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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연 Oct 16. 2019

남은 사람의 몫

무너지는 마음에 대하여

S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나는 불문과 대학원에 갈 거야. 나는 졸업을 하기 전에 꼭 등단을 할 거야. 우리가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서른 전에 자리를 잡게 되면 좋겠다. 서른은 너무 어른이지 않아? 앞으로 8년이나 남았네. 이런 대화는 스무 살 때부터 스물네 살까지 이어졌다.


S는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로, 나와는 다른 점이 같은 점보다 많았지만, 모난 구석만은 유난히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견고하고 끈끈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남들이 모두 그러려니 넘어가는 일에도, 바르르 화를 내는 부류였고,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두고두고 아파하는 부류였다. 그러니 나는 나의 미래에 S가 있을 거라 당연하게 여겼다. 의심은 많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S는 우리가 그린 미래에 살기 위해 2학년이 끝나자 프랑스로 떠났다. 나는 휴학을 하고 글을 썼다. 얼마 뒤 S는 리옹에서 사투리를 배웠다며 파리로 옮겨갔고, 패기롭게 휴학을 한 나는 난데없이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가정사, 인간관계, 뭐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그 무렵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문 밖에 나가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 하나만 선명하다. 언젠가 겨울 패딩을 입고 영화관에 갔는데 모두가 얇은 가디건을 입고 있어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벚꽃이 피어있었다. 분명 겨울이었는데, 언제 봄이 온 거람. 나도 몰래 봄이 와버렸다는 사실이 슬퍼서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에는 잠을 많이 잤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바닥이 무너졌다. 침대가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닥이 액체로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외로워.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읊조렸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혼자 살았으니까. 혼자 사는 주제에 소리 내서 울지도 못했다. 소리를 내는 일에도 눈치가 보였다. 무엇보다 우는 일에는 힘이 필요했다. 나에겐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다.


너무 우울해. 파리에서 걸려온 S의 전화를 받으면 나는 자주 우울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S는 수영을 배워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마침 내 자취방 앞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얼마 뒤부터 나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영을 시작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S야, 수영을 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져. S는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S는 거의 매일 내게 전화를 했다. 프랑스와 한국의 시차는 7시간이었지만, 나의 밤 낮이 바뀐 까닭에 시차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S는 유럽의 대중교통에 대해서, 물가에 대해서, 프랑스의 인종차별에 대해서, 그러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졌지만, S와 전화를 하는 동안에는 어쩌면 그런 미래가 올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잠시나마 들뜰 수 있었다.


한 한 달 정도 내 기분을 괜찮게 만들어주었던 수영도, 생리를 기점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다시 우울감에 잡아 먹히기 시작했다. 언젠가 오후 8시쯤 잠에 들었다 눈을 뜨니 3시 무렵이었던 밤, 컴컴한 방에 누워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다 생각했다. 죽을까? 그리고 모든 시야가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지던 시점에 다짐했다. 죽자고. 그렇지만 차마 불을 켜지 못했다. 불을 켜면 세상의 모두가 나를 알아볼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죽는 것보다 불을 켜는 게 더 무서웠다. 바닥을 더듬어 스카프 찾았다. 목에 걸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S였다.

S는 여행 중이었다. 여행 중이라 며칠간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이제 막 파리에 돌아왔다고. 나는 S에게 죽으려고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카프를 목에서 풀고 전화를 받았다. S는 자신에게 닥쳤던 오늘치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가만가만 들어주었다. S는 괜찮아질 거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 부류였다. 오히려 자신의 불행을 내밀하게 보여주면서, 어쩌면 네가 더 괜찮을지 모른다는 식의 위로를 자주 해왔다. 그날도 그런 식이었다. 다만 전화를 끊기 직전 그녀는 말했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다음 학기에 돌아가니까 한국에서 보자.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그 계절이 끝날 때까지 속으로 계속해서 읊조리면서 견뎌냈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복학을 하고는 조금씩 괜찮아졌다. 아직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무서웠지만, S가 돌아와서 괜찮았다. S는 약속대로 한국에 돌아왔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S에게 죽으려고 했다는 말을 하니,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욕을 했다. 그 날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술자리가 끝날 무렵 S는 조금 울었다. 죽지 말고 오래 보자. 나는 대학원까지 갈 거야. S는 말했다. 나는... 나는 이제 글 같은 거 안 쓸 거야. 그냥 방송국에 들어갈 거야. S는 내 선택을 응원한다고 했다. 뭐가 됐든 오래 보자고. 가까이 살면서 오래 어른이 될 때까지 보자는 말을 했었다. 스물세 살, 늦가을이었다.


