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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Sep 03. 2019

지난여름의 포도밭

와인 생산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지구 최대의 퍼레이드, 페트 데 비녜롱. 

달콤한 포도와 향기로운 와인은 스위스 레만 호숫가의 농부에게 축복을 선사한다. 2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포도밭에 헌사를 바치는 여름의 축제를 즐긴다.



레만 호수의 태양

    

레만 호수와 알프스의 풍경은 수많은 여행자를 끌어당겼다. ⓒ 허태우


분명하다. 풍경은 사람을 이끈다. 자기장처럼 발휘되는 그 힘에 이끌려 사람들은 여정의 행렬을 이룬다. 부푼 기대를 머금고, 풍경의 인력은 사람보다 강력하니까 우리는 그저 따를 뿐이다. 범인(凡人)도 영인(令人)도, 혹은 이인(異人)도 그저 풍경의 인력에서 탈출하지 못한 위성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 여름의 한복판,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며 남몰래 상상에 빠져든 이 열차 칸의 승객들처럼.


제네바역을 출발한 열차는 호수를 옆에 끼고 달린다. 창밖으로 보란 듯이 태양이 내리쬔다. 뭉실뭉실한 흰구름 아래 레만 호수(Lac Léman)는 망막하다. 이 호수 변 경사지에서 자라는 포도는 태양에서 내리쬐는 빛, 레만 호수에서 반사되는 빛 그리고 돌담이 머금은 빛을 받아 영근다고 하지. 어느덧 바깥 풍경은 낭만주의 화가가 사랑할 요소로 채워진다. 윤슬 그득한 청록빛 호수와 한여름의 역광에 아스라히 보이는 알프스의 실루엣. 풍경은 이렇게도 완벽한 무대를 세워 여행자를 한 편의 연극 속 배우로 캐스팅한다. 물론, 그것이 희극이면 좋겠는데.



브베에 머물다 생을 마감한 찰리 채플린의 기념상. ⓒ MAUDE RION


올해 스위스에서는 거대한 극이 펼쳐진다. 페트 데 비녜롱(Fête des Vignerons)이다. 100년 동안 단 다섯 번 개최된 와인 축제, 페트 데 비녜롱이 시작되면 호숫가 소도시 브베(Vevey)에 야외 공연장이 서고, 풍경과 무대가 어우러지고, 전 세계에서 관객이 모여든다. 자연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3주간 도시 전체를 물들이고 나서야 마무리되는 축제. 페트 데 비녜롱이 희세의 배우 찰리 채플린이 말년을 보내고 생을 마감한 브베에서 열린다는 게 우연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망명해야 했던 그는 위로가 필요했을 터다. 레만 호수와 알프스, 햇살, 약간의 와인으로부터 말이다.



축제의 환영


페어몬트 호텔 객실에서 바라보이는 전경. ⓒ 허태우


“페트 데 비녜롱은 페트 데 비녜롱입니다. 일부러 번역하지 않죠.” 스위스 보(Vaud)주 관광청 대표 안드레아스 반홀처(Andreas Banholzer)의 설명을 상기한다. 전날 늦은 오후, 레만 호숫가의 또 다른 대표 휴양지 몽트뢰(Montreux)에서는 환영회가 열렸다. 샛노란 차양이 나부끼는 페어몬트 호텔(Fairmont Hotel)의 프티 팔레 테라스(Petit-Palais Terrace)에서 지역 관광청 담당자들은 페트 데 비녜롱에 대해 한마디씩 던졌다. 화창한 햇살에 노출된 그들의 언사에는 애정과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누가 이 축제를 만들까요? 바로 여기에 살고 있는 주민입니다. 6,000여 명의 주민이 참가하죠. 그들은 프로페셔널한 배우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일반인이에요. 약 7년의 준비 기간과 10달의 리허설을 걸쳐 무대에 오르는데, 마치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축제 같아요.”



페트 데 비녜롱이 열리면 브베 곳곳에 야외 바가 들어선다. ⓒ CELINE MICHEL/FÊTE DES VIGNERONS, MAUDE RION


몽트뢰를 출발해 수면 위를 미끄러지던 유람선이 서서히 브베의 선착장에 다가선다. 이미 수변의 산책로에서 축제의 기운이 물안개처럼 풍겨온다. 보통 때라면 여유로운 분위기가 흐를 테지만 이 시기만큼은 예외다. 브베의 중앙 광장에 공연을 위해 지은 2만 석 규모의 무대인 아레나는 알록달록한 외관을 과시하고, 야외 부스와 덱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참가자들이 차려입은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 때문에 거리는 온통 난분분하다. 21세기의 첫 번째 페트 데 비녜롱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정점에 다다른 듯하다. 노천에 차려진 와인 바에서 페도라를 쓰고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한 사람이 잔을 들어올리며 외친다. “상테! 상테! 상테!” 아, 아직 이르다. 오늘 축제의 공연 시작 시간은 오전 11시. 와인을 향한 진정한 찬사는 아직 터지지 않았다. 태양과 인파가 분출하는 열기는 서서히 관객들이 입장하고 있는 아레나를 벌써 뜨겁게 달군다.



전통적으로 페트 데 비녜롱의 첫날에는 와인 생산자의 노고를 축하하는 성대한 퍼레이드가 열린다. ⓒ JEAN CLAUDE/FÊTE DES VIGNERONS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797년, 지금으로부터 222년 전, 브베에서 첫 번째 페트 데 비녜롱이 열렸다. 레만 호수 북서쪽, 브베와 면한 라보(Lavaux)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밀스러운 길드인 콩프레리 데 비녜롱(Confrérie des Vignerons)이 주최한 행사였다. 경사지를 일궈 만든 포도밭이 대지 미술처럼 펼쳐지는 라보는 스위스의 주요 와인 생산지다. 전통적으로 가족 단위의 소규모 와이너리가 생산하는 섬세한 맛의 화이트 와인이 이곳을 대표한다.


페트 데 비녜롱의 주된 목적은 지역의 탁월한 와인 생산자를 치하하고, 1년 내내 포도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격려하는 것. 콩프레리 데 비녜롱의 평가에 따라 와인 생산자는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의 영예를 얻었는데, 페트 데 비녜롱을 통해 그들은 성대한 수상 축하를 받았다. 첫 번째 축제가 마무리되고, 22년이 지난 후에야 두 번째 페트 데 비녜롱이 열렸다. 세 번째는 1833년에 열렸다. 그다음은 1851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불문율처럼 한 세대에 한 번씩, 100년에 다섯 번씩 열렸다. 마지막 축제는 1999년에 끝났고, 이번 페트 데 비녜롱은 열두 번째다. 누가 어떻게 축제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일까. 보 관광청의 프랑수아 미셸(François Michel) 부대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콘프레리 데 비녜롱의 회원이 모여서 여러 조건을 따져가며 시기를 정하지 않을까요. 국가적 행사라든지, 국민투표라든지, 좋은 수확이 예상되는 시기라든지… 아마도 그럴 거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굳이 번역하자면 ‘비녜롱의 형제단’으로 부를 수 있는 콩프레리 데 비녜롱의 정체는 스위스 은행처럼 여전히 일반인이 파악하기 힘든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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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허태우

허태우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편집장이다. 약 20년 후에 열릴 다음 페트 데 비녜롱에는 페도라를 꼭 챙겨 갈 생각이다. 햇빛을 피해 와인을 좀 더 음미할 수 있도록.



'지난 여름의 포도밭'에 이어진 이야기

지난 여름의 포도밭 pt.2 - 페트 데 비녜롱의 개막과 여운

스위스 보 지역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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