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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n 19. 2015

박찬일 셰프의 필리핀 미식 기행

The Flavor of Philippines

스페인의 하몽과 필리핀의 젓갈을 한자리에 차리는 ‘마드리드 퓨전 마닐라’ 미식 박람회를 위해 떠난 필리핀 여행. 현지인과 부대끼며 먹은 길거리 음식부터 필리핀 대통령과 함께한 만찬까지, 셰프 박찬일이 필리핀 속 맛의 스펙트럼을 모두 경험했다.


 박찬일사진 김남용

최신 요리 트렌드와 기술혁신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교육 포럼이 진행됐다. © 김남용

세계 미식을 공유하다


몇 해 전, 요리하는 후배 강민구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다녀왔다. 음식 박람회 ‘마드리드 퓨전(Madrid Fusion)’ 때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의 발효 음식과 다채로운 식문화를 선보였고, 돌아와서는 흥분하며 내게 말했다.


“대단했어요. 스페인은 아마 다음 시대 세계의 식문화를 장악할 거예요.”


마드리드 퓨전은 이미 국내 요리사에게도 잘 알려진 중요한 음식 박람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양분되던 유럽의 음식 문화에 최근 스페인이 강세를 드러내고 있다. 마드리드 퓨전은 그 힘을 보여주는 대표 행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자국 음식의 틀 안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 스페인은 밖으로 눈을 돌렸다. 앞서 후배 셰프 강민구가 마드리드에 초청된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놀라운 행사가 필리핀 마닐라로 이어졌다. 단순히 주빈국을 초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드리드 퓨전이 ‘통째로’ 나라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은 마드리드 퓨전이 선택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필리핀 방문의 해가 아닌가. 지난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마드리드 퓨전 마닐라’가 SMX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고, 나는 그 자리에서 세계 요리의 흐름과 필리핀 음식 문화를 지켜보았다.

행사는 다채로웠다. 특히 스페인과 필리핀의 저명한 요리사들이 벌이는 콘퍼런스가 흥미로웠다. ‘국제 미식가 총회’라는 타이틀 아래, 주방을 지키던 요리사들이 연단에 섰다. 그들은 스타처럼 팬으로 둘러싸였다. 동시에 열린 음식 박람회에서는 스페인 고유 음식은 물론이고, 필리핀의 음식 문화를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나는 돼지 뒷다리로 만든 하몽을 씹고, 그 옆자리에서 곧바로 말린 망고와 삭힌 필리핀 젓갈로 만든 채소 요리를 먹었다. 스페인과 필리핀은 서로 잘 어울렸다. 지난 식민의 역사는 묻어둔 채, 스페인 셰프와 관계자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필리핀에서 이런 행사를 열 수 있어 자랑스러워하는 듯.

스페인과 필리핀의 최정상 셰프들이 모인 마드리드 퓨전 미식 박람회의 현장. © 김남용


욕망이 들끓는 잭팟의 유혹

나는 해변이 가까운 마닐라 외곽의 노부(Nobu) 호텔에 묵었다. 이미 셰프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 호텔은 시티 오브 드림스(City of Dreams)라는 복합 리조트에 둘러싸여 있다. 마닐라 시 당국은 아마도 외국인이 이곳에서 마음껏 즐기고 돈을 쓰고 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곳에는 노부 호텔을 비롯해 3개의 고급 호텔이 들어서 있다. 누구는 단순히 이곳을 카지노가 있는 도박장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나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와 어뮤즈먼트(amusment)의 정수라 말하고 싶다. 시티 오브 드림스는 곧 잭팟의 꿈인 것이다.


게임장은 3개의 호텔이 공유하는 곳에 펼쳐진다. 사람들은 곳곳의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패를 기다린다. 어떤 이는 레버를 당겨 잭팟을 노린다. 우리가 운명이라는 거대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으리라.


카지노에서 나는 다양한 음식을 구경했다. 패를 돌리면 배가 고파지게 마련이고, 호텔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누군가 출출해지면 카지노를 찾아와야만 한다. 그곳에는 주로 중식과 이탈리아 음식을 팔았다. ‘커밍 순(Coming soon)’이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스테이크 하우스도 있다. 밖에는 거대한 사진이 걸려 있고, 안에는 소 몇 마리를 걸어두고 익히는 숙성실을 그려놓았다.

