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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Sep 14. 2020

어디에도 없는 곳 하동

구름도 쉬어 가는 하동의 평사리 들판 위로 무지개가 떴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지리산과 한려해상이란 두 국립공원을 품은 천혜의 땅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디에도 없는 귀한 풍경을 내주었다.








야생에서 온 기 

스타웨이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악양면 평사리 전경. ‘2022 하동 세계 차(茶) 엑스포’ 개최를 축하하는 문구가 들판에 적혀 있다. ©임학현



매암제차문화박물관에서 즐기는 호젓한 티타임. ©임학현


순천역에 내리자마자 무섭게 비가 내렸다. 비가 잠잠해지니 여름을 집어삼킨 지리산과 평사리 들판의 짙푸른 절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솜털 같은 운무가 섬진강 위로 번지고, 들판에는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뜬다. 저녁에는 한산사 인근의 전망대인 스타웨이에서 강이 붉게 일렁이는 풍광에 탄성을 자아내며 녹차라떼와 녹차젤라또를 맛봤다. “유리창 너머 시시각각 변모하는 자연의 모습이 기가 막혀요. 하늘이 높아지는 9월엔 더 아름답죠.” 스타웨이 담당자가 귀띔한다.

하동은 어디를 가나 차를 내준다. 웬만한 농가는 3~4대에 걸쳐 차를 재배할 정도로 차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차 한잔 건네는 것이 어떤 안부 인사보다 살가운 표현일 만큼 이들에게 차는 일상이자 문화다. 차나무를 군락으로 심어 광범위한 차밭을 형성하는 보성이나 제주와 달리, 하동은 개인 농가에서 조금씩 차나무를 가꾸며 농사를 짓는다. 자연이 주는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기슭에서 자라는 하동의 야생 차밭은 일부러 단장하지 않는다. 인공 비료도 주지 않는다. 그저 자연 그대로 보존할 뿐이다. 

하동은 한국에서 차를 처음 심은 곳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서기 828년) 때 당나라에서 들여온 차 종자를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동 차는 ‘섬진강 안개 먹고 자란 차’라 불린다. 재배 지역이 거의 대부분 다습한 섬진강 지류에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지형 덕에 습한 공기가 오래 머문다. 안개가 많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큰 비탈 지형 덕에 차나무에서 떨어진 씨가 번져 자라날 수 있었다. 

모든 작물은 물을 머금고 있는 땅보다 물 빠짐이 좋은 곳에서 더 맛있게 자란다. 하동은 연 강수량이 1,800mm에 달하면서도 토양은 자갈이 많아 물 빠짐이 좋다. 덕분에 차 고유의 깊은 맛을 간직할 수 있었다. 사방이 야생 차밭인 하동은 사계절 내내 초록빛 기운으로 가득하다. 차밭만 100여 곳이 넘는다. 차 시배지에 오르니 눈앞에 펼쳐지는 초록빛이 마음을 온화하게 달래준다.




평사리 언덕에 자리한 박경리문학관 전경. ©임학현



안에는 <토지> 속 인물 지도, 작가의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임학현







자연이 주는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기슭에서 자라는 하동의 야생 차밭은 일부러 단장하지 않는다. 인공 비료도 주지 않는다. 그저 자연 그대로 보존할 뿐이다.







풍경에 스며든 삶 

매암제차문화박물관 옆 매암제다원은 찻집이자 다원이다. 드넓은 차밭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다. ©임학현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언덕에 호젓하게 들어선 한옥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무려 25년 동안 집필한 끝에 총 20권으로 완간한 <토지>가 잉태한 ‘최참판댁’이다. 드라마 <토지>(2004)를 촬영하기 위해 지은 세트장인데, 옆에 박경리 문학관이 자리한다. 문학관 앞마당에서 악양면의 들판과 그 가운데 나란히 선 부부송(소나무 두 그루)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문학관에 걸린 작가의 문장이 감정을 흔든다. “한 여인이 밭일을 매다 하늘을 보니 노을이 붉다. 아름다운 동시에 슬픔을 느낀다. 이는 언어보다 진실에 가깝다.” 

평사리에서 화개면으로 넘어가면 하동의 풍경을 만끽하며 머물기 좋은 우티가 있다. 화개면 명당으로 손꼽히는 목압마을에 자리한다. 야생 차밭을 가진 하동 출신 남편을 만나면서 관아다원을 운영하게 된 김정옥 대표가 연 숙소다. ‘차 한잔 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김 대표는 숙소 이름을 ‘우티(Would You Like Tea?)’, ‘아티(I Like Tea!)’라 지었다. 차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숙소 앞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산자락에 걸린 구름과 너른 들판을 바라본다. 감정의 파도가 어느덧 잔잔해진다. 오래 머물며 오래 기억하고 싶은 곳이다. 




가므로 와이너리의 정성모 대표가 감나무밭에서 웃고 있다. ©임학현



하동청소년예술단 하울림을 이끄는 단원들. ©임학현



최참판댁에서도 명당자리로 꼽히는 별당의 연못. 소설 <토지>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 머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공간이다. ©임학현


하동은 집집마다 직접 차를 기른다. 4월 초 곡우와 입하 사이에 올라오는 어린잎만 수확해 시들게 한 뒤 비벼서 그늘이나 아랫목에서 발효시킨 차다. 이곳 사람들은 ‘잭살차’라 부른다. “1년 먹을 잭살을 한지에 싸서 매달아놓고 몸이 아프면 잭살 한 줌에 배나 모과 등을 넣고 상비약처럼 팔팔 끓여 먹었어요.” 김 대표의 말이다. 

차 한잔을 주문하자 직접 말린 곶감이며 간식거리를 인심 좋게 내온다. 사실 이곳은 맑고 구수한 차맛으로 근처 쌍계사 스님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난 고수의 찻집이다. 100여 가지의 전통차를 직접 만들어 1년 내내 전통 수제 차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녀와 마주보고 차담을 나눈다. 앞에 놓인 찻잔이 빌세라 차를 따라낸다. 차 한 모금에 온몸이 따듯해지고, 마음은 자연스레 평온해진다. 눈을 보며 마음을 전하고 이야기하는 시간. 
그렇게 차가 삶 속에 스며들었다.






김남주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하동에서 사 온 야생 찻잎을 우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임학현은 사진작가다. 악양면 평사리 들판과 구재봉 활공장에서 두 번이나 무지개를 만나 행복해했다.


ⓘ 취재 협조 하동군청 hadong.go.kr 에어비앤비 airbnb.co.kr


글. 김남주 사진. 임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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