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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y 08. 2020

머무름의 매력

프랑스 사람처럼 프랑스에서 살아보는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커플의 소리가 외딴 마을로 향했다.
뜻하지 않은 이동 제한령으로 그토록 바라던 프랑스식 일상을 영위한 그들이
그곳에서 보낸 45일을 들려줬다.






45일간 머문 무샹의 집. ⓒ LE SON DU COUPLE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난 새로움을 찾는 많은 걸음을 기대하게 한다. 가령 다양한 시도와 경험으로 얻는 새로운 시선 같은 것. 여행자 중 대개는 그 기대로 알찬 계획서와 설렘을 가슴에 품고 여정에 오를 것이다. ‘커플의 소리’의 이번 여행 프로젝트는 지난해부터 계획했다. 프랑스 방데(Vendée) 지역의 무샹(Mouchamps)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소도시라고 부르기엔 좀 더 아담한)에서 한 달간 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아무 계획 없이. 8년 전 거제도에서 우연히 프랑스 친구를 만났고, 4년 전 그를 통해 알게 된 친구가 사는 그곳에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꿈만 같았는데, “천국이 있다면 이곳일 거야”라고 무샹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건넨 말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야말로 여행자의 가슴으로 머물던 시간이었다.



우리의 버킷 리스트인 ‘프랑스 사람처럼 프랑스에서 살아보기’를 더 늦기 전에 실천하고 싶었다. 무샹에서 한 달, 부르주(Bourges)의 친구 어머님 댁에 들렀다가 리옹(Lyon) 친구 집에서 1주일, 파리에서 10일간 머문 후 한국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프랑스로 떠난 2월 말은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가 막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유럽에선 아직 특별한 이슈가 없던 때였다. 하지만 무샹에 도착해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이탈리아의 상황이 심각해졌고, 프랑스 정부는 3월 17일 정오부터 15일간의 이동 제한령을 선포했다. 친구 아버지가 정부 웹사이트에서 통행증 서류를 프린트해주며 주의 사항을 알려줬다. “식료품, 의료, 개인 운동, 출퇴근 등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을 금지한다. 밖에서 여러 사람과 만나거나 함께 운동하는 행위도 금지한다. 외출 시엔 항상 통행증을 소지해야 한다. 위반할 경우 벌금이 부가된다.” 


머물던 집에서 5분 정도 언덕을 오르면 마을 사람이 ‘무샹 시티’라 부르는 광장이 나온다. 빵집 2개, 약국, 레스토랑 겸 바, 크레페집, 정육점, 펍, 담배 가게, 은행이 하나씩 있는 아주 작은 광장. 집과 정원, 집 앞 산책길, 광장을 오가는 게 전부였는데 이동 제한령이 내려진 이후 빵집과 약국, 정육점, 담배 가게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았다.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하는 국가가 선포한 새로운 법령. 이때부터 프랑스 사람들이 코로나19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본래의 하루 일과는 이랬다. 침실 창문 덮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뜬다.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벽난로에 불을 피운다. 해가 잘 드는 테라스에 앉아 글을 쓰고 영상 작업을 하는 등 각자의 일을 하다가 언덕 위 교회 종이 정오를 알리면 가족들과 주방에 모인다. 볼 키스를 나누고 점심을 준비하며 그날의 첫 와인을 들이켠다. 2시쯤 점심을 먹고 와인을 마시다 4시쯤 흩어진다. 친구 집 수리를 돕거나 주변을 거닐며 시선에 닿는 것들을 담는다. 오후 7시, 가족과 레스토랑 겸 바 혹은 펍에서 마을 사람들과 일상을 나눈다. 그들의 프랑스어를 따라 하며 가족과 저녁을 어떻게 먹을지 의논한다. 밤 9시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우면 밤 12시다.



집 앞의 볕 좋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 LE SON DU COUPLE



이동 제한령이 선포된 후, 가장 힘들었던 건 프랑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볼 키스 금지였다. 집에서만 밥을 먹어야 하고, 이웃도 만날 수 없게 됐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닥쳤음에도 ‘일단 살아보자’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기에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방해한 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곳에 가려던 계획을 모두 취소해야 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였지만, 실제 기차도 하나둘 취소됐다. 그렇게 프랑스 시골 마을 무샹에서 당초 계획보다 긴 45일을 머물게 됐다. 짐을 싸고 풀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도리어 친구 가족은 이 소식을 반겼다. 덕분에 친구 아버지의 66번째 생일 케이크를 나눠 먹었고, 식목일에는 함께 감자도 심었다.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2017년 3월부터 1년간 집을 없애고 한국에서 여행하듯 살던 밴라이프가 떠올랐다. 움직이다 멈춰 선 곳에서 문만 열면 어디든 여행이 되던 그 시절은 어떤 여행보다 삶과 더 가까웠다. 간절한 여행이 문밖에 있어 가장 치열하게 일하며 살던 때. 자유롭게 이동하고픈 욕구를 마음껏 만끽했던 밴라이프와 달리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지만, 굳이 이동 제한령이 아니더라도 현지에서 사는 것처럼 머물러보겠다는 본래의 다짐에 더 충실하기로 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머무름과 제한된 상황에서의 머무름은 달랐다. 다름 아닌 긍정적인 마음을 샘솟게 했다. 어쩌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격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마음놓고 그곳에 젖어들기로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흘러가는 대로 흘려 보내는 유연한 태도를 지니자 여행의 옷을 살짝 걸치고 있던 매일은 완벽한 ‘생활’이 되기 시작했다. 



