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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ug 30. 2019

남부 캘리포니아의 픽션 속으로

디즈니랜드의 고장 애너하임에서 야구와 코믹콘의 도시 샌디에이고까지 .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에…." 
- <스타워즈> 모든 시리즈의 오프닝 문구


애너하임 근교의 헌팅턴 비치(Huntington Beach)는 유명 서핑 포인트. © HIROYUKI MATSUMO/GETTY IMAGES


지난 20년간 애너하임(Anaheim)에 사는 동안 디즈니랜드 파크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우버 기사가 말할 때, 나는 그를 이해한다. 꿈과 희망의 나라가 누군가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장소일 수 있다. 그것이 원조 디즈니랜드, 그러니까 1955년 여름 이래로 전 세계 어린이(그리고 어른 역시)의 버킷 리스트를 뒤바꾼 곳이라 할지라도. 바로 전날 디즈니랜드에 가지 않았다면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야자수 아래를 지나 다운타운을 향해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새로운 어트랙션 ‘스타워즈: 갤럭시즈 에지’가 얼마나 쿨한지 설명한다. 설득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지만.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디즈니랜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곳의 경이는 환상을 치밀하게 구현한 데에 기인한다. 어스름 무렵, 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성과 캐리비안의 해적, 유령의 집을 지나쳐 은하계 끝 혹성 바투를 향해 엄청나게 빨리 걸어갔다. “스타워즈는 어차피 계속 거기에 있어요. 여기 잠깐 들렀다 가도 어디 안 간다고요.” 유령의 집 문지기가 볼멘소리를 했다. 1955년 7월 17일 오후 4시 43분, 월터 E. 디즈니는 디즈니랜드의 개막을 알리며 이렇게 연설했다. “이 행복한 장소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디즈니랜드는 바로 여러분의 나라입니다. 나이 든 분들은 이곳에서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이 되살아날 것이며, 젊은이는 도전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향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타워즈: 갤럭시즈 에지’의 놀이기구 밀레니엄 팔콘은 탑승자가 각각 파일럿, 엔지니어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터랙티브 놀이 기구다. © 이기선


창립자 월터 E. 디즈니를 인용하자면 ‘꿈과 생쥐 1마리에서 시작한’ 디즈니랜드는 60여 년 전, 오렌지 카운티의 최대 도시 애너하임의 역사를 바꿨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2012년 루카스 필름과 스타워즈 판권을 인수해 다음 시대를 준비했다. 지난 5월 말 세상에 공개된 초대형 프로젝트 갤럭시즈 에지는 디즈니랜드를 한층 쿨한 장소로 탈바꿈하고 타깃 고객층을확장하는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윽고 동료들과 우주선을 수리하며 간간이 울부짖는 츄바카를 만난다. 곧이어 우주의 미확인 지대와 가장 가까운 외딴 마을 블랙 스파이어 아웃포스트에 도착한다. 저항군을 수색하는 스톰트루퍼 무리는 록스타 같은 환호를 받으며 인파를 헤치고 다닌다. 은하계 전역에서 모여든 여행자와 악당, 사기꾼, 도굴꾼이 득실거리는 마을 시장에는 중세풍 옷을 걸친 직원이 (실은 오묘한 맛의 셰이크인) 블루 밀크와 그린 밀크를 권한다. 드로이드 창고에서 100크레딧을 지불한 사람들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나오는 부품을 가지고 열심히 자신만의 BB-8을 조립한다(‘달러’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건 금기다). 은하계에서 가장 빠른 우주선 밀레니엄 팔콘 앞에는 임무를 수행하려는 지원자들이 기꺼이 긴 줄을 서 있다.


