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뛰어 넘는 진보성
지금부터 4회에 걸쳐 소개되는 '진보성 판단 방법'은 특허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다소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변리사나 특허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향후 특허 관련 업무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분들, 기업에서 특허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고 특허 전략을 수립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 그리고 발명자들과 특허 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분들, IT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특허발명의 진보성'을 공부하여 두는 것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2013. 3. 경 특허법원에 발령받아 특허 실무를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든 그 당시에 김 OO 기술심리관{장수특허(1)의 '가슴 뛰게 만드는 발명가의 열정'에서의 김 OO 기술심리관과 동일인이다}은 사건에 대한 기술설명을 하면서 항상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젠 다음 단계를 이해하시면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라고 격려하였던 기억이 난다. 포기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듯 따라갔을 때 이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던 기술 내용과 쟁점들은 명확해졌고 지식과 경험이 쌓여가면서 나는 어느새 특허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동일하게 격려하고 싶다.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젠 다음 단계를 이해하시면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특허법 제29조 제2항은 특허의 진보성과 관련하여 '특허출원 전에 그 발명이 속하는 기술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통상의 기술자)이 종래 공지된 발명에 의하여 쉽게 발명할 수 있으면 특허를 받을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 특허법 규정에 의하면 통상의 기술자가 쉽게 발명할 수 있으면 진보성이 부정되고, 통상의 기술자가 쉽게 발명할 수 없으면 진보성이 인정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진보성을 판단하는 것은 위 법규정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특허 강의를 의뢰받게 되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특허 진보성에 대한 설명이다. 특허발명의 진보성을 설명할 때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면서 고민 끝에 사용한 예는 허들 경기였다. 100m 거리를 84cm 높이의 허들 10개를 넘어야 완주하는 허들 경기에서, 통상의 기술자는 5개의 허들을 넘는다고 할 때 6개 이상의 허들을 넘게 되면 진보성이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목표한 바는 84cm 높이의 허들 10개를 넘어 100m를 완주하는 것이지만,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은 84cm의 허들 5개를 넘어 50m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84cm의 허들 6개를 넘어 60m에 도달하는 것은 통상의 기술자에게는 쉽지 않은 진보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허들 경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진보성을 판단하기 위하여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이 중요한 기준 척도가 된다. 안타깝게도 실제 발명에서는 허들 경기의 '84cm의 허들 5개를 넘어 50m 도달'과 같이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이 명확히 산출되지는 않는다. 기술분야별로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이 상이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술 수준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확정할 것인가가 문제 된다. 실무에서는 특허발명의 출원 전에 해당 기술에 대한 공지된 자료나 전문가 증인의 증언 등을 통해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을 파악하고 있다. 통상의 기술자의 기술 수준을 파악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통상의 기술자가 과연 84cm의 허들 6개 이상을 '쉽게 넘을 수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또 다른 난관이다.
종래의 진보성 판단은 판단자가 이미 당해 발명을 잘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발명을 구성 요소별로 분해 후 선행발명들의 구성과 대비함으로써 해당 구성이 선행발명들에 존재하기만 하면 진보성을 쉽게 부정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리고 위와 같이 발명을 개개의 구성으로 나누고 각 개별 구성을 선행기술들과 대비하는 것은 발명을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체로서 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특허발명이 구성 A, B, C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선행발명 1에 구성 A, 선행발명 2에 구성 B, 그리고 선행발명 3에 구성 C가 존재하면 위 선행발명들의 결합이 곤란한지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특허발명이 선행발명들로부터 쉽게 발명할 수 있다고 보아 진보성을 부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에 특허법원은 위와 같은 진보성 판단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심리방식연구회를 결성하였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약 2년 동안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실무예를 참조하여 진보성 판단 방법을 연구한 다음, 그동안 축적해 온 심리방식을 토대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진보성 심리방식의 개선을 도모하였다.
개선된 진보성 심리방식(“K-Inventive Step”)의 핵심 내용은 1) 먼저 대상발명의 청구범위와 기술사상 확정하고, 2) 선행발명의 범위와 기술내용을 확정하며, 3) 대상발명과 가장 가까운 선행발명[이하 ‘주(主)선행발명’이라고 한다]을 선택한 다음, 4) 대상발명을 주선행발명과 대비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고, 5) 통상의 기술자가 특허출원 당시의 기술수준에 비추어 이와 같은 차이점을 극복하고 대상발명을 쉽게 발명할 수 있는지를 심리한다는 것이다.
"K-Inventive Step"에 대하여 특허법원 손 OO 기술심리관은 선행발명을 대상발명과 동일한 형태로 구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통상의 기술자에게 용이한 것인지를 논하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의 과정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보성 판단에 대한 국내 특허 실무를 가장 잘 설명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보성 심리·판단방식은 빠르게 정착하여 심사 및 심판, 심결취소소송에서 확립된 실무로서 운영되어왔고, 결국에는 대법원 2019. 10. 31. 선고 2015후2341 판결에서는 이러한 특허법원 실무를 반영하여 진보성 심리방식을 확인하는 내용의 판시를 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