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하는 마음에 대하여
무당은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것인데 굳이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무당집에 더 이상 들락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꼭 한 달만의 일이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신년도 곧이라 겸사겸사 찾아왔다’고 답했다. 무당은 피식, 웃었다. “이미 굿판에서 봐줄 건 다 봐줬는데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나는 괜히 손톱을 뜯으면서 애먼 신당만 둘러보았다.
그 무당을 처음 만난 건 며칠 전, 친구가 벌인 굿판에서였다.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친구였는데, 굿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하면서도 나라도 똑같이 했을 거라는 복잡미묘한 심정에 따라간게 화근이었다.
정말 귀신이라는 게 있을까. 그렇다면 S 너도 여전히 여전히 세상 어딘갈 떠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굿을 지켜보던 중, 무당은 멀찍이 앉은 내게 소리쳤다. “얘, 거기 너! 너는... 무당집 좀 이제 그만 다녀!”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가지 말라고 하면 더 가고 싶은 게 사람인지라,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기어이 그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내내 탐탁잖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직과 이사, 건강, 그리고 혹시 모르는 연애와 결혼과 같은 카테고리에서 몇 개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차근차근 캐물으려던 찰나 무당은 혹시 계사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동시에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런데 누구야? 네 옆에 애 없이 이른 나이에 죽은 그 귀신은?
무당의 시선이 허공에 닿았다 다시 내 눈으로 향했다. 글쎄요. 나는 모르는 체 고개를 저었다. 무당은 흐릿하게 S를 묘사했다. S가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 너 아직 걜 못 잊은 거지?
무당은 물었다. 나는 '어떤 날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날도 있었고, 어떤 날엔 S와 온종일 함께 있을 때도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S를 가장 자주 생각하는 곳은 출퇴근 길, 4호선 환승통로였다. 길고 긴 통로를 사람들을 따라 걸을 때면 나는 겨우 이런 직장인, 이런 어른이 되기 위해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그럴 때면 이십 대 초반, S와 그렸던 삼십 대의 우리를 떠올렸고, 그러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져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에 영원한 약속도, 영원한 사람도, 영원한 마음도 없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찰나일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아내야 할까.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기도 전에 4호선 환승통로는 끝이 났고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출근을 해 자리에 앉곤 했었다.
- 걔가 네 옆에 딱 붙어서 다 망치고 있어.
무당은 단호하게 말했다. 말인즉슨, 귀신은 질투가 많아서 내가 연애를 할 때마다 어깃장을 놔 헤어지게 만들고, 공황장애나 우울증 같은 걸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내게 무당은 퇴마 굿을 제안했다. 그게 싫다면 S를 완전히 잊어버리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걜 잊지 못했으니, 역시 퇴마 굿이 좋을 것 같다고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죽은 네 친구가 이대로 내 곁에 딱 붙어있다면, 다가올 2021년은 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최악의 한 해가 될 거야. 누굴 만나도 오래가질 못하고, 결혼을 한다면 영혼결혼식을 할 수도 있겠지. 우울증과 공황이 더 심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원하는 꿈에 가닿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일단 살아는 보겠지만, 남의 집 귀신이라도 퇴마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S가 내 인생을 망친다고? 나는 피식 웃었다. S는 그럴만한 위인이 되질 못했다. 게다가 우울증은 S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죽기 전부터 심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친구가 내 곁에 있다고 했을 때, 그녀가 내 인생을 모조리 망친다고 했을 때, 되려 나는 무섭다기 보단 안심이 되었으니까. 네가 여기 있었구나. 네가, 아직, 여길. 다행이다. 다행이야.
나는 S를 잊을 생각도, 퇴마를 할 생각도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무당은 '조금 더 살아보면 답을 알겠지.'라고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찜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S가 나쁜 귀신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일. 그것 하나.
2021년의 내가 무당의 말대로 엉망으로 살게 된다면 나는, 정말이지 S를 원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S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지난 실패를 S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S의 핑계를 대며 열심히 도망쳐온 내가, 이제 와서 모든 실패를 S의 탓으로 돌리는 건 너무 염치없는 일이 아닌가. 만약 S가 우리의 약속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는 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 정말이지 분명한 일인데.
그러니 S가 무당의 말대로 '나쁜 자살 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2021년의 나는 엄청나게 괜찮은 한 해를 보내야만 한다는 건설적인 마음이 들었다. 지금처럼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전투적으로 움직이고 멍청한 나를 지켜내야 할 것만 같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조금 두려웠지만 이상하게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S, 네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그리고 무당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만 하니까. 2021년엔 정말이지 열심히 살아낼 거라고. 그런 다짐하면서 무당집을 총총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