애너하임 토박이 매디슨 코트는 만화책 애호가이자 비건이다. © 이기선


연극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동화 속 성 위를 수놓는 불꽃놀이가 끝나고 만화 속 캐릭터의 배웅을 받으며 집에 돌아갈 때가 오는 것이다. 야자수가 늘어선 센터 스트리트 프롬나드(Center Street Promenade)에 택시가 멈춰 선다. 애너하임 다운타운은 그저 손바닥만 한 변두리 동네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디즈니랜드의 희미한 흔적을 찾는다. 동네 만화방 팝 코믹스 앤드 컬처 엠포리움(Pop Comics & Culture Emporium)에서는 새로 연 어트랙션의 인기에 힘입어 새로 출간된 만화책 <스타워즈: 갤럭시즈 에지>가 베스트셀러다. 만화책 코너 옆에는 큼직한 E.T. 모형과 더불어 디즈니 캐릭터 피겨를 진열해놓았다. 빨간 머리의 파트 타이머 매디슨 코트(Madisyn Cote)는 어릴 적 이 가게의 전신이던 비치 볼 코믹스(Beach Ball Comics)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아이였다. 이제 수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그녀의 열정은 만화책과 동물로 향해 있다. 가게 안에는 단골인 듯 보이는 운동복 차림의 주민 몇이 어슬렁거린다. 고민 끝에 비치볼 코믹스에서 몇 년 전 출간한 중고 만화책과 신작 <스타워즈: 갤럭시즈 에지>를 구입한다.


코트가 근처의 비건 식당을 추천했지만 정작 내가 향한 곳은 애너하임 브루어리(Anaheim Brewery). 1919년 선키스트 공장을 개조한 푸드 홀 애너하임 패킹 하우스(Anaheim Packing House) 옆 양조장이다. 19세기 애너하임을 세운 독일계 이주민은 신생 도시에 독일어 이름과 크래프트 맥주를 선사했다. 애너하임으로 이주한 그레그 제로박(Greg Gerovac)이 도시의 잊힌 양조 역사를 파헤친 덕분에, 금주법 시대 후 문을 닫은 브루어리는 8년 전 영업을 재개했다. 제로박은 시에 문의해 버려진 양조장 건물을 보수했고, 역대 세 운영자의 후손을 수소문해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100년 전 방식으로 정통 독일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제로박이 말한다. “애너하임 같은 곳은 세상에 없어요. 도시의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경향은 디즈니랜드로부터 흡수했다고 생각해요.”



언성 브루잉 컴퍼니에서는 크래프트 맥주와 만화책이 완벽한 궁합을 이룬다.  © 이기선


언성 브루잉 컴퍼니(Unsung Brewing Company)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컬트 분위기의 이 브루어리는 이름대로 ‘이름 없는 영웅 (unsung heroes)’에 헌사를 바치는 장소다. 만화책과 보드게임을 진열해놓았고, 벽에는 형광색 페인트로 미치광이 박사 프로펠러헤드가 그려져 있다. 프로펠러헤드는 현지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가미한 맥주인 아메리칸 앰버 에일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 양조자들은 현대적인 미 서부 스타일의 맥주를 개발하며, 여기에 직접 창조한 캐릭터 이름을 붙인다. 이를테면 외계 행성 출신의 정찰병 안시아는 과일 향 가득한 IPA의 이름이다. “저희는 맥주 하나하나를 캐릭터로 지칭해요. 브루어 또한 이름 없는 영웅이죠.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하는, 육체적으로 고된 일을 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니까요.” 캐릭터 티셔츠를 입은 양조자 스펜서 클라크(Spencer Clark)가 억울한 기색 없이 말한다. 그가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썼다는 첫 만화책을 선물로 건넨다. 책에는 고향 행성이 폭발하며 지구에 눌러앉았다가 자연을 파괴하려는 악당에 맞서 싸우는 외계인 안시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글/사진. 이기선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에디터다. 지난 6월 미국 최대의 관광전 ‘IPW 2019’의 일환으로 서던 캘리포니아를 여행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픽션 속으로'에 이어진 이야기

남부 캘리포니아의 픽션 속으로 pt.2 - 터메큘라

▶ 남부 캘리포니아의 픽션 속으로 pt.3 - 샌디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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