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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Oct 25. 2019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통영에 살다



훌쩍 통영에 내려가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그가 알려주는 진짜 통영의 맛깔나는 모습들.






뱃길에서 통영을 보다. 바다를 바라보는 통영보다 바다에서 본 통영이 훨씬 아름다웠다. ⓒ 밥장

2016년 가을 통영 당동에 집을 막 구했을 즈음에 ‘남해의봄날’ 출판사 대표를 만났다. 그녀는 서울살이에 지쳐 몸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다. 남편과 함께 아무 연고도 없는 통영에 무작정 내려왔다. 봉수골 전혁림미술관 옆에 집을 얻어 출판사를 차리고 작은 책방을 열었다. 8년 전 일이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하루하루가 축제였지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 있었어요. 그런데 뭐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잖아요. 익숙하면 평범해 보이고요. 그때 날마다 글을 썼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후회 아닌 후회를 합니다. 밥장 님도 어렵게 통영에 오셨으니 글도 좋고 그림도 좋아요. 지금 이 순간을 남겨보세요. 더구나 작가님이잖아요.” 이후 나는 통영과 서울을 오가는 두 집 살림을 시작했고, 통영에 머물 때마다 몰스킨을 손에 쥐고 그림일기를 그렸다. 덕분에 4년째 접어든 지난 늦여름 <밥장님! 어떻게 통영까지 가셨어요?>라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통영 말’로 바꾸면 “니 만다꼬 통영까지 왔노?” 정도 될까? 만약 그때 출판사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통영살이를 막 시작하는 분에게 아직 통영 안 본 눈 산다 며 비슷한 충고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그림일기를 다시 뒤적거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살짝 붕 떠 있는 기분이 행간 사이에서 느껴진다.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축제였다.






충무김밥, 회, 꿀빵을 넘어서


통영의 서호시장에서 마주치는 일상. ⓒ 밥장

통영에 놀러 온 분을 만날 때마다 통영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물어본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문화 예술의 도시라고 답하는 분이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어봤거나 TV프로그램 <알쓸신잡>을 보았거나 학교 다닐 때 교과서로 성실하게 배운 분이다. 해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찾는 분도 비슷하다. 어리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제법 나이가 있는 분이다. 둘째, 충무김밥, 회, 꿀빵 이른바 ‘통영삼합’을 외치는 분이다. 저녁에는 꼭 횟집에 들러 소주를 걸치거나, 아니면 활어 시장에서 회를 떠서 숙소에서 먹어야 한다. 아침에는 서호시장에서 시락국으로 해장해야 한다. 간식으로 충무김밥도 잊지 않고 돌아갈 때 꿀빵도 꼭 챙겨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는 분이다. 20대나 그보다 어린 분이 많다. 결코 무식(!)해서가 아니다. 통영에서 나고 자라지 않고서는 특별히 떠오르는 이미지나 기억이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이중섭, 전혁림, 윤이상 등 통영을 빛낸 위인도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들이 남긴 작품도 옛 것이 되었다(옛것이라고 가치가 없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되어 모를 뿐이다).








거리를 쏘다니는 숨은 예술가를 찾아서


(왼쪽) 지금은 사라진 성림다방을 상상하며 그렸다. (오른쪽) 이중섭이 시인 김춘수와 유치환 등과 어울렸던 옛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 ⓒ 밥장

1950년대 통영 호심다방에서는 이중섭과 전혁림 등 작가들이 단체전을 열었다. 성림다방에서는 이중섭이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베레모를 쓴 채 손에 담배를 들고 앉아 있는 흑백사진도 호심다방에서 찍었다. 시인은 축하한다며 시를 남겼고, 지역 유지는 흔쾌히 작품을 사주었다. 한창 좋았던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통영에는 아직 예술가들이 남아 있다. 이곳이 고향인 분도 있고 멀리서 애써 찾아와 자리를 잡은 분도 있다. 통영이 고향인 김재신 작가는 햇살에 반짝이는 통영 바다를 그린다. 나무 위에 색을 여러 겹으로 입힌 뒤 다시 끌로 깎아낸다. 조탁이라는 독특한 기법이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통영 바다와 바다에 비친 윤슬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다. 그는 매년 자기 돈을내서 시민회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통영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무와 자부심 때문이다.