그 날 다짐한 대로 미래의 나는 정말로 방송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중파 3사 중 하나인 그곳에. 경력도 연줄도 없는데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방송국에 들어간 뒤로는 숨 쉴 틈 없이 바빠졌다. 그 와중에 연애도 시작했다. S가 연결해 준 남자였다.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딱 이 무렵이었다. 스물네 살 가을, 한쪽에는 남자 친구와 팔짱을, 한쪽에는 S와 팔짱을 끼면서 도림천을 걸었다.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해. 영원히 오늘이 계속됐으면 좋겠어. 왜 좋은 시절은 지나가는 게 눈에 보일까. 나는 이 순간이 너무 그리워질 것 같아. S는 웃었다.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 나도. 나도 오늘이 너무 그리울 것 같아. 날이 너무 좋고 예뻐서 행복해.


정말이지 모든 것이 충만한 가을밤이었다. 지금도 S를 생각하면 그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겨울이 되고 S와 남자 친구 셋이 어울리는 시간보다 남자 친구와 단 둘이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S는 떡볶이를 먹자고, 커피를 마시자고, 할 말이 있다고 내게 연락을 해왔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남자 친구마저도 겨우 보는 날이 이어졌다. 기획은 계속해서 엎어졌고, 처음 보는 선배는 지금이라도 도망치라는 말을 해댔다. 때문에 S가 우울하다고 카톡을 했을 때도, 나는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세세히 들을 여유가 없었다.


수영을 배워보는 게 어때? 나는 자주 우울하다고 하는 S에게 제안했다. 얼마 뒤부터 S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던 S는 수영에 쉽게 재미를 붙였다. 오늘은 50m나 수영을 했다며, 웃으면서 전화를 걸어오는 일도 있었다. 다행이다, 내년에 같이 워터파크 가자. 나 지금 일 하는 중이라 카톡 할게. 대개 이런 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그러다 연말이 되고, 남자 친구와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S의 연락에 답을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다 생일 직전, S와 남자 친구와 나 셋이서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S는 우울하다는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밝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혼자 와인을 조금 마셨다고,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사랑이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1월에 보자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전화를 끊고는 조금 안심했다. 다행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 그리고 새해가 되었다. 12월 31일에는 구태여 S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1월에도 볼 수 있으니까.


그 날 연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2013년 12월 31일을 영원히 살고 있는지 모른다.

1월 1일은 정신이 없었다. S의 발인은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는 조금도 울지 않았다. 모든 일이 거짓말이 아닌가, 리셋 버튼을 누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득했다. 발인을 보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떡볶이를 사 먹으러 나갔다. S와 자주 먹던 떡볶이였다. 다음날에는 출근을 했다. 어제 쉬는 날에 뭐 했어? PD님이 물었다. 친구가 죽었어요. 그런 말을 하고 밥을 계속해서 먹었다. PD님은 물었다. 어린데 왜? 나는 대답했다. 그러게요. 얼마 뒤 나는 이사를 했다. 살던 집에서는 도저히 살 자신이 없었다. 짐을 정리하면서 S의 엽서를 발견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물 먹은 엽서를 보낸다.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오래 보자.


얼마 뒤, 나는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갔다.