거대한 별천지이자 꿈의 공장으로 불리는 시티 오브 드림스와 노부 호텔. © 김남용

지갑 걱정이 없는 외국인이 이 도시에 들른다면 노부 호텔에 기꺼이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 호텔의 편의 시설은 완벽하고, 침대는 편안하다. 호텔에 막 들어서는 순간 접대받고 있다는 느낌이 피부로 느껴진다(비록 폭발물 탐지견을 데리고 있는 경비소를 지나야 하지만). 카운터에서는 나른하고 사무적인 직원을 찾아볼 수 없다.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을 만날 때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친절했다. 친근하고도 세련된 서비스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 호텔에서 충분히 느꼈다.


조식 서비스는 상당한 비용이 나오므로 먹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준비할 것. 물론 가격에 걸맞는 음식과 서비스가 따른다. 모든 음식은 요리 명장 노부 마츠히사의 스타일로 재편되어 있다. 크루아상과 마들렌 케이크도 노부식으로 맛을 낸다. 유자와 오차, 와사비 같은 것들의 터치다. 다행스럽게 커피는 완벽한 유러피언 스타일이어서, 혀의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식사하는 손님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직원이 서빙을 하는데, 나는 그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무엇인가 필요할 때 직원들은 램프의 요정처럼 나타나서 밝은 얼굴을 내밀었다.


시티 오브 드림스. 호텔 밖으로 나서면 이 거대한 문구가 걸려 있는 리조트의 외관이 보인다. 택시 기사는 나에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로버트 드 니로의 이름을 말했다. 이 정도 인물들이 광고하는 리조트라는 뜻이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얼굴을 걸고 투자도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아슬아슬한 바카라 테이블이나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기는 순간, 그들의 주머니에도 돈이 들어갈 수 있는 뜻. 이것 또한 진정한 세계화로 볼 수도 있겠다.

필리핀 음식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볶음밥. © 김남용



마닐라의 빛과 그림자

시내에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탄다면 악명 높은 마닐라의 운전사를 만나야 한다. 택시 기사는 11킬로미터 거리를 가는데 400페소를 불렀다. 그는 내 항의에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도 자식을 벌어 먹여야 할 것이며, 릭샤(rickshaw, 인력거)도 지프니(jeepney)도 아닌 택시를 몰기까지 고생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거액을 내고 그 면허를 얻었을 수도 있다. 마닐라의 운전사보다 더 악명 높은 한국의 운전사를 생각하며 나는 기꺼이 비용을 냈다. 인터넷에서조차 마닐라 택시 요금에 대해서는 체념조의 글이 많은데, 달라는 대로 주는 게 낫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감동받았던 마닐라 시민의 친절은 꿈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현실이다.


마닐라의 주요 외식 시장은 두 가지로 나뉜다.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 그리고 패스트푸드 가게다. KFC와 맥도날드는 물론 졸리비(Jollibee) 같은 자국 브랜드도 인기가 좋다. 좀 더 전통적인 음식을 파는 식당도 많다. 구운 닭과 몇 가지 필리핀식 소스에 밥을 곁들이는 차림도 있으며, 전통 음식과 현대 음식을 같이 파는 뷔페도 있다. 이곳은 요리 솜씨가 아주 훌륭했고 맛있었다.

필리핀은 한국처럼 외국 음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대하다. 뷔페에서 개별 메뉴로 주문한 일본식 튀김과 초밥은 어지간한 한국의 회전 초밥집이나 뷔페보다 낫고, 소바도 조금 달았다는 것 말고는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좋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도 우리처럼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있는 셈이다. 시내의 차이나타운에 가면 일제 항거 기념비가 있다. 태평양 전쟁 때, 필리핀은 일본에 점령당해 엄청난 수탈과 인명 피해를 입었고 그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옥쇄 작전을 펴는 일본의 악랄한 전선의 배후에는 필리핀인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이 겪은 피해는 한국에 비해 단기간이었지만, 한국 못지않게 처참했다.


수산물 야시장은 마닐라의 외식 문화를 볼 수 있는 삶의 현장이다. © 김남용
현지 필리핀식 뷔페에서 맛보는 다양한 꼬치. © 김남용
담파에서 맛본 로브스타는 신선한 식감이 살아 있다. © 김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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