전영근 화가는 전혁림미술관 관장으로 고(故) 전혁림 화가의 아들이다. 1975년부터 봉수골에 터를 잡은 뒤 2003년 옛집을 헐고 미술관을 세웠다. 외벽에는 직접 제작한 7,500여 장의 타일을 붙여 통영스럽지 않은 통영 풍경을 만들어냈다. 미술관 앞집은 봄날의 책방이고 뒷집은 남해의봄날 출판사다. 그리고 책방 옆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오면 ‘내성적싸롱호심’이 숨어 있다. 통영 출신 화가이자 교사이며 문화원장을 지낸 김안영 작가가 1978년에 집을 짓고 40년을 살았던 곳이다. 작년에 나는 이 집을 인수해 좋았던 시절 호심다방을 되살려보자는 뜻으로 새롭게 고쳐 문화살롱으로 문을 열었다. 용화사나 미륵산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작고 조용한 동네가 ‘지금, 통영’의 문화와 예술을 보고 느끼는 공간으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바뀌고 있다.




고깃배들이 정박한 강구안 풍경. ⓒ 밥장

예술이 꼭 전시장에만 들어 있는 건 아니다. 월요일 새벽 폐기물을 버리는 날이면 마을 곳곳에는 버려진 자개농과 문갑들로 넘쳐난다. 요즘 없어서 못 구하는 귀한 물건인데도 30년 이상 지겹도록 써온 탓에 매끈한 붙박이장이 더 구미에 당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내놓은 물건은 말 그대로 줍는 사람이 임자다. 나도 몇 개 주워 싸롱에서 무척 잘 쓰고 있다. 서피랑 골목에 자리한 카페 새미는 이렇게 모아둔 자개장을 활용해 독특한 공간으로 꾸몄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양옥이라 입구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할지 말지 잠깐 고민이 된다. 반짝거리는 마루, 곳곳에 놓인 오래된 소품 그리고 새롭게 용도를 찾은 자개들을 보다 보면 외할머니 집에 놀러온 어린 손자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통영 시내에서 벗어나 한적한 산양일주도로를 달리다 보면 연명예술촌 입구에 다다른다. 목수 강동석은 10년 가까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 강의를 하고 직접 만든 가구를 판 돈으로 조금씩 재료를 사 모아 손수 나무집을 지었다. 앞으로 꿈은 나무배를 짓는 거라고 한다. 그는 목수이자 틀림없는 예술가다. 물론 생계 따로, 작품 활동 따로 하는 분도 있다. 김상환 작가는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카페와 펜션을 운영한다. 공식 직업은 바리스타, 카페지기, 아르바이생(?)이지만 흑백사진으로 통영을 담아내는 엄연한 사진가다. 방송 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도 소개된 맛집 멍게가 의 이상희 사장은 또 어떤가. 축제 때 이순신 밥상과 통영 전통 밥상을 재현하고 짬짬이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으로 담아 책을 내기도 했다. 통영과 거제 앞바다에 굴을 키우고 가공하는 중앙씨푸드 장석 대표는 등단한 시인이다. 공장 앞면은 프랑스 작가가 그린 커다란 고래 벽화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반전은 따로 있다. 앞서 소개한 모든 작가를, 길을 걷다가 장을 보다가 버스를 타거나 단골 다찌에서 술을 마시다가 진짜 우연히 마주친다는 점이다. 통영에서는 예술가의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카페 주인, 식당 사장, 동네 형님으로 뒤죽박죽 얽혀 있다. 통영의 예술은 전시장이나 책, 심지어 작품보다 중앙시장 안쪽 싸구려 선술집이나 순댓집에서 동생들과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더욱 반짝거린다.


전혁림미술관 입장료 자율, 10am~5pm(수~일요일), 봉수1길 10.

내성적싸롱호심 11:30am~18:30pm(목~월요일), 봉수1길 6-15, 인스타그램 @salon.hosim

새미 아메리카노 4,000원, 11am~9pm(화요일 휴무), 가죽고랑2길 24, 인스타그램 @_seimee

연명예술촌 산양읍 연명길 140.

멍게가 멍게비빔밥 1만 원, 11am~8pm, 동충4길 25.




밥장은 직장생활 10년 차에 회사를 나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그간 <손으로 쓰고 그린 호주 40일>, <밤의 인문학> 등의 책을 냈고, 통영에서 문화 프로젝트를 열심히 벌이고 있다.



글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밥장, 통영에 살다'에 이어진 이야기

통영의 맛집과 멋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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