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01
초등학교 때 나는 늘 땅을 보며 걸었다. 내 몸집만 한 커다란 책가방을 어깨에 지고, 내 다리만 한 실내화 가방을 한 손으로 든 채로. 아스팔트 바닥을 보고 걷고 있자면 내가 참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바로 아래 있네. 땅이 참 빠르게 움직이네.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걷고 있었네. 학교로 가고 있었네. 아스팔트가 참 딱딱해 보이네.
오늘도 땅을 보며 걷는다. 내 몸집만 한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 지고, 내 상체만 한 보조가방을 앞으로 맨 채로. 땅이 바로 아래 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20여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작구나. 아스팔트 바닥이 빠르게 움직인다. 걷고 있다는 생각도 안 하는데 반 자동으로 걷고 있었네. 어디로 가고 있었더라. 회색 아스팔트에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파란색 배낭을 멘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하늘 아래, 회색 아스팔트 위에, 회색 운동화를 신고 선 그. 그의 두 발이 멈춰있다. 뭐해? 내 물음에,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차 한 대가 우리가 선 도로 옆을 지나갔다. 차가 저 멀리로 사라지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도로 위엔 우리 두 사람뿐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하늘. 해가 숨어버린 우중충한 하늘인데도 눈이 부시다. 무거운 비 한 방울이 뚝, 오른쪽 눈가로 떨어졌다. 고개를 내렸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지?”
그가 물었다.
“뭐…. 이 정도면 더 걸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도 나도, 서로가 무언가를 결정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않자 하늘이 나섰다. 빗방울은 더 잦고 굵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배낭을 벗어 벤치 위에 내렸다. 우비를 꺼내야겠다.
“냄새난다. 아프탈린 냄새.”
구깃구깃한 연두색 우비를 펼치며 내가 말했다. 한 달 전 그와 함께 동대문 등산용품점에서 장만한 우비다. 길 떠난 지 일주일인데, 우비를 이제 처음 꺼내는 건 행운인 거지? 뭐? 그가 되물었다. 우비 말이야! 처음 꺼내본다고! 두 팔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버스정류장 시멘트 지붕 위로 빗줄기들이 철썩철썩 떨어지고 있었다. 도트 무늬를 그리며 군데군데 젖어들던 아스팔트 도로는 어느새 전체가 짙은 회색이 되어있었다. 정류장 바닥에서 비린 흙냄새가 올라왔다. 배낭이 비에 젖지 않게 배낭 위로 우비를 걸쳐 입었다. 우비를 뒤집어쓴 우리. 다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본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가 봉긋 솟아오른 제 오른쪽 볼을 긁적였다.
“일단 자등리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어디까지 가야 숙소가 나올지는 모르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는 게 문제야. 쿠-웅! 멀리서 대포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가자.”
그가 말했다. 그래, 가자. 목적지는 모르지만, 가자.
빗물이 고인 웅덩이 위로 굵은 비가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가야 했다. 심호흡을 하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경알 위에 달라붙은 빗방울 사이로 앞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연두색 버스가 빗물을 튀기며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은색 머리를 뽀글뽀글하게 만 할머니 한 분이 버스 창문 너머 우리를 바라봤다. 비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즈음, 커다란 배기통 소리가 들리더니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오토바이에는 하얀 비닐 우비를 쓴 중년 남자가 타고 있었다. 여행 다니시나 봐요? 오토바이 시동 소리와 빗소리를 제치며 남자가 외쳐 물었다.
"걸어서 다녀요?”
남자가 물었다.
"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부산이요."
“부산? …. 여기가 철원인데?”
“네. 부산에 가요.”
“아휴…. 힘드시겠네. 근데, 왜 걸어요?”
…. 왜냐고? 옆에 선 그를 슬쩍 바라봤다. 야. 우리 왜 걷는 거였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이마 위에 맺힌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닦아냈다. 그의 하얀 이마를 쳐다보며,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던 질문을 생각했다. 선희가 물었다. 그런 고생스러운 여행은 왜 가느냐고. 민이가 말했다. 나는 절대 안 할 여행이라고. 정현 언니가 말했다. 돈 많이 줄 테니 그 커다란 배낭 한 시간만 들라고 해도 안 할 거라고. 그때 나는 뭐라고 대꾸했던가. 더스틴은 뭐라고 말했던가. 말이 되지 못한, 정리되지 않은 이런저런 생각들. 벗어나고 싶어서. 일상에서 벗어나면 보일까 싶어서.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에게 있어 좋은 삶이란 뭔지에 대한 답이. 하지만 아직 모른다고. 이 여행이 그 답을 찾기 위한 해결책이 될지, 괜한 사서 하는 고생 거리가 될지는. 해봐야지만 알 것 같다고.
아저씨의 질문에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좋은 삶이란 뭘까.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