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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연 Sep 15. 2019

장기 여행, 그 후의 인생은?

견디는 마음에 대하여

인생은 늘 예측 가능한 일과 예측 불가능한 일로 짝을 이룬다. 그 안에서 내가 선택한 일탈은 사실 생의 계획 하에 이루어진 예측 가능한 사건일 뿐이다. 삶에는 나조차 상상하지 못한 특별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깨달은 건 장기여행을 다녀오고, 직장인 3년 차가 되어서다.  


여행을 떠났던 스물여섯, 그때는 지금과 확실히 달랐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행복 같은 걸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었다. 그때는 그랬다. 소중한 친구의 죽음도 믿을 수 없었다. 방송국 막내 생활은 끔찍했다. 친구들에겐 나보다 더 소중한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주 멀리 도망친다면 이 지루한 인생이 깜짝 놀라진 않을까. 인생조차 잊고 있던 행복을 내가 먼저 발견하진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짐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배낭 안에는, 어쩌면 여기에 없는 특별한 '무엇'이 거기에는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은근슬쩍 집어넣었다.

한 1년을 착실하게 떠돌았다.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동네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도 했고, 돈이 떨어져서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교환학생을 갔던 나라에 다시 돌아가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귀국 무렵에는 어학원도 잠깐 다니기도 했었지.


하지만 멀리 가도 서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죽은 친구는 계속해서 떠올랐고, 나는 어딜 가나 후회했다. 숨을 쉬는 동안은 내내 외로웠고, 누군가의 첫 번째 사람도 결코 될 수 없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보다 더 친한 친구를 가지고 있었고, 나에게 특별한 날이면 나는 번번이 혼자 있기 일쑤였다.  

내가 여행에서 깨우친 것 하나
멀리 가도 별 수 없다는 사실


그 여행에서 내가 깨우친 건 대단치 않다. 몇몇은 "장기여행 후 자아를 찾았어요." 혹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어요." 말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장기여행에서 깨우친 건 '멀리 가고 싶다는 말은 사실 거대한 익명성 속에 파묻혀 투명해지고 싶은 욕망'일뿐이었다고. 나아가 나는 결코 내 삶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없는 시시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걸 확실하게 알아차리는 계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무렵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는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스물일곱 가을이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오니 세상의 이치를 조금 빨리 깨우친 친구들은 회사원이 되었고, 조금 늦게 깨우쳤지만 독자적인 길을 걷던 친구들은 시인과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도 되지 않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무엇도 되지 않기에는 걸음걸음마다 무너지는 길을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장기여행 후 깨우친 사실, 둘
시시한 어른은 결코 시시하지 않다

나는 의외로 인생에 기대가 많은 부류였다. 겨우 '시시한 어른-직장인'은 내 인생 선택지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기여행 후 별 수 없던 나는 직장인의 길을 선택했다. 언젠가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겨우 시시한 어른이 되어버렸다"라고 볼멘소리를 했을 때 친구들은 시시한 어른이 되는 일도 어렵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매일 아침 9호선 급행열차에 몸을 밀어 넣고, 여섯 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평일과, 평일을 견뎌내기 위해 마음을 채우는 주말. 삶은 다시 평일과 주말이라는 짝을 이루어 몇 번의 겨울과 봄, 여름, 가을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3년을 견뎌보니, 시시한 어른이 결코 시시하지 않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내 몫의 삶을 견디는 용기를 배우다


그러니 지금은 장기여행 이후, 한국에 갓 돌아왔을 때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산다. 서른이 된 지금은 삶을 너무 쉽게 재단하지 않기로 한다. 엄청나게 기대했던 장기여행에 실망했던 순간을 기억하면서 너무 쉽게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시시한 어른이 결코 시시하지 않다는 걸 배운 뒤엔 삶에 너무 쉽게 실망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겪을 모든 것들은 예상 밖의 지점에 있으므로.


그러니 장기여행이 내 인생을 크게 바꾸진 않았지만, 아주  무쓸모한 시간이라곤 할 수 없겠다. 내 몫의 삶을 견디는 힘을 선사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런 까닭에 내일도 온 힘을 다해 내 몫의 하루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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