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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n 17. 2019

다시, 피오르의 시간

태초의 골짜기가 녹아 내리고 에메랄드빛 물줄기가 여행자와 재회하는 시간.

베르겐

피오르 여행의 관문 도시

수차례의 화재로 사라질 위기를 겪은 브뤼겐 역사지구는 1979년 이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 OLENA TUR/SHUTTERSTOCK


“지난주 부활절 휴일 때 가족과 함께 여름 별장에서 낚시를 즐겼어요.” 베르겐관광청의 마리안 욘센(Marianne Johnsen)이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이 잡은 팔뚝만 한 대구를 자랑스레 보여준다. 혹독한 겨울을 견딘 노르웨이인은 4월 말부터 길게 늘어지는 햇살을 만끽하기 위해 자연 속 별장으로 향하고는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노르웨이 중서부에 걸쳐 있는 피오르 지역의 관광업도 활기를 띤다. “올해는 보름가량 일찍 찾아왔네요. 보통 5월 중순부터 10월까지가 크루즈 시즌이거든요.” 욘센이 베르겐 동쪽 끝 보겐(Vågen) 항구에 기착한 크루즈선 바이킹(Viking)호를 가리킨다. 곧 음악 축제와 베르겐을 둘러싼 7개의 산봉우리를 넘나드는 아웃도어 대회 등이 이어지고 환희의 여름이 본격적으로 도시에 스며들 것이다.


피오르의 관문 도시로 자리 잡기 이전, 베르겐은 북해에서 가장 촉망받는 항구도시였다. 14세기 말,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 합류하면서 뤼베크, 함부르크 등 독일의 주요 도시와 협약을 맺은 이곳에 각국의 상인이 몰려들었다. 당시의 영화로운 시절은 항구 동쪽의 동네 브뤼겐(Bryggen)에서 짐작할 수 있다. 17~18세기에 지은 박공지붕을 씌운 컬러풀한 목조 가옥은 오늘날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과 기념품 숍으로 쓰이지만, 십수 년 전까지 생선 창고와 상인의 집으로 베르겐 경제의 중추 역할을 했다. 주저 앉다시피 비틀어진 문짝과 목조 기둥으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가옥 사이에는 붉은 바닥이 공터로 남아 있다. 이는 화재 때문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옛 가옥의 자리다. 7차례가 넘는 화마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항구변의 목조 가옥 10여 채는 오늘날 베르겐의 낭만적 정취를 완성시키는 랜드마크가 됐다.



베르겐의 피시마켓은 북해 수산물의 집하장 역할을 한다. ⓒ 고현


브뤼겐과 마주한 베르겐 관광안내소는 2012년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단정한 차림새로 문을 열었고, 1층에는 깔끔하게 정돈한 피시마켓(Fishmarket)이 들어섰다. “베르겐은 진정한 수산물의 수도죠. 과거에도 지금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 피시 미(Fish Me)를 운영하는 아르핀 듀카스타인(Arnfinn Djukastein)이 메뉴판을 건네며 말한다. 이곳의 메뉴는 피시 앤드 칩스부터 초밥까지 국경을 넘나든다. 킹크랩이나 연어, 대구, 홍합 등 북해의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메뉴가 수십 가지에 이르는데, 밍크고래 고기 패티를 넣은 버거도 있다. 고래 포획을 허용하는 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색다른 도전에 용기를 내보다가, 윤리적 고민에 잠시 머뭇거린다.



LP 숍 겸 바 아폴론을 운영하는 아이나르. ⓒ 고현


베르겐은 음악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한 도시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의 국민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를 시작으로 1980년대 헤비메탈 붐을 거쳐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같은 실력파 뮤지션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그리그에게 헌사하는 클래식 축제가 열리고, 노르웨이 전역의 밴드가 모이는 베르겐 페스트가 배턴을 이어받아 음악 애호가를 들뜨게 한다. 릴레 룽에고르(Lille Lungegård) 호수 남단에 자리한 아폴론(Apollon)은 베르겐 음악의 신전 같은 곳이다. 1976년 문을 연 이 LP 숍 겸 바는 컬렉션의 수준이 상당한 데다, 크래프트 맥주 탭만 35개에 달할 만큼 맥주 마니아도 사로잡는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곳을 찾아요. 꾸준히 월급을 쏟아붓는 셈이죠.” 한눈에 단골임을 직감하게 하는 쿠르트 라르센(Curt Larsen)은 부지런히 맥주를 따르고, 대금을 정산하는 주인장 아이나르(Einar)를 대신해 응대를 한다. “여기에서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음악과 맥주면 충분하니까요.”




▶ More to: 전망대

프뢰위엔산은 베르겐 최고의 전망대이자 휴식처로 꼽힌다. ⓒ 고현

베르겐과 대서양이 어우러진 전경을 감상하려면 플뢰위엔산(Mount Fløyen)으로 향하자. 퓨니쿨러를 타고 해발 320미터의 정상까지 간편하게 오를 수 있는데, 탁 트인 전망대와 레스토랑, 트롤 놀이터 등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정상에서 도심까지 잘 닦인 트레일을 따라 산책 삼아 내려와도 좋다. 퓨니쿨러 편도 50크로네, floyen.no/en




송네피오르

온화한 피오르 마을

베르겐과 송달(Sogndal) 사이를 오가는 페리는 송네피오르에서 가장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다. ⓒ SJ TRAVEL PHOTO AND VIDEO/SHUTTERSTOCK


베르겐 항구에서 출발한 고속 페리는 대서양 연안을 우회해 곧장 피오르로 진입한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피오르의 풍경이 서서히 변주된다. 여기에는 변덕을 부리는 날씨가 한몫한다.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지다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밍크고래처럼 거뭇한 산등성이가 실루엣을 드러내고, 잔잔한 물살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이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이 204킬로미터, 최대 수심이 1,300미터에 이르는 송네피오르(Sognefjord)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오르다. 1,000미터를 넘나드는 설산이 사방으로 이어지고, 산허리에는 양철 지붕을 얹은 빨간 목조 가옥이 특유의 정취를 발산한다. 폭이 4~5킬로미터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는 기분도 든다. 그렇게 지루할 틈 없이 4시간을 질주한 페리는 발레스트란(Balestrand)에 정박한다.



