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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May 27. 2020

에디터의 실패한 여행 - Part 2

오키나와에서 바다를 소거하면

에디터들이 실패한 여행의 순간을 소환했다.
오키나와에서 외딴 디자인 호텔을 찾아 먼 길을 떠난 이야기.






오키나와에서 바다를 소거하면

해 질 녘, 스파이스 모텔의 리셉션 데스크 겸 카페 건물. © 이기선



여행의 촉매는 웹 서핑 중에 찾은 1장의 사진일 수도, 잡지에 소개된 카페일 수도, 단지 맛있는 빙수를 먹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다. 그해 여름 오키나와로 떠난 건 바로 전 해에 내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소개한 <오키나와 반할지도>라는 책 때문이었다. <카모메 식당>식 감성을 두르고 내공을 겸비한, 당시 국내에 비교적 덜 알려진 스폿들을 소개한 책이었다. 그런 장소들은 이상하게 내 길티 플레저를 자극했다. 나는 책에 나온 스파이스 모텔(Spice Motel)에 묵고 싶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지척에 펼쳐지기는커녕, 창밖에 풀숲이 보일 따름인 내륙의 작은 호텔에.



그리하여 늦여름의 어느 날, 나는 캐리어를 끌고 교외의 거대한 고가도로 아래, 고속도로 변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막 버스에서 내린 참이었다(참고로 당시에 나는 운전을 못 했다. 지금도 그리 능숙한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은, 아무리 여행의 B면을 풀어놓는 지면이라고 해도 생략하겠다. 저가 항공을 타고 나하공항에 내려 후덥지근한 만원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나하 시내의 숨 막힐 것 같은 비즈니스호텔 방에 짐을 푼 것, 다음날 뙤약볕 아래 캐리어를 낑낑 끌며 지방행 버스 타는 곳을 찾아 헤매고, 표지판의 암호 같은 한자를 해독하던 것, 눈치껏 표를 받고 요금을 치르던 것 말이다(후불제였다). 따지고 보면 여행은 그처럼 불쾌하고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건만.





언젠가 나는 내가 여러 문화가 뒤섞인 지역에 이유 없이 매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런 곳은 과거 식민 지배를 받았던 지역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여름, 무작정 스파이스 모텔을 예약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으리라.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한 후 1972년 일본에 반환되기까지 오키나와는 미국의 점령하에 있었다. 나는 정류장에 내린 뒤, 고속도로변 갓길로 진입해 캐리어를 질질 끌며 15분가량 걸었다. 수상쩍은 컨테이너 건물과 조악한 아르데코풍 벽화가 그려진 대궐 같은 모텔을 지나자 송전탑 발치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1970년대 미군 점령기에 지은 단출한 모텔 건물은 아츠 앤드 크래프츠(Arts & Crafts)라는 현지 건축 디자인 사무소에서 산뜻하게 개조했다. 1층엔 차고가 쭉 늘어서 있고, 휑한 2층 복도엔 식물이 쑥쑥 자랐으며, 미군 채널인 AFN 라디오 방송이 늘 흘러나왔다. 구식 열쇠, 콘크리트 바닥, 불편한 매트리스, 마리메꼬 샤워 커튼, 짙은 수목이 보이는 창까지, 내 기준에서는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었다. 리셉션 데스크와 카페를 겸하는 옆 건물에서는 아침마다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오키나와식 도넛과 블랙커피를 먹을 수 있었다. 직원은 다들 젊고 친절하며 쿨했다.



하잘것없는 날들이었다. ‘로즈 가든’이라는 미심쩍은 스테이크하우스를 빼면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인 A&W 야기바루(屋宜原) 지점이 걸어서 10분 넘는 거리였다(편의점은 그 반대 방향으로 도보 15분 거리였고). 햄버거 하나를 먹기 위해 고속도로 변을 걷노라면 멀찍이 종합병원과 에이온(AEON) 쇼핑몰이 보였다. 192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A&W는 1960년대 오키나와에 들어왔고, 현재 일본에서는 오키나와에만 유일하게 지점이 있다. 미국식 주유소를 개조한 A&W 지점에 들어가면, 백열등 아래 시든 채소 같은 아르바이트생, 동네 노인, 숙제를 하는 학생들이 마치 1980년대 연속극에 나오는 엑스트라처럼 보였다.



미나토가와 스테이트사이드 타운의 환영 표지판. 빵집 이페코페(ippe coppe) 마당에 있는 카페에서 내는 용과 빙수. © 이기선



매일 따사로운 햇살 아래를 걸어 버스를 타러 갔다. 금세 땀이 맺히는 더위와 무자비한 햇살 속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스스로 은신 범위를 반경 10킬로미터로 제한했다. 인근 기노완시(宜野湾市)의 디앤디파트먼트 오키나와(D&DEPARTMENT OKINAWA)에서 쇼핑하고, 과거 미군 숙소 단지였던 동네 미나토가와 스테이트사이드 타운(Minatogawa Stateside Town)에 가서 빙수를 먹고 미국식 빈티지 숍을 구경했다. 소나기가 내리면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비가 그치면 또다시 A&W 햄버거를 사러 갔다. 밤에는 1층 로비에서 미국 모텔에 관한 책을 뒤적이거나, 평소 듣던 한국의 라디오 채널을 챙겨 듣거나, 옥상의 일광욕 의자에 앉아 송전탑과 낮은 아파트 건물이 드문드문 보이는 내륙 풍경을 바라봤다. 해변에는 딱 한 번 갔다. 버스편이 복잡해 콜택시를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오키나와에는 두 번 더 갔다. 이듬해 가족과 여행했고, 그리고 그다음 해 겨울에는 취재차였다. 모두 한결 수월한 여행이었으나, 지금도 오키나와 하면 고가도로 아래 정류장에 내가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그 멋도 없고 흔해 빠진, 조금 쓸쓸한 교외 정류장에서.



글. 이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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