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더로드 May 14. 2020

에디터의 실패한 여행 - Part 1

자가격리 예행연습

돌이켜보면 그 연말 여행은 지금의 이 시기를 예행연습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자가격리 예행연습

아미아나 리조트 냐짱(Amiana Resort Nha Trang)은 활처럼 굽은 냐짱 해변 북단의 툭 튀어나온 곶에 위치한 덕분에 일출과 일몰의 전망 모두 빼어나다. ⓒ 고현



지난 연말 처가 가족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장인어른 내외와 우리 부부, 처형 부부 이렇게 여섯 식구가 모처럼 떠나는 해외여행. 사실 가족 여행은 도처에 변수가 도사린다. 잠자리와 음식, 취향 등 저마다 원하는 바가 다른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킬 최적의 일정을 짜야 하고, 현장에서 종종 벌어지는 의견 충돌에도 대비해야 한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이라면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도 딱히 문제 될 게 없지만, 부모님을 동반한 가족 여행이라면 운신의 폭이 굉장히 좁아진다. 그리하여 만반의 여행 준비가 반년 전부터 시작됐다. 몇 차례 행선지를 변경한 끝에 근거리 휴양지로 의견을 좁혔고, 베트남 냐짱(Nha Trang)으로 최종 낙점해 숙소와 항공권을 예약했다.



출발 직전 변수가 생겼다. 여행을 떠나기 사흘 전 무렵, 장모님이 감기에 걸리셨고 병원에서 독감 진단을 받았다. 아무래도 가족 여행을 떠나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출발 이틀 전, 여행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서둘러 숙소와 항공권 환불을 진행하려는데, 둘 다 환불이 불가능한 조건으로 예약됐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금액이 선뜻 포기하기엔 좀 무시무시했다. 부모님은 우리라도 다녀오라고 권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망설여졌다. 가족 단체 대화방에서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출국 전날 밤, 부모님을 제외한 넷이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문제는 그런 결정을 하기 직전, 아내가 숙소에 취소 메일을 성급하게 보내버린 것이었다. 부랴부랴 이를 정정하기 위한 메일을 보냈지만, 답신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도 정말 괜찮은 걸까?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냐짱의 다른 숙소를 알아봤다. 때는 연말이었고, 숙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며, 비용도 평소보다 몇 배로 높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이마저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확인했다.



내 항공권의 영문 스펠링 하나가 잘못 기입된 것을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알게 됐을 때는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가는 편은 예약 사이트를 이용해 곧바로 변경했지만, 돌아오는 편은 현지에서 별도로 다시 변경해야 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의 연속.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기내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가이드북을 펼친 후 냐짱의 몇몇 명소와 가볼 만한 곳을 체크했다. 리조트의 액티비티 프로그램도 꼼꼼히 알아보며 대략의 여행 일정을 정리했다. 냐짱 북쪽의 한적한 해안에 자리한 리조트는 기대 이상으로 근사했다. 다행히 리조트 직원은 우리의 정정 메일을 확인한 상태였다. 그렇게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6인 정원의 풀빌라에 들어섰다. 넷이서 사용하기엔 머쓱할 만큼 널찍했고, 숙소 내 수영장에선 야자수가 드리운 해변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장인 장모님께 거듭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그야말로 완벽한 숙소였다.



인파로 붐비는 냐짱의 해변은 연말 여행 중 제대로 가보지 못했다. ⓒ FOTIYKA/SHUTTERSTOCK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또) 등장했다. 비행기에서 몸살 기운을 앓던 아내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었다. 이마에선 미열이 나고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여행 전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한 차례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감기가 옮은 것 같았다. 일단 약국에라도 들를 겸, 냐짱 시내로 향했다. 감기약을 사고, 가볍게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밤사이 아내의 몸 상태가 호전되길 바라며, 물수건을 여러 차례 갈아줬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방이 하나 남기에 아내와 나는 각자의 방에 자가격리하듯 머무르기로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는 (그때부터) 수시로 손을 박박 닦았다.



다음 날. 아내의 상태는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목이 퉁퉁 부어올랐고, 고열로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아무래도 독감인 게 분명했다.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아 알아보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연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리조트 직원의 도움을 받아 주말에도 문을 여는 병원을 하나 찾아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1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시내 외곽의 병원은 비교적 현대식이라 일단 안심이 됐다. 하지만 전문용어가 많은 탓에 의사 소통이 영 매끄럽지 않았다. 아내는 불안한 마음으로 반나절 가까이 현지인 의사와 더듬더듬 소통하며 진찰을 받고 수액을 맞은 뒤 리조트로 돌아왔다.



리조트 내에서는 이미 우리 가족에 관한 소문이 퍼진 듯했다. 컨시어지에서는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아내의 상태를 물어왔다. 처음에는 투숙객을 향한 배려라 여겨 고마웠지만, 슬슬 리조트 내 불순분자를 바라보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가 사방에서 느껴졌다. 만일 지금과 같은 코로나19 시국이었다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추방당했을 것이다.



실상 남은 여행은 격리나 다름없었다. 아내의 몸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게다가 함께 온 형님도 코를 심하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리조트 안 칩거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일과는 단순했다. 수영장 곁에 놓인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책을 읽고, 룸서비스 음식을 주문하고, 간간이 맥주를 홀짝이고, 낮잠을 자고, 서로의 몸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는 것. 리조트 음식에 지쳐갈 때쯤엔 그랩 앱으로 외부 음식도 제법 능숙하게 주문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와 SNS를 한바탕 뒤적이며 더는 볼 게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노트북을 켜고 새해 업무 계획까지 정리했다. 언뜻 디지털 노마드가 된 기분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연말 여행은 지금의 이 시기를 예행연습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당분간 마지막 해외여행으로 기억될, 자가격리의 연속이던 그 다사다난한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가장 완벽한 휴양이기도 했다.



글. 고현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

▶ 론리플래닛 코리아 웹사이트

▶ 론리플래닛 코리아 페이스북  





작가의 이전글 머무름의 매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