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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Oct 23. 2019

프로방스식 삶의 근원을 찾아서



마르세유에서 출발해 프로방스의 

심장 보클뤼즈로 향한다. 

뜨거운 햇살 아래 최고의 올리브와 트뤼프, 

포도가 나는 풍요의 고장으로. 

남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는 

삶의 방식을 한 입 맛보기 위해.




좋은 엄마가 함께한 모든 식사


구 항구 남쪽 골목에서 바라본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19세기, 마르세유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세운 성당이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입구로 향하는 이들. 지역 식자재를 고집하는 라 파사렐의 황새치 스테이크와 화이트 와인 1잔.  © 이기선


점심시간, 라 파사렐(La Passarelle)의 후덥지근한 주방에는 재즈가 흐른다. 마르세유 등대가 그려진 앤티크 포스터와 터번을 두른 식당 창립자 필리프 디아(Phillip Dias)의 사진이 샛노란 벽에 붙어 있고, 선반에는 <Le Portugal>이라는 낡아빠진 책이 놓여 있다. 파리 출신의 셰프 제레미 페네토(Jeremy Fenneteaux)가 이끄는 이 주방에서는 지역 식자재를 기반으로 매달 메뉴를 바꾼다. “마르세유에는 온갖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식자재가 있어요. 저희 식당 역시 지중해식 마르세유 요리를 내지만, 여러 영향을 흡수했지요. 예를 들어 저는 북아프리카산 말린 과일을 자주 활용해요.” 페네토는 식자재가 눈앞에 있으면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 나는 건너편 정원에 자리를 잡는다. 곧 터번을 멋지게 두른 웨이트리스가 접시를 가져다준다. 토마토와 고추로 만든 강렬한 주황빛 퓌레에 시칠리아식 가지 요리인 카포나타를 뿌리고 마르세유 앞바다에서 잡은 황새치 스테이크를 얹었다. 디저트는 꿀과 로즈메리에 재운 무화과와 바닐라 치즈다.


마르세유에서는 ‘다양한 문화의 혼합’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듣게 된다. 향신료 향이 코를 찌르는 북아프리카식 시장을 누비고, 200년 넘은 약국에서 약재를 구입하며 나는 그 말의 실체를 확인한다. 그날 저녁, 이탈리아계 마르세유 토박이 야니크 롱(Yannick Long)이 보트를 몰고 구 항구에 도착한다. 롱은 마치 아끼는 말을 몰듯 파도 위를 가로지른다. 그의 보트를 얻어 타고 뮤셈(MuCEM)과 요새, 등대 그리고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인 샤토 디프(Château d'If)를 지나, 우리는 일 뒤 프리울(Îles du Frioul)의 바위투성이 해변에서 멱을 감은 뒤 섬의 부두로 향한다. “마르세유에는 온갖 문화가 섞여 있어요. 내가 마르세유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자유지요.” 부둣가 허름한 피체리아에서 이탈리아식 피자를 먹으며 롱이 말한다.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와 바질을 얹은 피자는 화덕에 먹음직스럽게 구웠지만, 파스타는 면이 불어 있고 소스는 조개 맛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았다.



오텔 벨뷔 2층의 비스트로 라 카라벨(La Caravelle)은 아침부터 새벽까지 내내 문을 연다. 그물망을 본뜬 뮤셈의 외관 너머로 마르세유 등대와 구항구가 보인다. © 이기선

매 끼니가 일생일대의 식사는 아닐지라도 마르세유의 미식 문화는 고유성을 지닌다. 이를테면 부야베스처럼 말이다. 1980년대에 마르세유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전해오는 이 음식을 정의하는 헌장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전설적 셰프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조차 구 항구의 생선 상인에게서 홈메이드 부야베스 레시피를 얻었다. 낭만적인 환경도 여기에 일조한다. 오텔 벨뷔(Hôtel BelleVue) 비스트로의 창가에서 아침 식사로 바게트에 정어리 통조림을 곁들일 때에도, 인터컨티넨탈 마르세유(InterContinental Marseille)의 야외 브라스리에서 부야베스 밀크셰이크를 먹을 때에도 쾌청한 미스트랄이 불어오고, 저 멀리에서 ‘좋은 엄마(La Bonne Mère)’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도심 언덕배기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Notre-Dame de la Garde)의 황금빛 성모마리아상 말이다. 마르세유의 모든 사람을 지켜주는 ‘엄마’는 낮에는 뜨거운 햇살을, 밤에는 조명을 받아 언제나 빛난다. 바로 이곳에서 프랑스 최고의 올리브와 메론, 트뤼프와 포도가 나는 곳을 찾아 북쪽으로 향할 계획을 세운다. 이른바 ‘프랑스의 텃밭’이라 불리는 보클뤼즈(Vaucluse) 지방으로.




Tip 부야베스 밀크셰이크

인터컨티넨탈 마르세유의 레스토랑 레 페네트르(Les Fenêtres)는 미쉐린 스타 셰프 리오넬 레비(Lionel Levy)를 영입할 때 다음 조건을 걸었다. ‘당신이 개발한 부야베스 밀크셰이크 레시피를 가져올 것!’ 일설에 따르면 레비는 10여 년 전 미국인 동료 셰프의 도전을 받아 이 기묘한 애피타이저를 개발했다. 유리잔에 맨 아래부터 순서대로 루유(rouille) 소스, 마스카포네 치즈와 달걀, 거품을 낸 농어 수프를 층층이 올렸는데, 모든 층을 한 번에 먹어야 한다. 




