토란이 가득했다. 따뜻하고 습윤한 기후와 사양토 덕에 굵직하게 성장한 토란은 천년 전 송나라 시절부터 끼니를 책임지는 기특한 작물이었다. 시커우 사람들은 토란을 찌고 말리고 굽고 볶고 끓여 갖가지 요리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저장성에 머무는 내내 온갖 종류의 토란 요리를 맛보았으니 말이다.




쉐더우산으로 향하는 이유

‘폭포 산’이라 불리는 쉐더우산에서 가장 길이가 긴 186m 높이의 첸장옌 폭포. ⓒ 신진주



조선의 성리학자 최부는 제주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저장성 닝보에 표류해 기록한 <표해록(漂海錄)>에 이렇게 썼다. “수많은 봉우리가 줄을 지어 높이 솟아 있었으며, 냇가에는 암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강에 이르니 평평하고 넓은 들이 막힘 없이 펼쳐졌다. 멀리 보이는 산은 눈썹 같았고, 서남쪽을 바라보니 쓰밍산이 있었다.” 해발 800미터의 쉐더우산은 280개의 봉우리가 걸쳐 있다는 쓰밍산 지맥 중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쉐더우산 초입에서 말갛던 하늘에 회색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먼 곳까지 왔는데 비가 떨어진다. 등산객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우비를 챙겨 산으로 서둘러 올라간다. 구두와 일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중국어로 설명을 늘어놓으며 돌계단을 오른다. ‘5A급 관광풍경구’라는 안내판은 앞으로 비경이 펼쳐지리란 예고편과 같은데, 동시에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잘 정돈된 산행길이란 뜻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모노레일과 케이블카, 중산간에 자리한 중국 5대 불교 사찰 쉐더우사(雪窦寺)까지 연결하는 버스를 이용해 주요 명소를 평탄하게 돌아본다. 12킬로미터에 이르는 코스가 대부분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뤄진 까닭도 있지만 말이다. 중국 최고의 풍경구에 작은 쓰레기 하나가 흠집이 될까 빗자루를 든 직원이 순식간에 나타나 산길을 깨끗이 정비하고 사라진다.




천년 고찰 쉐더우사에는 높이 56.7m, 총무게 1,500여 톤의 대불상이 9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 신진주



‘백색(雪)의 물이 쏟아지는 샘(窦)’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듯 쉐더우산은 1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 군락으로 이뤄진 물의 산이다. 1억5,000만 년 전 쓰밍산 지류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 이후 1,000만 년 동안 세 번의 화산 폭발과 네 번의 해수면 상승, 지반 융기를 반복했다. 억겁의 세월을 견뎌온 산지는 겹겹의 절벽과 깊은 협곡 사이를 흐르는 폭포의 풍경으로 압축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꼭대기에서 폭포 군락을 좇아 하산하는 여정에서 가장 길이가 긴 첸장옌(千丈岩) 폭포를 만난다. 산 정상의 루봉(乳峰)에서 발원한 물이 아찔한 암벽 끝에서 실타래처럼 새하얗게 흘러내린다. 높이만 186미터. 폭포 아래 앙즈교(仰止橋)에 서서 허공에 흩날리다 사라지는 뽀얀 물길을 한동안 바라본다. 선녀 복장을 차려입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들의 무표정한 공연이 없었더라면 바위에 앉아 종일 머물러도 좋을 듯싶다.

케이블카를 타고 먀오가오타이(妙高台)로 향한다. 장제스는 진작에 이곳이 지리적으로 가장 명당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다. 1927년에 그가 이곳에 세운 개인 별장에는 직접 ‘妙高台’라고 쓴 선명한 현판이 걸려 있다. 먀오가오타이에서 군사 지휘를 논하며 처지를 고민하던 장제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를 목격했을 노송만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외롭게 서 있다. 쉐더우산에서 내려오는 길, 쉐더우사의 웅장한 미륵대불상이 구름 꼬리에 걸려 앉아 있다. 검은 숲 위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미륵상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짓는다. 




글/사진. 신진주

신진주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외부 필자다. 안개 경보로 장시간 주행이 마비된 항저우만대교 위에서 볼일을 해결하는 대부분의 사람 중 1명이 되었다. 





'고대 신선의 협곡 속으로'에 이어진 이야기

고대 신선의 협곡 속으로 p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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