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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연 Oct 31. 2019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위로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하여

10월 31일에 만나는 게 어때, 10월 31일은 Y의 기일이었다. L도 부르자. 나는 제안했다. 술상 옆에는 Y를 위한 자그마한 제사상을 차리기로 했다. Y가 좋아하던 햄버거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올리자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에는 슬퍼했다. 우리는 겨우 서른인데, 제사상을 받기에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하고.


Y가 세상을 떠난 지도 3년이 지났다. 어느새 3년이나 지난 것이다. L은 부산에 차려진 Y의 빈소까지 가는 동안 내내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울면서도 Y의 영정을 카메라에 담았고, 빈소에서 손님을 받았고, 발인까지 지켜보았다. L은 위로에 능한 사람이었다. Y의 가족을 챙겼고, 분위기를 크게 헤치지 않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나는 L의 주변을 고장 난 로봇처럼 멤돌았다. 나는 위로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입 밖에 나오는 말들은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뒤섞이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Y의 영정 앞에서는 울지도 못했다. 그 무렵에는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멀리 떠났다 돌아왔는데, 내가 마주 하는 것이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라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왜 소중한 사람들은 자꾸 죽어버릴까. 왜 나는 그들의 마지막 연락을 받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Y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그에게 오래간만에 전화가 왔었다. 카톡이 아닌 전화라니, 평소였다면 받았겠지만, 그 날만은 받지 못했다. 나는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고, 옆에 엄마가 있다고, 그런 핑계를 댔던 것 같다. Y는 카톡으로 최근 자신이 골몰하고 있는 일에 대해 토로했다. 평소였다면 조금 더 세심하게 들어주었을 텐데, 그 날은 그러지 못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은 Y와 그 날 나눈 카톡을 읽고 또 읽었다. 죽은 친구들을 떠올리니 덩달아 죽고 싶어졌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죽고 싶다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서든 괜찮아지기 위해 치료를 받았고, 치료를 받는 동안 몸은 하루가 다르게 쾌차했지만 마음은 내내 지옥이었다.

정신을 겨우 차린 건 Y의 49재 무렵이었다. 수술을 막 끝난 뒤라 웃기만 해도 수술 부위가 저릿해, 소리도 쉽게 내지 못하던 때였다. 엄마는 49재 때 친구들이 명복을 잘 빌어주어야 Y가 좋은 곳에 갈 거라고 했다. 좋은 곳은 대체 어디냐고, 반문했다. 불교신자인 엄마는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극락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곳이라면 내가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거기까진 말하지 못했다.
 
 Y의 49재에서 L과 나는 나란히 서서 명복을 빌었다. 스님이 불경을 외는 동안 사람들은 쉼 없이 절을 했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아팠다. 아픈 게 몸인지 마음인지 알 수없었다. 나는 49재에서도 울지 못했다. 수술 부위가 아파서 절도 할 수 없었다. 우두커니 방석에 앉아 생각했다. 너는 절을 받기에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하고. L은 또 울었다. 법당이 너무 추웠던 까닭에 L의 얼굴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갓 나온 찐빵처럼 보여서 조금 웃었다.


49재가 끝나고는 바다를 보러 갔다. 크리스마스가 곧이 었다. Y의 엄마는 우리에게 '너희는 왜 예쁘장하게 생겨서 연애도 못하냐고, 인생을 즐기라고, 크리스마스 때 별 일 없으면 너희끼리 놀라'고 했다. 우리는 ‘그래, 우리는 남자랑 돈은 없지만, 이제 커다란 자취방도 있고, 시간도 있는 백수 어른이라고. 우리끼리 놀자.’고 약속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족발을 시켜서 먹자고, 족발보다는 불족발이 더 맛있다는 이야기도 나눴던 것 같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는 웃으면서 셀카도 찍었다. 크리스마스 날에 꼭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고.


하지만 크리스마스에는 만나지 못했다. 꼭 만나자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밤새 술도 마시자고, 크리스마스 전까지만 해도 카톡을 나눴지만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귀신같이 누구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까닭에 이상하지도 않았다.


너무 슬퍼서 사람을 만날 힘이 없었다.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Y가 떠오를 테고, 그러면 너무 울어서 얼굴에 김이나던 어떤 날까지 닿을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를 위로할 자신이 없었다. 말을 잘못 건넸다가 지금보다 더 무너질까 봐 무서웠다. 농담을 하기에는 너무 슬프고, 진지하게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울면 다들 울 것만 같아서 집에서 혼자 울었다. 나는 위로에 재능이 없으니까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해 크리스마스는 온종일 누워서 보냈다. 침대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문을 여는 일이 무서워졌다. 문을 열면 내가 병신인 걸 온 세상 사람이 알아차릴 것 같았다. 사라지고 싶었다. 전화를 받았어야지, 조금 더 다정했었어야지, 누군가 나를 계속해서 질책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S의 기일도 곧이었다. 죽은 친구들이 생각나서 계속 죽고 싶었다.


무너졌다 다시 쌓아 올렸는데 다시 또 세계가 무너졌다고. 그렇게 울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추워지는 계절마다 나는 괜찮을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괜찮아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나는 무서울 만큼 빨리 괜찮아지고 있었다. 다만 이 슬픔에는 규칙성이 없어서, 오늘은 괜찮다가 내일은 괜찮지 않게 불쑥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 시간이 지나면서 매일 슬프던 것이 가끔 슬프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Y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Y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질 때면, 나는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곤 했다. Y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Y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 해 크리스마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슬픔은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종류의 슬픔은 온전히 혼자서 안고 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슬픔만큼 누군가의 슬픔도 크고 무거운데 어떻게 남에게 그걸 나눠줄 수 있겠느냐고.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사람에게 슬픔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이런 종류의 슬픔은 그냥 견디고 견디고 견뎌야만 한다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위로할 수 있는 날이 올 지 모른다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바닥에 거의 파묻혀 있다시피 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스스로를 겨우 쓰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무너진 바닥에서 그러나 일어나는 일, 그건 남은 사람의 몫인지 모른다, 라는 문장을 쓰고 조금 울었다. 울고 난 다음 날에는 씩씩하게 출근을 했고. 11시까지 야근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콘텐츠를 뱉어냈다. 그리고 호되게 감기에 걸렸다.


마음이 무너지기 전에는 몸이 먼저 무너진다.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죽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이 계절에는 L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년 이렇게 반복하는 동안 몇 년이나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아픔에는 아주 조금씩 익숙해진다. 아주 아주 조금씩. 나는 익숙은 해지되 잊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Y의 기일, 그러니까 10월 31일에 우리는 만날 것이다. 그 해 크리스마스 때는 만나지 못했지만, 31일에는 만나서 Y의 상을 차릴 것이다. Y에 대해 이야기하다, 서른 살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 최근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다, 다시 Y에 대해 이야기하다, 조금 슬퍼할 예정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위로에는 재능이 없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썼다 지웠다 하면서 겨우, 아주 겨우 실낱같은 위로를 건넬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 슬픔을 함께 걸어오면서, 이게 나의 최선이라는 걸 그녀들도 알기 때문에 괜찮다.


그리고 앞으로도 매일 슬퍼하진 못해도, 가끔 슬퍼할 것이다. 내가 가끔 슬퍼졌기 때문에, 매일 슬픈 누군가의 오늘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러니 10월 31일, 슬픔을 이야기한다고 슬픔이 반이 되진 않겠지만, 아픈 마음을 서로 기대면서 이 축축하고 푹푹 꺼지는 길을 무탈히 지나갈 예정이라고. 그리고 다가올 서른한 살에도 그럴 계획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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