예술은 매 끼니에 깃들어 있다

16세기 대저택을 개조한 호텔 샤토 드 라 피올린의 정원. © 이기선

프로방스는 동쪽으로 이탈리아 국경, 서쪽으로 론(Rhône)강 하구, 남쪽으로 지중해가 경계 짓는 3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땅덩어리다. 2,000여 년 전 로마인은 국경 너머에서 점령한 최초의 영토에 원형 경기장, 목욕탕 같은 유적을 남겼다. 프로방스라는 지명은 ‘로마의 속주(Provincia Romana)’라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했다.


땅거미가 젖어들 무렵, 엑상프로방스 (Aix-en-Provence) 외곽의 16세기 대저택을 개조한 샤토 드 라 피올린(Château de la Pioline)에 도착한다. 직원 20여 명에 객실은 18개에 불과한 이 호텔에는 높이가 3미터는 될 법한, 걸쇠로 걸어 잠그는 대문은 있지만 엘리베이터는 없어서 호텔 내 레스토랑 웨이터까지 동원돼 짐을 위층 객실로 날라주어야 했다. 그러니까 분자 요리 전문 셰프 피에르 르불(Pierre Reboul)이 이끄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말이다. 체크인 후 그리스식 석상이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정원에 자리를 잡자, 다시 본업으로 돌아온 웨이터가 방울토마토로 변장한 푸아그라, 조리법이 까다로운 비둘기 요리에 이어 커피 캡슐 모양의 얼린 초콜릿을 태엽 인형처럼 정확하게 내온다.



엑상프로방스 시청 앞 광장에 매일 서는 식자재 시장. 엑상프로방스 구도심의 성당. © 이기선

비록 이곳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분위기라 해도, ‘엑스’라 불리는 유구한 도시 엑상프로방스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도시의 중심 대로인 쿠르 미라보(Cours Mirabeau) 초입 광장에는 그림 도구를 짊어진 폴 세잔 동상이 분수를 바라보고 서 있다. 세잔의 자취를 좇아 프로방스를 여행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 편지에서, 세잔은 “자신이 유일하게 본질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실현’에 도달”하려 일생을 바쳤다고 썼다. 그리하여 엑스 출신의 괴팍한 화가는 도시 동쪽 몽타뉴 생트 빅투아르(Montagne Sainte-Victoire)를 80여 차례 반복해 그렸으며, 사과 몇 개와 와인병에 신성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벼룩시장이 늘어선 쿠르 미라보를 지나, 세잔과 에밀 졸라, 피카소 같은 이들이 시간을 보내던 브라스리 레 되 가르송(Les Deux Garçons) 옆 파사주 아가르(Passage Agard)로 들어선다. 신생 미식 명소가 된 이 통로에는 라 프로마제리 뒤 파사주(La Fromagerie du Passage)라는, 남프랑스 자연의 산물로 가득한 창고가 있다. 염소 치즈와 와인, 콜드컷과 타프나드(tapenade, 올리브 오일과 마늘, 안초비, 허브로 만든 페이스트) 등이 그 안에 도열해 있다. 시청 앞 파머스 마켓을 둘러본 뒤, 구도심 골목을 거닐며 식전주 파스티(pastis)와 칼리송(calisson) 같은 프로방스 특산물을 찾아 나선다. 원조 칼리송집을 자처하는 르 로이 르네(Le Roy René)는 1920년 개업 당시의 레시피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아몬드, 멜론, 밀가루가 각각 3분의 1씩 들어간다. “전설에 따르면 15세기 프로방스의 영주 르네가 절대로 웃지 않던 어린 부인을 웃게 하기 위해 이 디저트를 만들었고, 그녀는 마침내 미소를 지었죠.” 매니저 엠마(Emma)가 설명한다. 전설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의 칼리송 요리사들은 우리를 위해 카시스 맛, 라임 맛, 초콜릿 맛 칼리송을 창조했으렷다.




샤토 라 코스트 내 호텔 겸 스파 빌라 라 코스트(Villa la Coste)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 이기선

오텔 드 코몽 1층의 레스토랑은 건물을 지은 시기인 18세기풍으로 꾸몄다. © 이기선

카페 드 코몽에서 맛보는 타르트. © 이기선


엑상프로방스에서 예술과 미식의 조합은 일종의 트렌드다. ‘엑스의 마레 지구’라 불리는 마자랭 지구(Quartier Mazarin)의 복합 문화 공간 오텔 드 코몽(Hôtel de Caumont)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긴 줄을 선다. 18세기 대저택을 복원한 파스텔빛 살롱에 앉아 키슈와 제철 과일 타르트에 칼질을 하기 위해. 시 북부의 샤토 라 코스트(Château la Coste)는 또 어떤가? 프로방스에 처음 와인 양조법을 들여온 고대 그리스인은 2,500여 년 후 미래인이 와인을 이런 방식으로 즐기리라고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와인 셀러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을 연거푸 시음하고 붉어진 얼굴로 아트 트레일을 따라간다. 광활한 대지에 프랭크 게리와 안도 다다오, 루이 부르주아 등의 작품이 널려 있다. 포도밭 너머의 호텔 로비 테라스에 서서, 나는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야외 수영장에서 물살을 튕기는 한 노인을, 놀랍게도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을 연상시키는 그 풍경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다. 상상했던 프로방스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글/ 사진. 이기선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에디터다. 조만간 마르세유에 다시 갈 생각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위니테 다비타시옹 내 호텔에 묵기 위해, 제대로 된 부야베스를 먹기 위해, 암석 해안에 드러누워 있기 위해 등등.



취재 협조 프랑스 관광청(kr.france.fr), 

에어프랑스(airfrance.co.kr),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 관광청(provence-tourism.c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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