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더로드 Apr 17. 2020

경계를 넘는다는 것

애초에 세상의 온갖 경계와 국경을 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각국이 국경을 걸어 잠그는 지금.
여행가 박준이 국경을 넘어온 지난 시간과 그 의미를 되짚었다.






툰트라 지대를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 TYPEHISTORIAN/GETTY IMAGES



때로 여정은 기이하게 흘러간다. 나는 에볼라가 창궐할 때 남아프리카에, 메르스가 창궐할 때 이스라엘에 갔다. 파리 테러 발생 땐 파리에, 발리 화산 폭발 땐 발리에 갔다. 대단한 결정은 아니었다. 하필 그때 그곳에 갈 일이 생겼을 뿐이다. 정작 남아프리카와 이스라엘은 에볼라나 메르스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파리 테러는 좀 달랐다. 카페 손님 등 일반인을 표적으로  무차별 테러인데다 후속 테러가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두세 번씩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고 팽오쇼콜라를 맛있게 먹었다. 발리에선 활화산인 아궁산  코앞까지 찾아가 매일 뜨거운 증기를 바라봤다. 그저 남아프리카에, 이스라엘에, 파리에 가고 싶었고, 내 눈으로 활화산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여권에 수백 개의 스탬프가 찍혀 있어도 나는 여전히 다른 세상을 갈망한다.


독일 북부 뮌스터(Münster) 인근에서 머물 때였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다가 문자를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전화 걸 때 1,320원, 받을 때 409원.” 점심 먹고, 늦장을 부리다 오후 3시가 넘어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네덜란드로 달린 지 2시간 30분 만에 받은 문자다. 그러니까 여기 어딘가가 독일과 네덜란드 국경이란 의미였다. 삼엄하진 않아도 독일과 네덜란드를 딱 가르는 국경을 보고 싶었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국경을 보겠다고 고물 자전거로 30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나도 모르는 새 국경을 불쑥 넘은 것이다. 가만 보니 국경이란  표시는 없어도 두 나라를 구별한 순 있다. 독일 쪽 자전거도로는 보통 아스팔트인데, 네덜란드 쪽은 아스팔트에 어두운 갈색을 칠했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지 10분 만에 다시 국경을 넘어 독일로 돌아왔다.


늘 궁금했다. 지구의 크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이것이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고 싶은 이유다. 지구 둘레는 대략 4만 킬로미터. 열차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종착점인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9,289킬로미터, 그러니까 횡단열차를 타면 대충 지구 둘레의 4분의 1을 달리는 셈이다. 횡단열차는 시속 60~70킬로미터 속도로 일주일간 이 구간을 달리지만, 시속 300킬로미터의 KTX를 타면 30시간이면 족하다. 누군가는 기차가 아닌 차를 타고 이 길을 달린다. 나는 바이크를 타고 이 길을 달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는 약과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심지어 다른 누군가는 걸어서 이 길을 횡단하니까.


한 번은 피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승무원에게 부탁했다. “비행기가 적도 상공을 지날 때 알려줄 수 있나요?” 처음에는 보안 문제 때문에 말해줄 수 없다던 그녀는 잠시 후 기장의 승낙을 받았다며 20분 후 적도를 지날 거라 했다. 남반구에 있는 피지 난디공항을 이륙한 지 3시간 25분 만에 비행기는 1만1,582미터 상공에서 적도를 통과했다. 여기가 지구의 한가운데라고? 적도 위 하늘이 뭔가 특별하기라도 한 양 나는 뚫어져라 창밖을 바라봤다. 기분 탓인가? 저 멀리 지구의 가장자리가 보이는 듯했다.


2년 전 포르투갈 남부 파루(Faro)에서 런던으로 갈 때다. 체크인 카운터의 항공사 직원이 묻는다. “한국인이군요? 영국 비자나 영주권이 있나요?” 한국인은 영국 가는 데 비자가 필요 없다 해도 그는 좀체 수긍하지 않는다. 결국 게이트 앞에서 30여 분 잡혀 있었고, 내 뒤에 서 있던 승객들은 안됐다는 듯 나를 힐끔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참 머나먼 곳에 왔구나 느끼게 만든 해프닝이다. 비행기가 영국에 착륙하자 한국 외교부 문자가 쏟아졌다. “영국 정부, 영국 내 테러 경보 최고 단계로 상향 조정.” 오랜만에 찾은 영국의 환영 인사였다.


독일에 입국할 때 입국 카드를 쓰지 않게 된 건 제법 오래됐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난다. 3년 전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 이민국 직원은 두 가지 질문만 건넸다. “어디로 가죠? 유럽에 얼마나 머물 거죠?” 포르투갈 출국 때와 달리 10초 만에 독일 입국 심사가 끝났다. 유럽의 국경은 이리도 가볍지만 때로 이국의 국경을 넘은 대가는 가혹하다.





하이디 헤처의 빈티지 카 문짝에는 그녀의 세계일주 동선을 보여주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1930년식 빈티지 카 허드슨 문에 그려진 77세 하이디의 여정. ⓒ 박준



2018년 12월 말레이시아에서 지낼 때다. 늘 그렇듯 이른 아침, 중국인 식당에서 밀크티를 마시던 중 모로코 마라케시 인근 하이 아틀라스(High Atlas)산맥에서 노르웨이와 덴마크 여대생 두 사람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은 뉴스를 보았다. 북아프리카의 최고봉에 오르겠다고 나선 둘은 캠핑 중이었다. 내가 모로코를 여행할 때 꿈꿨던 여정 중 한 가지가 바로 하이 아틀라스 등정이었다. 



종종 ‘여행을 준비할 때 사람들이 하는 걱정은 대개 과장되거나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이라 말해왔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숱한 경계를 넘고자 하는 여행자에게 세상은 때로 가혹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지금의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여행은 늘 쉽지 않았다.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을 버티고 살 듯 여행자도 그렇다. 팔자가 좋아 이 나라 저 나라를 한가로이 유랑하는 게 아니다. 길을 나서면 때로 벅차고 때로 아프다. 때로는 휴양지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먼 길을 떠났다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우리는 엄청 운이 좋았던 게다.



5년 전 라오스 팍세(Pakse)의 어느 호텔 앞에는 보기 드문 클래식 카가 1대 서 있었다. 차 주인은 일흔일곱 살 할머니, 하이디 헤처(Heidi Hetzer)다. 그녀는 2014년 7월, 1930년식 빈티지 카, 허드슨(Hudson)을 타고 베를린을 출발해 홀로 세계일주 중이었다. 동유럽을 거쳐 중앙아시아, 중국, 남아시아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를 지나 미국과 캐나다로 갔다가 플로리다에서 독일로 돌아가는 대장정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2년간의 세계 일주를 계획한 대로 무사히 마쳤고, 지난해 4월 21일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모두는 동그라미다. 동그라미 안에는 내가 있고, 동그라미 밖에는 세계가 있다. 여행을 할수록 동그라미는 점점 커지고 세계와의 경계는 무한히 확장된다. 경계를 넘나드는 이방인이 곧 여행자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나는 내 여행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아주 특별한 장소에서 보낸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고. 경계를 무수히 넘어온 지난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하이디 할머니의 마지막 여행 또한 그랬을 것이다.




박준은 세계를 정처 없이 유랑하며 글을 쓰는 여행자다. 현지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자의 미술관> <떠나고 싶을 때 나는 읽는다> 등을 비롯해 다수의 여행 에세이를 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

▶ 론리플래닛 코리아 웹사이트

▶ 론리플래닛 코리아 페이스북  





작가의 이전글 집에서 이국을 여행하는 법 - Part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