보름달로 향하는 달과 강에 비친 나무들. ⓒ LE SON DU COUPLE



프랑스 동쪽과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 지역의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3월 25일, 이동 제한령 지침이 한층 강화되었고, 기간도 연장되었다. 짧은 외출은 하루 1시간, 집 반경 1킬로미터 제한. 이동 사유 문항은 세분화되었고, 출발 시간을 적어야 했다. 집 앞 유채꽃밭을 걷거나 숲길을 한 바퀴 돌면 금세 1시간이 지났다. 통행증 서류를 품에 넣고 점심 전 또는 해 질 무렵 산책을 했다. 시간 제약이 있으니 빛이 주변을 비스듬하게 비추는 시간을 일부러 골랐다. 물론 무샹은 어느 길을 언제 걸어도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트에 갈 때조차 지나치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애틋했다. 1시간 안에 만나고 이별해야 한다. 기회의 상실, 언제든 만날 수 없다는 것. 거리가 생기고, 시간이 벌어지면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된다. 한 곳에, 그것도 제한된 반경에 머물게 되니 시선의 거리가 좁아진다. 시선의 거리가 좁아지니 곁에 있는 것들에 오래 눈을 두고 오래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곁에 있는 것들과 빨리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거나 얻었다. ‘많이’가 아닌 ‘깊이’ 볼 수 있는 기회. 이동 제한 속 머무름의 가장 큰 매력이다. 겨울을 나고 여린 연둣빛 새잎을 뽐내는 봄은 늘 기특하지만, 올해의 봄은 유독 더 기특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어색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자연은 어김없이 다음 계절로 향하고 있었다. 현관 앞 보라색 꽃이 만발한 등나무, 침실 창문 너머 강물 위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 새들의 대화, 하얀 동백꽃, 바람에 흐느적대는 키 큰 나무들, 노랗고 빨간 튤립, 짙은 보라색 꽃을 피운 라벤더, 겹겹이 흩날리는 벚꽃. 자연을 따라 마을 사람들도 봄으로 들어선다. 한낮 사방에서 들리는 잔디 깎는 소리, 텃밭을 가꾸는 바쁜 몸짓, 굴뚝 위로 피어오르던 연기, 포근한 저녁 바비큐 굽는 냄새 등.


미리 챙겨 가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한국 식자재로 친구 가족에게 코리안 바비큐를 포함해 불고기, 제육볶음, 갈비찜, 장조림, 김치찌개, 부대찌개, 잡채 등 여러 한국 요리를 만들어줬다. 심지어 김치까지 담갔다. 우리 역시 프랑스식 바비큐와 스테이크, 친구 아버지의 여자친구가 해주는 비프 브루기뇽, 이란 요리, 레바논 요리 그리고 럼을 이용한 도넛 모양의 케이크인 바바오럼과 애플타르트, 쇼콜라 무스 같은 프랑스식 디저트를 맛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점심, 저녁 메뉴를 정하는 고민이 차츰 깊어졌다. 사실 서울에서도 식사 메뉴를 고르는 고민과 산책을 자주 하곤  했다. 결국 두 지역에서의 생활이 같아졌다. 단둘이 아닌 다른 가족과 함께 사는 점이 달랐지만,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하나의 생활을 이뤘다.



무샹의 정경을 기록하는 허남훈 감독. ⓒ LE SON DU COUPLE



“언제든 돌아와, 너희가 원할 때 언제든. 우리는 가족이니까. 많이 그리울 거야.” 돌아오기 전날 밤,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친구가 한 말에는 아쉬움과 다정함이 가득했다. 45일 동안 프랑스 시골 마을, 한 곳에 한 가족과 오래 머물렀다. 그들과 함께 갇혀 있어 기뻤다. “우리 생애, 처음 겪는 일을 함께하고 있어!”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마침내 체크리스트가 됐다. ‘프랑스 사람처럼 프랑스에서 살아보기’.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지금, 그곳 생활이 무척 그립다. 자가 격리 중 글을 쓰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생한 장면들. 야외 주방 앞 저녁 모닥불 소리, 밥을 차리고 외치는 “À table!(테이블로 와!)”, 종을 치던 친구 아빠의 두툼한 손, 한 살짜리 친구 아이의 손 키스, 아침저녁으로 주고 받는 인사말, 캄캄한 밤에 뜨는 수많은 별, 출국 전날 본 무지개와 보름달. 그렇게 함께 머문 프랑스 가족과 마음을 주고받았고, 그 끝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 에 있는 남편을. 하루의 끝자락에 침대에 누우며 이 질문을 서로에게 건넸다.“우리는 어떻게 이곳에 살게 되었을까?”


파리 근교와 공항이 위험하다며 4시간을 운전해 샤를드골공항까지 태워다 주고, 다시 4시간을 운전해 집으로 돌아간 친구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가 잊히지 않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볼 키스를 대신한 마지막 인사, 못다 한 그날의 인사를 위해 다시 그곳에 돌아갈 마음을 다진다. 서로의 안녕과 모두의 안녕을 빌며, 이동 제한이 없는 자유로운 여행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커플의 소리는 여행과 삶의 경계를 허물며 얻은 영감을 글, 음악, 영상으로 기록하는 허남훈 감독과 김모아 작가 부부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동명의 유튜브 채널에 일상의 단면을 기록한 ‘생활연작’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 lesonducou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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