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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롱 Feb 14. 2022

죽을 때까지 영영 어린애,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주변의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하게 되기도 한다. 부러 그런다기보다는, 이제  주변에 아픈 어르신들이 많아지는 그런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  같다. 얼마 전에도 엄마와 그렇게 오래 아픈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엄마가  사람 이야기가 엄마 미래 이야기 같아 듣기 괴롭다며  말을 멈추게 했다.

  순간 이토록 무신경한 내가 미안해졌고, 그리고 그런 엄마를 이해할  있을  같았다.  역시 누군가의 고통이 내게 너무 깊이 와닿으면 오히려 피하고 싶어 지니까. 지금 엄마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너무 가까이 맡아지는 것일까.


  그러고는  며칠  남궁인 작가의 칼럼을 읽게 되었다.   



  "저를 만날 선생님이 누구실까요. 저는 선생님을 모르지만 선생님도 저를 모를 것입니다. 저는 심각한 육체, 정신,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늙은이입니다. 온통 절망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헤쳐나갈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어떤 치료도 거부합니다. 외람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발 저를 조용히 하나님 곁에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이미 망가진 몸이지만,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치 있는 몸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마음을 다잡고 작성했을 편지는 환자의 이름과 작성한 날짜로 끝났다. 그 날짜는 이미 5년도 넘겨 있었다.  
  죽고자 했던 사람이 죽고자 하는 의지를 남기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나는 알 수 없었고, 그를 포함한 누구도 그의 인생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가 오래전부터 너무 커다란 고통으로 이미 생을 포기한 상태였음은 분명했다. 하필 오늘 그를 마주한 것은 나였지만 이전에도 그는 많은 의사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만난 의사는 모두 한 번의 주저 없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직 숨이 붙은 채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_ 남궁인, '환자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중에서




  칼럼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고령의 여인을 응급 처치하여 살려낸 내용이었다. 간신히 죽음을 쫓아내고 보호자의 연락처를 찾기 위해 환자의 옷가지를 뒤적이다가 나온 것은 삶을 멈추고 싶으니 살리지 말아달라는, 시신은 대학병원에 기증하겠다는 쪽지였다. 쪽지의 말미엔 5년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고 하니,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온 세월이 5년은 넘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그런 여인을 살린 것이다. 그는 의사로서 자신의 할 일을 한 것일 테지만, 그 환자는 눈을 뜨면 또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더 염려스러웠다. 이제 겨우 자신의 바람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는 다시 쉬이 끝나지 않을 고통 속으로 되돌아오고 오고야 만 것이었다.


  엊그제 엄마는 내게 "너는 아이도 안 낳아서 그냥 죽을 때까지 애야."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새해 덕담인가.)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는 고통을 모르니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을 모르는 것이고, 그걸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는 말씀.

  "아니, 엄마는 내가 그런 큰 고통을 겪기를 바라?"

  새해에도 여전히 눈치 없는 나는 조금은 희희덕거리며 반문했고, 엄마는 "그건 아니지만,"으로 시작해서 " 영원히 애야" 마무리되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 애를 하나 낳으라고. 영원히 아이로 남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으라는 기묘한 엄마의 논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제 나를 보면서 누구도 아이를 낳으라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런 데자뷔는 뭐지?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라 신선하다고 해야 할지. 엄마가 진짜 하고픈 말은 그거였는데, 그동안 철없다는 타박의 속뜻을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엔 아이 없이 즈이들끼리 재밌게 살아서 좋다 싶다가도,  번씩 아이 하나만 낳지, 싶어진다는 엄마 마음을 나는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나는 애니까.


  엄마, 나는 나 같은 애 낳기 싫어. 내가 낳아달라고도 안 했는데 엄마가 나를 낳은 거잖아. 아, 물론 엄마가 나 이만큼 잘 키워줘서 고맙지만. 또다시 이 힘든 세상을 나처럼 살아가게 하고 싶지가 않아... 어쩌구저쩌구 어쩌구저쩌구...

  그러자 엄마는 "왜!!! 너 같은 애가 어때서? 그리고 너 같은 애가 아니라 김서방 같은 애가 나올 수도 있지!" 하고 대꾸했다.

  엄마는 김서방을 몰라. 김서방도  같은 애야,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자식이 자식을 낳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니.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아주아주 가끔은 낯설도록 신기하다. 엄마는 삶을 그렇게 고통스러워했으면서도, 그래도 삶이란 여전히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내가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은 그 아이가 세상에 오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을 선택한 적 없는 인간에게, 죽음만큼은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신이 들으면 화를 많이 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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