발레스트란 초입에 자리한 크비크네스 호텔의 응접실에서는 웅장한 송네피오르가 펼쳐진다. ⓒ 고현


송네피오르 초입에 자리한 발레스트란은 전형적 피오르 마을의 구색을 두루 갖춘 듯하다. 전체 주민이 800명에 불과할 만큼 아담하지만, 선착장 앞에 근사한 호텔이 자리하고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설산이 협만을 장엄하게 굽어보고 있다. “영화 <겨울왕국>이 바로 이 마을을 둘러싼 산악 지대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해요.” 크비크네스 호텔(Kviknes Hotel)을 4대째 운영하고 있는 카리 크비크네(Kari Kvikne)가 말한다. 1874년 문을 연 크비크네 가문의 호텔은 송네피오르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질 때마다 규모를 확장시켰다. “처음에는 방 4개짜리 여관이었죠. 영국 여행객이 점차 찾아오면서 발레스트란은 송네피오르의 거점이 됐습니다.” 발코니가 딸린 190개의 객실로 증축한 크비크네스 호텔의 응접실에는 익숙한 광경의 회화가 일종의 컬렉션을 이루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이곳에는 숱한 예술가가 드나들었어요. 그들은 호텔에 머물며 마을을 에워싼 산봉우리를 작품으로 남겼죠.”



(좌) 사이데르후세에서 내는 애플 사이더. (우) 피오르 사파리 투어를 떠나면 네레위피오르 깊숙한 곳까지 돌아볼 수 있다. ⓒ 고현


대대로 발레스트란에 살아온 가르 에이퉁예르데 회위비크(Gard Eitungjerde Høyvik)의 가문은 다른 방식으로 발레스트란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회위비크의 증조할아버지는 발레스트란에서 사과 농장을 일궜고, 이를 이어받은 그는 2002년부터 애플 사이더 브루어리를 만들어 색다른 즐길 거리를 만들어냈다.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한 발레스트란은 기온이 연중 서늘하고, 일조량이 풍부하죠. 덕분에 이곳에서 자란 사과는 과즙이 풍부하고, 신맛이 강해요.” 그가 가족과 함께 운영하는 사이데르후세(Ciderhuset)에 자리한 2층 테라스의 다이닝 홀은 <킨포크>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생각나게 한다. 이곳에서 회위비크의 아내이자 터키 태생의 투바 아르디지(Tuba Ardic)는 지역 식자재로 맛 좋은 지중해식 타파스를 낸다. 회위비크는 다섯 가지 애플 사이더를 테이스팅 잔에 따라주며 단계별로 어울리는 페어링 메뉴를 추천해준다. 첫 잔은 애피타이저와 함께 마시고, 달콤한 꿀을 첨가한 마지막 잔은 디저트와 마무리하는 식으로. 상큼한 사이더와 함께 즐기는 건강한 식사는 발레스트란 특유의 온화한 정취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발레스트란에서 피오르의 매력을 온몸으로 누리고 싶다면 피오르 사파리에 나서자. 점프슈트와 고글을 착용하고, 토르 안레(Tor Andre)가 이끄는 12인승 고속단정(RIB) 보트에 탑승하면 준비 완료. 안레는 최고 속도 50노트(시속 90킬로미터)로 피오르 곳곳을 폭주족처럼 질주한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물살을 가르는 사이, 피오르의 폭이 차츰 줄어들자 네뢰위피오르(Nærøyfjord)에 다다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2개의 피오르 중 하나인 이곳에선 깎아지른 절벽과 호쾌하게 쏟아지는 폭포, 수풀이 우거진 옛 우편 통행로,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피오르물개가 한데 어우러진 비경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펼쳐진다. 지난해부터는 전기 페리 퓨처 오브 더 피오르즈(Future of the Fjords)가 정숙하게 물살을 가르며 새로운 풍경으로 가세했다.




▶ More to: 목조 건축

발레스트란 한복판에 자리한 성 올라브 교회. ⓒ 고현

발레슈트란 마을을 거니는 도중 독특한 지붕 장식의 목조 건축을 만날 수 있다. 드라게스틸(Dragestil, 드래곤 스타일)로 불리며 19세기 말 노르웨이의 피오르 지역에서 유행한 건축이다. 지붕의 처마 끝을 바이킹 신화에 나온 용머리처럼 치장한 것이 특징. 마을에 총 6채의 드라겐스틸 가옥이 남아 있는데, 그중 성 올라브 교회(Church of St. Olav)가 돋보인다.



글/사진. 고현

고현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막 시작된 백야 때문에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 하릴없이 피오르 주변을 배회했다.


ⓘ 취재 협조 노르웨이관광청(visitnorway.com), 베르겐관광청(visitbergen.com), 피오르노르웨이(fjordnorway.com)




'다시, 피오르의 시간'에 이어진 이야기

다시, 피오르의 시간 Part 2 - 로엔, 예이랑에르

노르웨이 피오르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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