12월 31일에 연락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S가 만나자고 말을 했을 때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카톡을 그런 식으로 끊지 않았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내 생일에 왜 축하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더라면, 볼 수 있을 때 봤더라면.


후회는 끝이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는 것도 일이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술만 마시면 사람과 싸웠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아무 말을 해댔다. 웃다가도 뜬금없이 화를 냈고, 욕을 했다. 이따금 경우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 분위기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밤에는 방에 돌아와 내 뺨을 스스로 때렸다. 그러다 한국을 떠났다.

스물여섯, S와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등단을 했거나 방송국을 다녀야 했다. 하지만 스물여섯의 나는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면서 S를 생각했다. S는 죽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와 닿지 않는 문장이었다. 죽었다. 죽음. 죽는다는 것. 그러다 산을 반쯤 올랐을 때 생각했다. 이 산만 오르고 죽어야지. 죽어야겠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네팔은 거의 매일 여진이 일어났다. 무너진 도시 한 복판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다고. 지진 때문에 무너진 카트만두는 여진 때문에 조금 더 무너졌다. 이러나저러나 내 눈에는 무너짐 그 자체였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은 것처럼.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계획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계획을 해도 계획한 대로 살 수 없으니, 굳이 마음 써서 계획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논점이었다.


일 년을 착실하게 떠돌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었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수술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는 울고 있었다. 아파요. 무통주사 좀... 나는 아프다고 엉엉 울었다. 엄마는 따라 울었다. 2014년으로부터 3년이 지나 겨우 울 수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 깨달았다. 수술 후 겨우 걸을 수 있게 된 가을이었다. 죽으려고 용을 써도 찌질한 나는 죽을 수조차 없다는 것. 그리고 죽지 못한다면 남은 사람의 몫을 어떤 형태로든 살아 내야 한다는 것. 그런 건설적인 생각이 문득 들었다. 퇴원을 하고 나니 S의 기일이 코 앞이었다.


그렇게 서른, S와 계획한 적 없는 미래에 살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대리님이라고 부른다. 직장을 가졌고, 등단은 못했고, 방송국은 그만뒀다. 그 날 이후 한 뼘도 자라지 못했는데,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다. 무섭게.


아직도 나는 그 시절로부터 어느새 5년이나 지났다는 사실과, 곧 6년째에 접어든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면 아득해진다. 나아가 이제는 S와 함께한 시간보다 S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더 길다는 걸 마주할 때면, 나는 너무 오래 살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제 S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실루엣과, 서른 살 이전의 미래를 그리면서, 서른은 너무 어른이지 않아? 하고 묻던 어떤 밤들, 오아시스의 노래를 나눠 듣던 낮과 내게 전화를 걸어주었던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지금 행복하다는 그녀의 어떤 순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일은 영영 괜찮아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까닭에 뭐? 2014년? 옛날 일이잖아?라고 무신경하게 내뱉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담하다. 참담해져서 견딜 수가 없다. 매일 2013년 12월 31일을 후회하고, 2014년 1월 1일의 슬픔을 기억하는 일은 S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참회처럼 여겨진다.


며칠 전, 유명 아이돌의 비보를 접하고선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다시 바닥이 무너지고 있었다. 동시에 카톡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괜찮아? 뭐해? 퇴근은? 각기 다른 친구들의 연락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너무 안타깝다. 슬프네. 그런 카톡을 남기고 도망치듯 퇴근을 했다. 바람이 쌀쌀했다. 순간 조금 아득해졌다. 숨이 가빠왔다. 최근에는 공황장애 약을 챙기지 않았는데, 하필 이럴 때 이러나.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마셨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나, 둘, 셋.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아 다시 지하철 역으로 걸어 내려갔다.


누군가의 죽음은 늘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 서른이 되어도 그렇다. 슬프다. 슬퍼서 죽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나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S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일도 출근을 할 것이고 서른한 살에도 살아있을 예정이다. 무너진 바닥에서 그러나 끝내 일어나는 일, 그건 남은 사람의 몫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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